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바리톤

리릭 바리톤의 모델 Mikhail Karakash (미하일 카라카슈)

정준극 2008. 3. 25. 10:04
 

리릭 바리톤의 모델 Mikhail Karakash (미하일 카라카슈)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러시아에는 여러 명의 훌륭한 성악가들이 등장하였다. 러시아에서는 테너보다 바리톤이나 베이스가 더 많이 배출되었다. 러시아적인 음울하고 무거운 환경 때문인지도 모른다. 20세기 초반을 장식한 러시아의 뛰어난 바리톤으로서는 이반 그리주로브(Ivan Gryzunov), 오스카르 카미온스키(Oscar Kamionsky), 폴리카르프 오를로브(Polikarp Orlov), 니콜라이 세베르스키(Nicolaj Seversky), 니콜라이 셰벨레브(Nikolaij Shevelev), 그리고 미하일 카라카슈를 뻬놓을수 있다. 이들 모두 모스크바의 볼쇼이와 생 페테르부르크의 마리인스키의 바리톤 주역들이었다. 그중에서 카라카슈는 세련되고 따듯하며 설득력 있는 아름다운 음성으로 모두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다. 특히 그의 고귀한 맨너와 귀족적인 모습은 음악에서도 훌륭하게 표현되어 찬사를 받았다. 그는 리릭 바리톤의 모델이었다. 그의 음성은 우렁차거나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공명이 잘 되어 친밀감을 주었다. 연주회장의 맨 구석에 앉아있는 사람에게도 마치 바로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깨끗하고 분명하게 들린다면 친밀한 존경심을 보내지 않을수 없는 노릇이다. 그의 고음은 특별히 세련되었다. 그리고 레가토는 놀라운 칭송을 받는 것이었다. 당시의 어떤 바리톤도 카라카슈에 비길만큼 빛나고 아름다운 음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고음이든 저음이든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부드럽게 노래를 불렀다. 그가 부른 오네긴의 아리아는 카라카슈의 그러한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보리스 고두노프'

 

미하일 카라카슈는 1887년 크리미아의 심페로폴(Simferopol)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생 페테르부르크대학의 교수였다. 카라카슈는 처음에 철학과 역사를 공부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성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의 성악선생은 유명한 바리톤이며 성악코치인 스타니슬라브 가벨(Stanislav Gabel)이었다. 그는 1911년, 24세때에 마리인스키에서 오페라에 데뷔하였다. 마리인스키에는 7년동안 있었다. 가장 성공적인 역할은 오네긴이었으며 이밖에도 림스카-코르사코프의 ‘짜르의 신부’에서 그르야즈노이(Grjaznoj), 피가로(세빌리아의 이발사), 머큐쇼(로미오와 줄리엣), 마이에르베르의 ‘위그노’에서 느브르 백작(Neveres), ‘나비부인’의 샤플레스, ‘카르멘’의 에스카미요, ‘파우스트’의 발렌틴, 그리고 다르고미즈스키(Dargomyzhsky), 타나예프, 루빈슈타인, 쿠이(Cui) 등의  러시아 작품에서 리릭 바리톤 역할이었다. 정상에 오른 카라카슈는 모스크바의 볼쇼이에 합류하여 볼쇼이의 가장 존경받는 바리톤으로 활동하였다. 소프라노 엘리자베타 포포바(Elisaveta Popova)와 결혼한 그는 포포바와 함께 발칸제국을 순방하여 연주회를 가져 갈채를 받았다.

 

'유진 오네긴'

 

1921년 이 부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러시아를 떠났다. 그후 이들은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의 오페라 무대에서 함께 모습을 보였다. 카라카슈는 당시 파리에 있던 러시아의 정상급 소프라노 마리아 쿠츠네조바(Maria Kuznetsova)를 도와 파리에 이민온 러시아 성악가들의 앙상블 그룹인 ‘오페라 루쓰’(Opéra Russe)를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고국을 떠난 타국에서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되어 그는 음성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는 1926년, 불과 39세때에 무대에서 은퇴하였고 그후 여러 오페라극장에서 성악코치로 활동하다가 부카레스트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정착하였다. 1931년 그는 파리의 라흐마니노프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몇 년후인 1937년 부카레스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카라카슈를 끝까지 따르며 존경했던 가장 성실한 후배로는 게오르그 오츠(Georg Ots), 파벨 리시치안(Pavel Lisitsian)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