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바벤버그-3공화국

나폴레옹과 메테르니히

정준극 2008. 4. 7. 16:03

[나폴레옹과 메테르니히]

 

이제 비엔나의 발자취 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나폴레옹에 대하여 아주 조금만 더 설명코자 한다. 비엔나는 나폴레옹의 군화에 두번이나 짓밟힌 일이 있다. 1805년과 1809년이다. 첫번째 점령은 아무런 전투도 없이 이루어졌다.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군 장군 3명이 당시 도나우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로서 오스트리아군이 철통같이 방어하고 있는 타보르브뤼케(Taborbrücke)를 유유하게 건너와 오스트리아군 사령관을 만나 ‘여보게, 전쟁은 이미 다 끝났네! 그러니 알아서 하게!’라고 말하는 바람에 싸움 한번 하지 않고 프랑스군을 영접하고 말았다. 신통하게도 비엔나 시민들은 무혈입성한 프랑스군을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이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나폴레옹은 관용을 베풀어 1만명의 오스트리아 국방군이 무장해제를 하지 않고 그대로 직무에 충실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나폴레옹은 비엔나를 떠날 때 무기고에 있는 모든 무기와 탄약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고스란히 남긴채 신사답게 떠났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그러나 두번째 방문은 얘기가 달랐다. 1809년에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가는 길에 내쳐서 다시 비엔나를 점령했을 때에는 상당히 치열한 전투를 겪어야 했다. 얼마후 나폴레옹 군대는 비엔나 근교의 아스페른(Aspern)과 에슬링(Essling)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대패하여 혼줄나게 후퇴해야 했다. 유럽의 전선에서 나폴레옹이 최후의 패배를 기록한 이후, 비엔나에서는 열강들이 모여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지도를 연필로 다시 그리게 되었다. 메테르니히(Klemens Metternich)가 주관한 열강들의 비엔나회의는 1814년 9월 18일부터 이듬해 6월 9일까지 장장 9개월에 걸친 것이었다. 열국의 왕들과 군주들이 대거 참석한 비엔나회의는 거의 매일 화려한 파티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리뉴공자(Prince de Ligne)인 샤를르 조셉(Charles Joseph)은 Le congres danse beaucoup, mais il ne marche pas(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클레멘스 메테르니히 수상

 

오랜 기간에 걸친 파티 등으로 오스트리아의 재정은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되었다. 사람들은 화려한 무도회와 파티에 젖어 있는 열국의 대표들을 다음과 같은 말로서 핀잔을 주었다.

 

-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모두를 위해 사랑한다 (Loves for all)

-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윌리엄: 모두를 위해 생각한다 (Thinks for all)

-         덴마크의 프레데릭: 모두를 위해 말한다 (Speaks for all)

-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 모두를 위해 마신다 (Drinks for all)

-         뷔르템베르크의 프레데릭: 모두를 위해 먹는다 (Eats for all)

-         오스트리아의 프란시스 황제: 모두를 위해 돈 낸다 (Pays for all)

  

비엔나회의 이후의 유럽의 판도, 영국에서의 산업혁명의 여파, 프랑스 혁명, 비엔나 링슈트라쎄의 재건 등에 대하여는 골치 아프므로 생략코자 한다. 다만, 1830년에 있었던 비엔나 대홍수에 대하여만 한마디 추가코자한다. 1830년에 다뉴브강이 범람하여 비엔나에 대홍수가 밀어 닥치자 당국은 ‘이 문제를 어찌하노?’라면서 매일 머리를 싸매고 협의를 계속했다.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공들여서 아름답고 위용있게 조성해 놓은 비엔나 시내의 링슈트라쎄가 난처하게 될것이라는데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나 방법에 대하여는 의견이 구구했다. 그러면서 30년을 보냈다. 다행히 30년동안 대홍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1860년, 합스부르크는 다뉴브강의 여러 지류를 통합하고 시내를 거치지 않는 새로운 직선 물길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시내에 연결되어 있던 다뉴브강의 지류들은 좁게 만들어 물길을 다른 곳으로 유도했다.  따라서 다뉴브강의 지류를 좁힌 것일 뿐이며 새로운 운하를 건설한 것이 아닌데 어쩐 일인지 명칭은 도나우카날(Donaukanal: 도나우 운하)로 불리게 되었다.

 

도나우 카날(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