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바벤버그-3공화국

오토만 터키의 비엔나 공성

정준극 2008. 4. 7. 15:53

[오토만 터키의 비엔나 공성]

 

오토만제국의 시파히스(Sipahis) 병사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홀리 리그 병사들

 

터키의 비엔나 공성은 두번있었다. 1529년이 첫번째였다. 이를 제1차 오토만 터키의 공성이라고 부른다. 공성은 실패로 끝났다. 비엔나는 중세의 성벽으로 둘러쌓이긴 했지만 별로 쓸모가 없었다. 오토만 터키군이 마음만 먹었다면 순식간에 비엔나를 점령했을지도 모른다. 오토만 터키군이 느닷없이 비엔나 공성을 풀고 일단 귀가한 이유는 비엔나의 전시민이 합심하여 공성을 막아냈기 때문이 아니라 마침 느닷없이 역병이 돌고 더구나 추운 겨울이 닥쳐왔기 때문에 들판에서 지내기가 어려워 일단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비엔나는 새로운 성벽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시내를 둘러싸는 해자(Moat)가 조성되었고 성벽을 보강하여 방어거점으로서 십여군데에 망루요새가 만들어졌다. 성벽 밖에 있던 건물들은 거의 모두 허물었다. 성안에서 대포를 쏘거나 소총을 쏠 때에 앞을 가로막으면 안된다는 훌륭한 생각에서였다. 이 같은 방어막은 1683년 터키가 다시 공성해 왔을 때 유효적절하게 사용되었다. 비엔나는 두달동안 버틸수 있었다. 비엔나가 풍전등화의 신세로 있을 때에 폴란드의 얀 조비에스키(Jan Sobieski)왕이 구원군을 이끌도 달려와 밖으로부터 터키군을 치는 바람에 터키군은 물러나고 말았다. 두번에 걸친 비엔나 공성에서 실패한후 오토만 터키는 몰락을 거듭하였다.

 

1683년의 비엔나 전투

 

왜 비엔나 공격에 사활을 걸었는가? 크게 두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경제적 이유였다. 흑해로부터 서유럽과 남유럽으로 통하는 무역의 거점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비엔나는 동과 서를 잇는 요충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역을 독점해야겠고 비엔나는 그 핵심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종교 때문이었다. 종교개혁에 동조한 헝가리등 일부 지역이 가톨릭의 박해를 받자 도와주겠다는 명목을 내걸었던 것이다. 비엔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다. 예전에 십자군 전쟁으로 오토만 터키의 형제들이 고전했던 것을 생각하면 신성로마제국은 원수였다.

 

폴란드 왕 얀 조비에스키

 

1863년의 제2차 터키측 공성은 홀리 리그(Holy League)측의 완전한 승리로 막을 내렸다. 터키진영은 마치 혼비백산한듯 물러났다. 그건 그렇고 이제 합스부르크진영과 오토만 터키진영의 구성을 살펴보자. 홀리 리그라고 칭하는 합스부르크측의 사령관은 폴란드의 얀 조비에스키 왕과 비엔나 성안에 있던 오스트리아 대공 로레린의 카를5세였다. 홀리 리그측의 전력은 토탈 7만명이었고 반면 오토만 터키측은 13만 8천명의 대군이었다. 홀리 리그측의 군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 오스트리아군, 작소니-바바리아군(독일 남부), 프랑코니아군(독일중부), 슈봐비아군(스위스)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터키군은 오토만제국군, 크리미아군, 트란실바니아군, 발라키아(Wallachia)군, 몰다이브군으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 타타르 병사들이 가세하였다. 터키군의 사령관은 카라 무스타마 파샤(Kara Mustafa Pasha)였다. 이틀간에 걸친 대전투로 합스부르크진영은 4천명이 전사했으나 오토만 터키진영은 1만5천명이 전사했다.

 

칼렌버그 전투에서의 폴란드 왕 얀 조비에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