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궁전/슈타트팔레

팔레 아우어슈페르크 (Palais Auersperg)

정준극 2008. 4. 21. 10:13
팔레 아우어스페르크 (Palais Auersperg)

 

팔레 아우어슈페르크의 아름다운 모습

 

박물관 구역 뒤편 길에 팔레 아우어슈페르크(Palais Auersperg)가 있다.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팔레(시내궁전)로서 비엔나의 명물이다. 8구 요제프슈타트의 아우어슈페르크슈트라쎄(Auerspergstrasse) 1번지이다. 비엔나에서 가장 오랜 연혁을 지니고 있는 팔레 중의 하나이다. 팔레 아우어슈페르크가 건축된 것은 1706-1710년이다. 우리나에서는 장희빈이 날뛰던 숙종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로텐호프(Rottenhof)라는 이름의 저택이었다. 그러다가 히에로니무스 카페체 데 로프라노(Hieronymus Capece de Rofrano)백작이 이 저택을 매입하여 당대의 두 거장 건축가인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얼라흐(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 1656-1723)와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Johann Lucas von Hildebrandt: 1668-1745)에게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팔레로 개축토록하였다. 그래서 팔레 아우어슈페르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전에는 로프라노 백작의 저택이기 때문에 팔레 로프라노(Palais Rofrano)라고 불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하여 1911년에 드레스덴에서 초연된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의 주인공인 옥타비안 데 로프라노(Octavian de Rofrano)는 바로 히에로니무스 카페체 데 로프라노 백작 가문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오페라 '장미의 기사'의 대본가인 휴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fmannsthal)은 그의 대본에서 로프라노 백작 가문에 속한 옥타비안을 모델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팔레 로프라노는 당시 비엔나 상류층의 관례와 관련하여 '장미의 기사궁'(Palais Rosenkavalier)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게 되었다.

 

팔레 아우어슈페르크의 화려한 계단

 

팔레 아우어슈페르크라는 명칭은 요한 아담 아우어슈페르크 공자(Prinz Johann Adam Auersperg)가 1777년 6월에 이 저택을 매입하고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요한 아담 아우어슈페르크 공자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스테픈 프란시스 1세, 그리고 그의 부인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와 대단히 친분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로프라노 백작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작세 힐드부르크하우젠(Saxe-Hildburghausen)의 요제프 공자라는 사람이 1749년에 이 집을 겨울저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페라 작곡가로 유명한 주세페 보노(Giuseppe Bonno: 1711-1788)를 팔레 로프라노의 지휘자로 고용하여 1754년부터 1761년까지 겨울철에 매주 음악회를 열었다. 그러다가 1759년부터는 팔레 로프라노를 다른 사람에게 임대하였지만 주간 음악회는 계속 주관하였다. 이때에는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을 지휘자로 고용하였다.

 

1790년대의 팔레 아우어슈페르크

                             

그후 1777년에 비로소 요한 아담 아우어슈페르트 공자가 이 저택을 매입하였다. 그 후에도 이 저택은 팔레 로프라노라고 불렀으나 1786년부터는 집주인의 이름을 따서 팔레 아우어슈페르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팔레 아우어슈페르크는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이벤트들이 열린 곳이었다. 예를 들면 1786년에는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Idomeneo)가 비엔나에서는 처음으로 콘서트 형식으로 공연되었다. 모차르트는 이를 위해 오페라의 몇 부분을 삭제하기도 했고 새로 바이올린 곡을 만들어 넣기도 했다. 하이든의 '십자가상의 칠언'(Sieben letzte Worte unseres Erlösers am Kreuze)도 1787년에 이곳에서 공연되었다. 요한 아담 아우어슈페르크는 두번 결혼했다. 그런데 첫번째 결혼에서 자녀들을 두었으나 모두 세상을 떠났으며 두번째 결혼에서는 자녀를 두지 못했다. 그는 조카인 칼 아우어슈페르크(Carl Auersperg: 1750-1822)를 상속인으로 삼았다. 그런데 칼 아우어슈페르크도 부인과의 사이에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1817년에 빈첸스 아우어슈페르크(Vinzens Auersperg) 공자를 상속인으로 삼았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팔레 아우어슈페르크에는 여러 귀빈들이 손님으로 묵었는데 예를 들면 1827년부터 1837년까지 10년 동안 스웨덴 바사 왕조의 구스타브 아돌프 왕자와 가족들이 묵은 것이다. 당시 구스타브 왕자는 왕위계승문제 때문에 잠시 외국으로 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10년이나 걸렸던 것이다. 나중에 구스타브 왕자는 이곳에서 지내던 것을 기념하여 그의 손녀가 작소니의 알베르트 왕과 결혼할 때에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도록 했다. 1856년 10월에는 당시 26세의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 왕비(씨씨)가 팔레 아우어슈페르크에서 열린 무도회에 참석하였다. 두 사람은 1854년에 결혼했다.

 

팔레 아우어슈페르크의 비엔나 클래시컬 콘서트 연주자들

 

빈첸스 아우어슈페르크는 1864년에 팔레 아우어슈페르크에 연결된 레르헨펠더슈트라쎄에 무도회를 개최할수 있는 건물을 짓도록 했다. 1872년에 빈첸스 아우어슈페르크가 세상을 떠나자 미망인인 빌헬미네가 무도회장을 개축하여 기하학연구소(Geometric Institute)에게 임대하였다. 그러다가 1878년에는 빌헬미네의 아들인 프란츠 요셉 에마누엘과 그의 부인인 빌헬미네 킨스키가 팔레 아우어슈페르크를 소유하게 되었다. 빌헬미네 킨스키는 이곳에서 여러 자선모임을 개최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Vereinigung zur Errettung verwahrloster Kinder 라는 기관을 위한 자선활동이었다. 그후 팔레 아우어슈페르크는 프란츠 요제프 아우어슈페르크 공자가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제국의 수상으로서 8년이나 지낸 사람이었다. 팔레 아우어슈페르크에서 음악회가 개최되는 홀을 '장미의 기사홀'(Roosenkavaliersaal)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개최되는 음악회에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비엔나의 귀족들도 간혹 참가하였다. 특히 루돌프 황태자도 그가 비극적인 삶을 마치기 4년 전에 '장미의 기사홀'의 음악회에 출연한 일이 있다. 팔레 아우어슈페르크는 비엔나 음악계와 사교계에서 가장 격조가 높고 화려한 장소였다. 그래서 작곡가인 로베르트 슈톨츠(Robert Stolz)는 이곳을 '비엔나라고 하는 교향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음'이라고 표현한 일이 있다. 팔레 아우어슈페르크는 1923-35년 기간중에 연방기념물관리청(Bundesdenkmalamt)이 임시청사로 사용하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의 한 장면. 옥타비안과 조피.

            

나치 기간 중인 1940년에는 페르디난트 아우어슈페르크(1887-1942)가 상속을 받았으며 1942년부터는 그의 여동생인 크리스티아네 크로이가 상속을 받아 관리했다. 크리스티아네는 2차 대전 중에 가족과 함께 팔레 아우어슈페르크의 2층에 살았다. 크리스티아네는 2차 대전 중에 팔레에 오스트리아 레지스탕스 요원들을 숨겨준 것으로 유명하다. 1944년에는 팔레 아우어슈페르크에서 05로 더 잘 알려진 오스트리아임시국가위원회(Provisorische österreichsche Nationalkomitee)가 결성되었다. 이 위원회에는 나중에 연방수상이 된 레오폴드 휘글(Leopold Figl), 훗날 연방대통령이 된 테오도르 쾨르너(Theodor Körner) 등이 멤버로서 참여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이곳은 연합군사령부(Allierte Kommandantur)가 장악하였고 한때는 연합군조정위원회(Allied Control Council)의 경찰본부로서 사용되었다. 한편, 팔레 아우어슈페르크는 전쟁의 막바지에 폭격을 맞아 상당히 파괴되었다.

 

팔레 아우어슈페르크 현관 상단의 아름다운 조각장식

                        

아라비아 카페의 창설자인 알프레드 봐이스(Alfred Weiss)가 1953년이 팔레 아우어슈페르크를 매입했다. 이어 1953-54년에 건축가 오스발트 해르틀(Oswald Haerdtl)이 건물을 증축하여 식물권, 겨울 정원, 기타 회의실 등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6백명 수용 규모의 대형 카페가 마련되었다. 알프레드 봐이스가 세상을 떠나자 자손들이 팔레 아우어슈페르크를 General Partners A.G.라는 회사에 매각했다. 그러다가 2006년에 팔레 아우어슈페르크는 다시 어떤 유럽의 명문 가문에 매각되었다. 현재 팔레 아우어슈페르크의 귀빈실은 음악회 용도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 1층(우리 식으로는 2층)은 대부분 사무실로 임대하고 있다. 최근에는 간단한 기념관을 설치하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팔레 아우어슈페르크에서 개최된 로크볼 포스터. 2012년도. 별별 괴상망칙한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나름대로의 무도회를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