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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의 활동과 반종교개혁운동

정준극 2008. 4. 7. 15:52

[예수회의 활동과 반종교개혁 운동]

 

멜히오르 클레슬 추기경

 

기왕 종교 얘기가 나온 김에 사족을 붙인다면, 루터에 의한 독일에서의 종교개혁은 1517년에 시작되었다. 로마 교황청을 등에 업은 가톨릭의 지나친 월권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유럽의 여러 왕국들은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 즉 구원은 오로지 믿음으로서만 이루어질수 있다는 주장을 크게 환영하고 지지하였다. 로마 가톨릭에 등을 돌리는 국가들이 증가하자 이로서 유럽의 정치, 종교 판도는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어떤 나라는 개신교를 인정했지만 반면에 상당수의 나라들은 로마 가톨릭을 옹호하고 개신교를 박해했다. 독일와 저지대(네덜란드 등), 그리고 북구의 여러 나라들은 대체로 루터교에 합세하였다. 동구의 여러 나라들도 개신교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같은 독일어 권역이었으므로 루터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에 동참하자는 여론이 있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본거지로서 가톨릭을 모른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럭저럭 2, 30년이 흘렀다. 1522년 신성로마제국황제인 페르디난트1세는 그의 아버지가 자나깨나 ‘반가톨릭들을 없애야 해!’라고 중얼거리는 바람에 영향을 받아 비엔나의 반가톨릭 분자들, 즉 루터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도들을 모두 체포하여 처형했다. 감히 누구 앞에서 로마 가톨릭을 배반하느냐는 생각에서였다. ‘비너(비엔나) 노이슈타트 피의 심판’이라는 사건이었다. 비너 노이슈타트에서 개신교도들의 피가 강물을 이루었던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비엔나는 골수 가톨릭인 신성로마제국의 통제아래로 확실하게 들어가게 되었다. 몇 년후 헝가리와 보헤미아가 합스부르크제국의 장막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그동안 신성로마제국에 속하여 있는 나라들에 불었던 개신교 바람은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가톨릭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이틈을 타서 가톨릭에 부화뇌동하는 예수회가 비엔나로 유입되었고 약삭빠른 이들은 얼마후부터 비엔나 궁전에서 많은 영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으로서도 예수회라는 단체가 로마 가톨릭의 앞에 서서 종교개혁 운동을 박해하여 주니 일석이조였다. 그 핵심에는 비엔나 대주교인 멜키오르 클레슬(Melchior Klesl 또는 Khlesl: 1552-1630)이 있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과는 달리 지금까지 가톨릭 국가로 존재하게된 것은 예수회와 클레슬 대주교의 역할 때문이었다고 본다. 예수회에 대하여는 일반 사람들의 감정이 좋지 않았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적’에 나오는 무어인 하인인 모노스타토스는 예수회 사람들의 치사한 활동을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 1번지에 있는 예수회교회. 왼쪽에 있는 건물은 현재 오스트리아 학술원

  

반종교개혁운동을 주도한 멜히오르 클레슬(Melchior Klesl) 추기경


멜히오르 클레슬(Melchior Klesl 또는 Khlesl: 1552-1630)은 오스트리아의 정치인이며 로마 가톨릭교회의 추기경으로 반종교개혁시기에 크게 활동했던 인물이다. 반종교개혁운동은 16-17세기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운동을 반대하고 가톨릭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운동이기도 했지만 이와 함께 가톨릭 내부에서도 자체개혁이 필요하다는 운동이었다. 멜히오르는 1598년부터 비엔나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616년부터는 추기경의 직분을 감당하게 되었다.

 

멜히오르 클레슬 추기경


비엔나에서 태어난 멜히오르의 부모는 원래 가톨릭이었으나 개신교가 된 사람들이었다. 멜히오르의 아버지는 빵 만드는 사람이었다. 비엔나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한 멜키오르는 뜻한바 있어서 '나의 갈길 다 가도록 가톨릭 뿐!'이라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러자 그의 부모들도 개신교에서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비엔나대학교를 나온 멜히오르는 가톨릭 교단의 수도신부가 되어 성직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멜히오르는 아직 정식 신부가 되지 않았지만 젊은 나이에 성당에서 강론을 했고 코르노이부르크(Korneuburg) 등지에서는 별도의 집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다. 1579년, 멜히오르는 27세의 약관으로 비엔나 슈테판 성당의 중직 신부가 되었고 아울러 비엔나대학교의 자문위원이 되었다. 얼마후 슈테판 성당에서 정식 신부로 서품을 받은 멜히오르는 남부 오스트리아 파싸우(Passau)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멜키오르는 개신교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링슈트라쎄에서 바라본 비엔나대학교.

 

멜키오르의 적극적인 활동에 감명을 받은 루돌프2세는 그의 반개혁주의 운동을 이모저모로 지원하였다. 이에 힘입은 멜키오르는 반개혁주의 운동은 평생사업으로 삼고 열심을 다하였다. 멜키오르는 바덴(Baden), 크렘스(Krems), 슈타인(Stein)등 오스트리아의 주요 도시를 방문하면서 집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을 개신교로부터 가톨릭으로 다시 개종토록하였다. 루돌프2세는 그런 멜키오르가 기특해서 그를 오스트리아 대공의 자문관으로 임명하였다. 2년후 루돌프2세는 멜키오르를 궁정 신부 겸 비너 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 추기경령의 행정관으로 임명하였다. 비너 노이슈타트는 주민들의 상당수가 개신교로 개종하였지만 멜키오르가 행정관으로 임명된 이후 단시간내에 이곳의 개신교도들을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토록 하여 가톨릭의 위세를 회복하는 실적을 쌓았다.

 

 멜히오르가 봉직했던 비너 노이슈타트 대성당

 

1598년 멜히오르는 비엔나 주교로 임명되었다. 당시 비엔나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침체된 상황이었다. 멜키오르는 비엔나에서의 가톨릭 회복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멜히오르는 마치 가톨릭을 위해 태어난 사람과 같았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이 헝가리에서의 개신교 활동을 양보할 것 같자 이를 강력히 막는 일에 앞장섰다. 그로부터 거의 20년후인 1611년, 나중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될 마티아스(Matthias)는 멜키오르를 개인 추밀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멜히오르는 마티아스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마티아스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도록 적극 지원하였다. 당시 로마 가톨릭의 신성로마제국은 독일 여러 지역에서 개신교 바람이 불고 로마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가자 궁여지책으로 개신교와 가톨릭간의 화해를 모색하였다. 멜히오르는 이 점이 못마땅했다. 새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선출된 마티아스로 하여금 개신교 강압 정책을 사용토록 요청하였으나 사정이 사정이니만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마티아스 황제는 오래 자리에 머물지 못했다. 새로운 황제로서 티롤의 막시밀리안 대공과 스티리아의 페르디난트 대공이 경합하였다. 페르디난트는 멜히오르가 자기를 반대하였음을 잘 알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마티아스 황제

 

1618년 마티아스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페르디난트가 페르디난트2세로서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이미 막강한 영향력을 쥐고 있는 멜히오르를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 마침 보헤미아에서 개신교들이 득세하여 가톨릭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멜히오르는 페르디난트2세 황제에게 보헤미아에서 가톨릭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 특사를 보내라고 권면하였다. 페르디난트2세 황제는 보헤미아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을 잃지 않고 싶어서 특사 두명을 프라하로 보냈다. 하지만 특사들은 개신교 귀족들의 손에 프라하궁전의 창밖으로 내던져지는 불운을 겪었다. 이어 보헤미아에서 가톨릭을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3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멜히오르로서도 어쩔수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의 대공들은 멜히오르를 체포하라고 요구했다. 멜히오르는 티롤의 암브라스(Ambras) 감옥에 수감되었다. 얼마후 멜히오르는 티롤의 폼프(Vomp)에 있는 성게오르겐베르크-휘히트(St Georgenberg-Fiecht)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멜히오르는 개신교를 반대하면서 그와 동시에 로마 교황청에 대하여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다. 이 점이 로마 교황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멜히오르는 로마로 불려가 얼마 동안을 감금상태로 지내다가 페르디난트 황제의 특별 요청으로 석방되었다.

 

티롤 지방의 성 게오르겐베르크-휘히트 수도원 

 

1628년 비엔나로 돌아온 멜키오르는 다시 주교의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조용히 교구에서만 생활했으며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멜키오르는 다시한번 로마 가톨릭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 지나치게 형식적인 의식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예를 들면 12월 8일의 성모수태 축일을 보통 주일이나 다른 성일과 다르지 않게 지키도록 했다. 또한 비엔나 주재 교황청 대사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성금요일(Good Friday)에 성만찬을 베푸는 일도 계속 추진하였다. 성금요일에 성만찬을 베푸는 것은 비엔나의 독특한 관습이었다. 멜키오르는 1630년 비너 노이 슈타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심장은 비너 노이슈타트 대성당의 중앙제단 앞에 안치되어 있고 그의 유해는 비엔나의 성슈테판 대성당에 모셔있다.

 

마이들링의 알트만스도르프 성

 

비엔나 사람들은 멜히오르를 기념하여 12구 마이들링(Meidling)의 알트만스도르프(Altmannsdorf)에 클레슬플라츠(Khleslplatz: 클레슬 광장)을 조성하였다. 멜히오르가 비너 노이슈타트에서 비엔나를 방문할 때에는 언제나 이 광장의 12번지에서 묵었다. 1978년부터 16세기에 지은 이 건물은 오스트리아 사민당(SDP)의 정치 아카데미인 ‘렌너 연구소’(Renner Institut)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의 옆에 있는 4번지는 비엔나 동물보호연맹(Tierschutzverein)사무실이다. 집 잃은 애완동물들을 보호하는 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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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의 역사를 소개하자면 책 한권으로도 모자란다. 그래서 대충 넘어가기로 한다. 다만, 터키의 공격(정확히는 비엔나 공성)은 중대한 사실이므로 핵심만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몇가지 궁금증이 있을 것이다. 터키인들은 바쁠텐데도 왜 멀리 비엔나까지 와서 비엔나를 점령코자 했나? 터키와의 전투로 어떤 결론이 났는가? 등이다. 그나저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차르트, 베토벤등 훌륭하신 작곡가들이 '터키 행진곡'을 작곡하셨는데 왜 하필이면 터키였을까 라고 궁금해 할수있는데 그건 비엔나와 터키가  여러 모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깊은 관련은 두번에 걸친 터키의 비엔나 공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