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 사람들

합스부르크가 뭐 길래?

정준극 2008. 3. 27. 21:50

[합스부르크가 뭐 길래?]


중세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럽역사에서 합스부르크(Habsburg: 영어에서는 간혹 Hapsburg라고 쓰기도 함)라는 단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13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장장 6백여년동안 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세력권 안에 둔 신성로마제국을 운영한 왕조이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루마니아 일부, 스페인, 포르투갈, 갈리지아(Galizia)와 로도메리아(Lodomeria),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 투스카니(Tuscany), 오스트리아-에스테(Austria-Este), 독일 국가들(German Nations), 슈티리아(Styria), 카린티아(Carinthia), 티롤(Tyrol), 모데나(Modena), 파르마(Parma), 베네치아(Venezia), 트리에스테(Trieste), 사르디니아(Sardinia), 스위스 일부, 그리고 저 멀리 아메리카 대륙의 멕시코와 아시아의 필리핀에 이르기까지 통치력을 행사했던 왕조이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비엔나를 본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역사와 합스부르크의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합스부르크를 상징하는 기(旗)는 빨간색과 하얀색이 직사각형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오늘날 오스트리아공화국의 국기와 같다. 합스부르크와 오스트리아를 상징하는 백색과 적색의 산뜻하고도 아름다운 조화는 오스트리아(특히 비엔나)의 어느 곳에서나 쉽게 찾아 볼수 있다. 가운데가 백색이며 아래 위가 적색인 비엔나의 기도 합스부르크의 기와 관련이 있다. 합스부르크의 문장(紋章)은 쌍두의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펼친 것으로 그 주위에는 제국의 영토들을 대표하는 문장들이 둘러쳐 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문장에도 쌍두독수리가 등장한다. 

 

 

합스부르크를 상징하는 쌍두의 독수리


합스부르크 왕조는 11세기로부터 13세기까지 현재의 스위스의 슈봐비아(Swabia) 공국에 있는 합스부르크라는 지방을 중심으로 출발하였던 가문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의 아르가우(Aargau)가 이에 속한다. 합스부르크라는 말은 하비히츠부르크(Habichtsburg), 즉 매의 성(Hawk Castle)이란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매들만이 올라갈수 있는 높은 산악지대에 있는 성이었던 것 같다. 그 매가 나중에 쌍두의 독수리로 변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의 위용을 떨쳐 보이게 되었다. 스위스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점차 영향력을 확장하여 현재의 독일 남서부, 즉 당시의 알사스(Alsace), 브라이스가우(Breisgau), 아르가우(Aargau), 투르가우(Thurgau)에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동남부, 즉 오늘날의 오스트리아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여러 왕실들과 혈통으로 연결되어 수세기에 걸쳐 유럽 왕실의 중심적인 존재로 부각하였다.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는 직접적으로 현재의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헝가리, 보헤미아(체코), 크로아티아, 폴란드 일부, 루마니아 일부, 스위스 일부, 벨기에, 네덜란드, 리히텐슈타인, 이탈리아 북부, 시실리, 사르디니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속하였으며 간접적으로는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발칸반도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니 참으로 대단하기는 대단하다. 일반적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시조대왕은 루돌프1세(재임기간: 1273-1291)라고 한다.

 

 독일 슈파이어(Speyer) 대성당에 있는 루돌프1세 기념상

 

바야흐로 유럽에서 행세깨나 하게된 합스부르크 가문에 1273년 9월 어느날 밤, 프랑스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백작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는 통보였다. 루돌프 백작은 처음에 그 소리가 농담인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루돌프는 곧 합스브루크 가문의 권위를 다지기  위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루돌프1세의 아들들은 부유한 공국인 오스트리아를 비롯하여 다뉴브(Danube)공국, 슈티리아(Styria)공국의 영토를 상속받았다. 이로서 합스부르크는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을 무너트린 1806년까지 거의 6백년동안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며 유럽의 대부분을 영향권 안에 두었다. 루돌프6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를 공식적으로 비엔나로 정하고 성슈테판성당의 건설을 계속하였다. 루돌프6세는 1365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의 하나인 알마 마터 루돌피나(Alma Mater Rudolfina)를 설립하였다. 오늘날 저 유명한 비엔나대학교의 전신이다.

 

 합스부르크 대공 및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의 왕관, 홀, 보주(비엔나 미술사박물관 산하 황실보물박물관 전시)

 

14-15세기에 들어와서 합스부르크는 스위스의 원래 요람지를 거의 잃었다. 하지만 북방으로 진출하여 결과적으로 나중에 카린티아(Karinthia)와 크라인(Krain), 티롤, 그리고 동쪽으로는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까지 영토를 넓혔다.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1세가 부르군디(Burgundy: 현재의 독일 남부지역에 있던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마리아(Maria: Mary)와 결혼하였고, 그의 아들 ‘핸섬왕 필립’(Philip the Handsome)이 스페인의 왕위 계승자인 후아나(Juana) 공주와 결혼하였으며 그의 아들 샤를르5세(카를로스5세: Charles V)가 스페인, 남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당시는 오스트리아도 여러 공국으로 분할되어 있었음) 등의 군주로 즉위함으로서 합스부르크는 독수리처럼 비상(飛翔)할 차비를 차리게 되었다. 합스부르크가 비엔나에 둥지를 튼 것은 막시밀리안2세 때, 현재의 비엔나 교외에 있는 쇤브룬 궁전의 터를 확보하고부터였다. 막시밀리안2세는 핸섬왕 필립의 또 다른 호칭이다. 아무튼 막시밀리안2세 시절로부터 비엔나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본부가 되었다.

 

 

비엔나 중심가에 있는 호프부르크 궁전(노이에 호프부르크)


합스부르크는 1521년 당시 스페인 왕을 겸하였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로스5세(Charles V: 1516-1556)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영토를 동생 페르디난트1세에게 분배함으로서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와 스페인-합스부르크로 분리 되었다. 1556년 카를로스5세가 세상을 떠난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는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의 몫이 되었으며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출신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합스부르크의 세습 영토와 보헤미아 및 헝가리 왕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한편, 스페인-합스부르크는 스페인 왕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남부의 대부분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어떤 시기에는 포르투갈에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헝가리가 오토만 터키에게 점령되어 있을 때에도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다. 그런 기간이 150년이나 되었다.

 

 

비엔나 서남쪽에 있는 쇤브룬 궁전(합스부르크의 여름 궁전)


스페인-합스부르크는 1700년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결과 합스부르크에서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로 세력을 넘기게 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는 174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이던 샤를르6세(카를6세)가 큰 딸 마리아 테레자를 다음번 황제 계승자로 지명하면서 야기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으로 결국 독일 쪽과 오스트리아 쪽이 갈라지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유럽의 새로운 패자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이 소멸하는 운명을 마지하게 되었다. 샤를르6세 이후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자는 프랑스의 로레인(Lorraine) 대공인 프란시스 스테판(Francis Stephan)과 결혼함으로서 그 후손들이 비엔나에서 합스부르크의 전통을 유지하였다. 이로부터 마리아 테레자와 로레인의 프란시스에 의한 합스부르크를 합스부르크-로레인(Habsburg-Lorraine) 분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대공(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의 대관식 만토


합스부르크의 또하나 특징은 근친결혼이다. 왕조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근친간 결혼을 추진하였다. 특히 스페인-합스부르크에서 근친간의 결혼이 성행함으로서 결국 후손이 소멸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스페인-합스부르크에서는 근친결혼으로 사산아 출생, 유아 사망, 기형, 정신이상자, 단명의 후손들이 다수 생산되었던 것도 숨길수 없는 사실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로 유명한 필립2세의 아들 돈 카를로스와 그후의 카를로스2세는 대표적인 정신이상자였다. 반면,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에서는 근친결혼이 상대적으로 성행하지 않아 자손이 그다지 이상하게 되는 염려는 없었다. 대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서는 천연두 때문에 많은 자손들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비엔나시내 카푸친교회 지하실에 있는 제국영묘.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시스 황제의 관

                                 

합스부르크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 것은 1806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때문이었다. 나폴레옹(나폴레옹1세)이 유럽을 제패한후 독일을 재편성하자 이에 따라 주로 독일국가들로 구성된 신성로마제국은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1804년 5월, 교황을 파리로 데려와 자신이 프랑스 제국의 황제가 되는 대관식을 가졌다. 과거에 전통적으로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주관하였다. 그런데 나폴레옹과 같은 형편없는 인간의 대관식을 축복하는 처지가 되었으므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는 가소롭기도 하고 속이 상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시스2세 황제는 신성로마제국이 소멸될 것을 걱정하여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한지 3개월 후인 1804년 8월,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선포하고 이후로 오스트리아의 대공(Archduke)을 황제(Kaiser: Emperor)로 부르도록 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정통성을 유지하였다. 프란시스2세는 오스트리아가 제국의 첫 황제로서 자신을 프란시스1세라고 칭했다.

 

프란시스는 한술 더 떠서 대외 선전용으로 자기의 타이틀을 ‘오스트리아 황제; 예루살렘, 헝가리, 보헤미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갈리치아, 로도메리아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로레인, 잘츠부르크, 뷔르츠부르크, 프랑코니아, 스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의 공작; 크라코우의 대공작; 트란실바니아 대공자; 모라비아 총독; 산도미르, 마소비아, 류블리, 상하 실레지아, 아우슈비츠, 자토르, 테셴, 프리울레의 공작; 베르흐테스가덴 및 메르겐타임의 공자; 합스부르크, 고리지아, 그라디스카, 티롤의 백작; 상하 루사티아 및 이스트리아 총독...’이라는 거창하고도 화려한 명칭을 사용하도록 하여 나폴레옹을 비롯한 그 추종세력들의 기세를 누르려 했다. 아무튼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들만큼 수집벽이 있는 사람들도 없다. 비엔나에 널려 있는 박물관들을 보면 합스부르크 왕실이 얼마나 수집에 열성적이었는지를 잘 알수 있다. 이들은 또한 영토를 수집했고 타이틀을 수집했다. 그래서 타이틀이 그렇게도 길다.  

 

 비엔나 미술사박물관에 있는 프란츠 요셉 황제의 흉상. 가장 오래동안 오스트리아제국(나중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통치한 황제


합스부르크에게 ‘예루살렘의 왕’이란 칭호를 준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성배(聖杯)의 수호자라는 의미에서 이다. 전설에 따르면 성배는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에서 사용한 포도주잔으로 나중에 예수께서 십자가상에 달리셨을 때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가 흘린 보혈(寶血)을 담는데도 사용되었다고도 한다. 이 성배를 막달라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예수의 가장 친한 친구) 등이 프랑스로 가져왔다고 하며 그후 수세기동안 사라졌다가 영국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중 한 사람인 파르지팔(Parsifal)의 누이동생 엘레인에게 성배의 환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원탁의 기사들이 성배를 찾아 나섰으며 마침내 파르지팔, 갤러하드, 보르스(Bors)가 찾아내어 비밀스런 곳에 보관하였다는 것이다. 그 성배의 관리자를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한편 기독교 성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로 성창(聖槍)이 있다. 성창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은 로마병사 중의 한 사람인 롱기누스(Longinus)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의 허리를 찌른 창으로 나중에 아리마데 요셉이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허리를 찌른 롱기누스는 나중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여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성배와 성창을 소유한 사람이 세상(유럽)을 지배한다고 한다. 그러한 성배와 성창 모두를 합스부르크 왕조가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비엔나의 제국보물전시관(Schatzkammer)에는 얼마 전까지도 성창이 전시되어 있었다.

 

 로마 병사 롱기누스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는 그림. 합스부르크 가문이 창을 보관하고 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1918년 제1차 대전이 끝나는 것과 함께 실질적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카를(Karl: 샤를르1세: 카를1세)이었다. 그 이전에 하나의 몸체였던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867년 프란츠 요셉 황제 시절에 ‘타협’(Ausgleich: Compromise)이라는 깃발아래 분리되었다. 즉, 헝가리는 합스부르크의 기치아래에 있지만 거의 독자적인 자치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합스부루크의 프란츠 요셉 황제는 명목상 헝가리 국왕을 겸하였을 뿐이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1차대전의 종식과 함께 몰락하였지만 가문은 명맥을 잇고 있다. 근세에 들어서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표는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오토(Otto)였다.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카를1세의 장남이다. 오토의 아들 칼 반 합스부르크(Karl van Habsburg: 1961- )는 유럽합중국의 건설을 촉진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EU도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합스부르크 왕조 최후의 황태자 오토(앞줄 가운데)와 최후의 왕비 지타(앞줄 왼쪽), 다른 사람들은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를과 지타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 오토는 2011년에 서거했다. 이로서 합스부르크 왕조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기간은 학자에 따라 두가지로 본다. 첫째는 1278년,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제국의 동남부, 즉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상당부분을 영지로 받은 때부터 1차 대전이 끝나는 것과 함께 오스트리아 제국이 문을 닿은 때까지를 보면 640년이 된다는 주장이다. 혹자는 루돌프1세가 오스트리아의 대공으로 즉위한 1276년을 합스부르크왕조의 공식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두 번째는 1521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이었던 카를로스5세(샤를르5세)가 동생 페르디난트1세에게 현재의 오스트리아 대부분을 배분한 때로부터 계산하면 397년이 된다. 그리고 1736년 마리에 테레자와 로렌인의 프란시스 대공이 결혼함으로서 시작된 합스부르크-로레인 분파로부터 계산하면 182년이 된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가족들. 좌측이 부군 프란시스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