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바벤버그-3공화국

제3제국과 돌푸쓰 수상

정준극 2008. 4. 7. 16:05

[제3제국과 돌푸쓰 수상]

 

1차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12일, 라트하우스 옆에 있는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수천명의 비엔나 시민들의 지켜보는 가운데 독일-오스트리아(Deutsch-Österreich)공화국 선포식이 열렸다.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같은 배를 탄 나라라는 의미였다. 이로부터 비엔나, 나아가 오스트리아의 정치상황은 걷잡을수 없는 혼미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좌우익의 대립은 첨예하였다. 대표적인 좌익단체는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공화국수호연맹(Republikanische Schutzbund)이었고 우익단체는 방위군과 민병대를 중심으로한 조국수호(Heimwehr)단체였다. 1920년대는 이들 좌우익의 대결로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던 시기였다.

 

돌푸쓰 수상의 피살을 애도하는 당시 신문의 보도 

                          

그러다가 1927년 대법원(Justizpalast) 앞에서 법원의 판결에 불복종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시위가 벌어졌고 이를 제지하려다가 발포하자 군중들은 삽시간에 폭도로 변하였다. 더구나 오스트리아 최대 은행이 파산했기 때문에 국민들의 불안은 가중되었다. 국회는 해산되었다. 급기야 1934년 2월에는 저 유명한 내란이 일어났다. 마치 해방후 우리나라에서도 좌우익이 갈라져 죽어라고 싸우던 때와 흡사했다. 이 와중에 나선 인물이 엥겔베르트 돌푸쓰(Engelbert Dolfuss)수상 겸 외무부 장관이었다. 돌푸쓰 수상에 대하여는 발하우스플라츠(Ballhausplatz)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아무튼 돌푸쓰 수상은 나치당, 공산당, 좌익의 공화국수호연맹의 활동을 금지하고 이어 1934년에는 사회민주당의 활동까지도 금지하였다. 경제난 타개를 위해 돌푸쓰 수상은 대규모 도로건설 사업을 펼쳐 실업자들을 구제코자 했다. 그린칭을 지나서 있는 오버시버링(Obersievering)으로부터 시작하여 산꼭대기의 칼렌버그를 넘어 레오폴드버그(Leopoldberg)까지 이어지는 회엔슈트라쎄(Höhenstrasse)도로공사, 그로쓰글로크너-호흐알펜슈트라쎄(Grossglockner-Hochalpenstrasse)도로공사등은 돌푸쓰 수상 재임시에 진행된 대규모 사업이었다. 그러나 돌푸쓰 수상은 나치 친위대에 의해 자기 집무실에서 비참하게 피살되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합병(안슐르쓰)을 위해 헬덴플라츠에 모습을 나타낸 히틀러

                           

악착같고 교활하며 무자비한 나치는 ‘우리는 같은 민족! 반갑습네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1938년 5월, 안슐루쓰(Anschluss)라는 미명아래 독일 제3제국과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히틀러의 반유태인 정책은 그러지 않아도 비엔나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반유태 무드에 불길을 지폈다. 1938년 8월, 나치는 비엔나에 KZ Oberlanzendorf Wien(유태인이민중앙사무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유태인 사냥에 나섰다. 책임자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었다. 겉으로는 유태인들을 제3국으로 이민토록 주선해 주겠다고 하여 이런저런 이유로 재산만 받아 먹고 승락을 해주지 않다가 나중에는 유태인들을 기차에 태워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것이 아이히만의 비엔나 임무였다. 그 이후에 유태인과 유태인 사회가 겪은 고초는 재론할 여지가 없다. 전쟁후의 비엔나 상황에 대하여는 별로 흥미를 살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생략.

 

유덴플라츠의 쇼와 기념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