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궁전/슈타트팔레

팔레 아른슈타인 (Palais Arnstein)

정준극 2008. 4. 21. 10:13

팔레 아른슈타인 (Palais Arnstein)

 

1939년의 팔레 아른슈타인. 1945년 폭격으로 파손되기 전의 모습

 

팔레 아른슈타인은 한때 비엔나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일명 ‘홰니’(Fanny)라고 알려진 프란치스카(Franziska) 남작부인의 저택으로 이름 높았던 곳이다. 팔레 아른슈타인은 1794년 프란츠 나토르프(Franz Natorp)라는 상인이 건설한 저택으로 그후 유태인 귀족인 나탄 아담 폰 아른슈타인(Nathan Adam von Arnstein)이 살았기 때문에 팔레 아른슈타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유태인 은행가인 나탄과 결혼한 홰니는 베를린의 유명한 이치히(Itzig)가문에서 태어났다. 홰니의 아버지 역시 이름난 은행가인 다니엘 이치히였다. 나탄과 결혼하여 비엔나에 살게된 홰니(프란치스카)는 아른슈타인 저택을 살롱으로 만들었다. 얼마후 홰니의 살롱은 비엔나 지식층과 예술가들의 중심장소가 되었다. 홰니의 살롱은 귀족들과 일반 시민들, 특히 유태인들간의 담장을 허무는 역할을 했다. 홰니의 살롱에서는 무도회, 시낭송회, 콘서트가 자주 열렸다. 홰니의 명성은 점차 높아갔다. 요셉2세 황제도 홰니의 살롱을 방문하여 홰니의 명성을 더하게 해주었다. 메테르니히 수상에 의한 유명한 ‘비엔나 회의’(Vienna Congress) 기간중에는 각국 외교사절들의 비공식 모임 장소로도 인기가 높았다. 메테르니히 수상이 주최하는 공식 연회도 팔레 아른슈타인에서 열릴 정도였다. 음악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홰니는 비엔나 ‘음악가연맹’(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의 창립 멤버중 한 사람이었다. 

 

홰니 남작부인 초상화


홰니가 세상을 떠난후 그의 딸 헨리에트 폰 페레이라-아른슈타인(Henriette von Fereira-Arnstain)이 어머니의 전통을 이어 받아 살롱을 계속하였다. 헨리에트는 뛰어난 음악가였다. 홰니와 헨리에트의 사촌인 레아 살로몬(Lea Salomon)은 펠릭스 멘델스존과 홰니 멘델스존의 어머니이다. 헨리에트는 어린 멘델스존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많은 후원을 하였다.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이인 홰니 멘델스존의 이름은 홰니 폰 아른슈타인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팔레 아른슈타인은 2차대전중 심한 폭격으로 상당히 손상되었으나 건물 자체는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팔레 아른슈타인을 복구할 계획했었지만 도시계획에 따라 1952년 완전히 허물고 그 자리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므로 지금은 팔레 아른슈타인의 영광을 되새겨 보기가 어렵다. 홰니 폰 아른슈타인은 1814년 비엔나에 크리스마스를 처음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주소는 1구 호에마르크트(Hohe Markt) 1번지이다.

 

현재의 호에마르크트 1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