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바벤버그-3공화국

루돌프4세의 치적

정준극 2008. 4. 7. 15:51

[루돌프4세의 치적]

 

루돌프4세

 

바벤버그 왕조의 하인리히2세(야소미어고트)가 비엔나를 본거지로 삼기 시작한 때로부터 한참 후인 1360년대에 이르러서 비엔나는 비로소 명실공히 동유럽의 중심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루돌프4세의 치하에서였다. 루돌프4는 우선 비엔나대학교를 세워 비엔나가 학문의 중심지가 되도록 했다. 그리고 성슈테판성당의 본당 건물을 완성했다. 성슈테판성당은 하인리히2세의 치하에서 봉헌되었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루돌프4세 때에 비로소 완성되었다. 우뚝선 성슈테판 성당의 모습은 날로 발전하는 비엔나의 상징이었다. 그러던 차에 합스부르크 내에서 왕위 계승권을 놓고 일대 분규가 일어났다. 간단히 말해서 독일 사람들이 뭐가 그리 대단하기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까지 겸직하느냐? 비엔나를 중심으로한 오스트리아 공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정통성이 있으므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나와야 한다는 주장이 분쟁의 핵심이었다. 또 한가지 분쟁의 이유는 왜 오스트리아의 통치자를 공국의 군주(공작: Duke)라고만 칭해야 하느냐? 왕이라고 칭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참을수 있다. 대신 대공(Archduke)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분규는 귀족계급과 장인계급(일반시민)으로 나뉘어 뜨겁게 진행되었다. 레오폴드4세는 장인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귀족계급들은 강철 대공이라고 불리는 에르네스트(Ernest the Iron)를 지지하였다. 레오폴드4세는 1408년 귀족계급을 지지하던 콘라트 포아라우프(Konrad Vorlauf) 비엔나시장을 체포하여 과감하게 처형했다. 이로서 레오폴드4세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고 비엔나는 점차 신성로마제국의 본거지로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합스부르크의 알베르트5세가 알베르트2세라는 타이틀로 독일왕(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선출되자 비엔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알베르트라는 이름은 1421-22년 비엔나에서 유태인들을 추방한 장본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성슈테판대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