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바벤버그-3공화국

야소미르고트 대공

정준극 2008. 4. 7. 15:50

[야소미어고트 대공]

 

비엔나는 1156년 하인리히2세대공인 야소미어고트(Jaromirgott) 때에 오늘날의 암 호프(Am Hof)에 비로소 궁전이 건설되어 명실공히 왕국의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이로서 비엔나는 유럽의 새로운 중심지로서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오늘날 플라츠 암 호프(Platz am Hof)는 야소미어고트대공이 본거지로 삼았던 곳이며 슈테판성당 정문으로부터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야소미어고트슈트라쎄(Jaromirgottstrasse)는 야소미어고트대공이 입버릇처럼 말한 Ja so mir Gott helfe(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다)라는 표현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거리이다. 

 

 비엔나 시청공원(라트하우스파르크)에 있는 야소미어고트(하인리히2세) 기념상

 

야소미어고트대공으로 인하여 비엔나가 점차 활기를 띠게 되자 유럽의 유명한 음유시인들이 비엔나궁전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탄호이저(Tannhäuser. 궁정연애시인)는 비엔나 궁전에서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짐작건대 이때로부터 비엔나의 음악예술이 영글기 시작했다고 본다. 비엔나의 야소미르고트 궁전은 유럽사교계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십자군들도 성지 예루살렘을 가기위해서는 비엔나를 거쳐갔다.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싸(Barbarossa)황제는 성지로 가기 전에 비엔나에 들려 십자군전쟁을 준비했다. 영국의 사자왕 리챠드는 비엔나 서쪽 80km 떨어져 있는 뒤른슈타인(Dürnstein)성에 감금되었다가 막대한 금액의 몸값을 내고 석방되었다. 어떤 기록에는 지금의 에르드버그(Erdberg) 지하철 역이 있는 곳에 감금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그건 잘못 알려진 내용이다.

 

비엔나 근교 뒤른슈타인(Duernstein)의 언덕에 있는 작은 고성. 이곳에 사자왕 라챠드가 감금되어 있었다가 몸값을 내고 석방되었다고 한다.

 

한편, 사자왕 리챠드의 몸값은 은화 5만 마르크였다고 한다. 이 금액은 은 12톤에 해당하는 것으로 3톤짜리 트럭 4대에 은을 가득 실은 분량이다.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5세대공은 이 몸값으로 비엔나 도심지를 확장하는 사업과 비엔나 신시가지(비너 노이슈타트) 공사비의 일부를 충당했다.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비엔나의 발전에 영국인들의 기여가 컸다고 할수 있다. 도심지의 확장과 함께 비엔나는 번창일로를 걸었다. 후담이지만 레오폴드5세는 십자군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십자군들을 학대하였다. 그래서 급기야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당시 파문은 죽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레오폴드5세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얼마후 레오폴드5세는 마상무술경기를 하던중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갑작스런 일이었기 때문에 참회하고 면죄 받을 기회도 없었다.

 


프라이융에 있는 쇼텐슈티프트(수도원)와 쇼텐키르헤(교회)

                         
 

1246년, 바벤버그왕조의 프리드리히2세대공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약 12년동안 군주가 없는 공위(空位)시대로 지냈다. 그러다가 1278년 루돌프1세가 보헤미아의 오토카르(Ottokar)를 퇴치하고 왕에 올랐으며 이로서 합스부르크왕조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때로부터 비엔나의 황금시대가 시작되었다. [오토카르와 오타크링의 오타크(Ottak)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클로스텐부르크에 소장되어 있는 바벤버그 왕조의 가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