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악성 베토벤

비엔나와의 인연의 시작

정준극 2008. 4. 29. 16:49

비엔나와의 인연의 시작

 

베토벤은 독일의 본(Bonn)에서 1770년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날은 확실치 않다. 다만, 1770년 12월 17일에 본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베토벤이 세례받기 하루 전인 12월 16일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아서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례를 받지 않고 숨을 거두면 하늘나라에서 영접을 받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했었다. 베토벤은 독일의 작곡가라고 분류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쾰른 선제후령에서 태어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시에 본은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쾰른 선제후령의 수도였다. 참고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할수 있는 선제후들은 7명이었다. 3명은 교회를 대표하는 선제후로서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쾰른 대주교이며 4명은 세속 선제후로서 보헤미아 왕, 라인분봉백작, 작소니 공작, 브란덴부르크 후작(Margrave)였다.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는 비엔나였다.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래서 베토벤은 생애의 상당기간을 오스트리아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서 지냈던 것이다. 베토벤은 독일 사람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의 선조는 벨기에 사람이었다. 할아버지가 벨기에의 브라반트에서 살다가 독일의 본으로 이사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베토벤은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요한이 어린 루드비히에게 음악을 가르쳤지만 아무래도 뛰어난 재능의 베토벤을 가르치는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베토벤은 일곱살이던 1778년에 인근 쾰른에서 첫 대중 피아노 연주회를 가졌다. 아버지인 요한은 어린 루드비히가 더 어리게 보여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도록 하기 위해 베토벤을 6세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베토벤 자신도 항상 기록상의 나이보다 한살이 어린 줄 알고 지냈다. 베토벤은 12세 때에 첫 작품을 내놓아 출판까지 되었다. 에른스트 크리스토프 드레쓸러(Ernst Christoph Dressler)의 행진곡을 주제로 한 9개의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이었다. 베토벤이 본에서 자란 집은 라인가쎄(Rheingasse) 934번지였다. 2차 대전 중에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새로 집이 들어섰다. 그러므로 현재 본의 베토벤하우스는 베토벤이 어린 시절에 살았던 바로 그 집은 아니다.

 

본의 베토벤 원래 생가. 그림

독일 본에 있는 베토벤 생가

 

베토벤은 쾰른에서 고트로브 니페(Gottlob Neefe)라는 사람으로부터 오르간을 비롯한 정식 레슨을 받았다. 스승인 니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베토벤이란 소년이 이대로 작곡을 계속한다면 제2의 모차르트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찬사를 보냈다. 당시에 모차르트는 신동으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베토벤보다 14세나 위이다. 베토벤은 14세 때에 쾰른 선제후인 막시밀리안 프란츠 공자 궁정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었다.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 아들로서 나중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이 된 요셉 황제와 레오폴드 황제의 동생이며 마리 앙뚜아네트의 오빠였다. 막시밀리안 프란츠 선제후는 베토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베토벤을 위해 여러 도움을 주었다. 1787년, 베토벤이 17세의 청년일 때에 막시밀리안 프란츠 공자는 베토벤을 비엔나로 보냈다. 모차르트를 만나 공부를 계속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비엔나에 온 베토벤은 가까스로 모차르트를 만날수 있었다. 두 사람이 짧은 만남에서 어떤 얘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모차르트가 사람들에게 '이 청년의 이름을 잊지 마시오. 이 청년의 이름을 자주 듣게 될 것이요'(Don't forget his name - you will hear it spoken often)라고 말했다고 한다.

 

본의 라인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베토벤 기념상

 

그러나 베토벤은 비엔나에 온지 두어달 후에 본에 있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본으로 급히 다시 돌아가야 했다. 어머니는 폐렴으로 고생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베토벤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룬후 동생들을 돌보느라고 5년동안 본을 중심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며 지내다가 마침내 1792년 평소의 생각대로 비엔나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 였다. 그러므로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더 이상 만날수 없게 된 것을 크게 섭섭하게 생각하였다. 베토벤의 친구인 봘트슈타인(Waldstein)은 베토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이든으로부터 모차르트의 정신을 받게 될 것이니 너무 섭섭히 생각치 말라'고 까지 말하였다. 비엔나에 온 베토벤은 하이든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어 알브레헤츠버거와 살리에리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베토벤이 비엔나에서 공식적으로 첫 작품을 발표한 것은 1794년이었다. 베토벤의 Op 1번으로 피아노를 위한 세편의 트리오 C 단조였다. 베토벤은 얼마동안 비엔나에 완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피아니스트로서 순회연주회 때문에 프라하, 라이프치히, 베를린(1795), 프레쓰부르크, 부다페스트(1800) 등 여러 곳을 여행하며 다녔다. 베토벤은 테플릿츠(Teplitz)와 칼스바드 등 온천휴양지에도 잠시 머물렀지만 결국은 비엔나를 떠나지 못하고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비엔나에 와서 지낸 후에 다시는 고향인 본을 방문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35년동안 비엔나에 있으면서 60곳 이상이나 거처를 옮겨 다녔다고 한다 (어떤 주장에는 80곳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비엔나 시내에만 27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비엔나 시내(인네레 슈타트)의 거처 중에서 기록으로 확실히 남아 있는 곳은 16개 뿐이다.

 

비엔나의 교외인 하일리겐슈타트의 공원에 있는 베토벤 기념상

 

베토벤이 살았던 건물중 몇 개는 베토벤 기념관(Gedenkräume)로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예를 들면 비엔나 묄커바스타이(Molkerbastei) 8번지, 바덴의 라트하우스가쎄(Rathausgasse) 10번지, 하일리겐슈타트의 프로부스가쎄(Probusgasse) 6번지 등이다. 다른 건물들에는 아직도 개인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기념관으로 만들지 못하고 다만 그러한 집에는 오스트리아 국기와 안내 명판을 붙여 베토벤이 그 집에서 살았었다는 것을 기억토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베아트릭스가쎄(Beatrixgasse)-운가르가쎄(Ungargasse) 5번지이다. 베토벤은 운가른가쎄 5번지에서 1819년 장엄미사곡을 작곡했으며 1824년에는 저 유명한 교향곡 제9번 ‘환희의 송가’(An dir Freude)를 완성했다. 다른 집들은 상점이거나 사무실, 또는 개인집이어서 과거에 위대한 베토벤이 살았었다는 아무런 표지도 남아 있지 않다. 물론 베토벤은 하루가 멀다하고 이사를 다녔기 때문에 꼭 집어서 이 집에서 무슨 작품을 완성했다고 말할수는 없다. 그래서 이러이러한 집에 살 때에 이러이러한 작품을 준비했다고는 말할수 있다.

 

1구 운가른가쎄 5번지의 기념명판. 1823-24년에 교향곡 제9번을 작곡한 집이라는 설명이다.

 

비엔나에서 베토벤이 살았던 집들중 많은 건물들이 이른바 도시계획으로 헐려 흔적을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예를 들어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집은 1904년에 도시계획으로 헐렸고 베토벤이 비엔나 초기에 살았던 티퍼그라벤(Tiefergraben) 241번지의 집도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아직 남아 있는 건물이라고 해도 베토벤이 그 집에서 살았었다는 것이 확실치 않아 기념 명판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을 존경하는 사람들은 혹시라도 베토벤의 흔적을 찾아 볼수 없을까하여 오늘도 비엔나와 바덴의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묄커바슈타이의 파스크발라티 하우스에 있는 전시실

 

아래에 열거하는 주소는 비엔나와 비엔나 인근에서 베토벤이 살았던 장소들이다. 그중에서 굵은 글씨는 베토벤기념관이 되어 있는 곳들이다. 베토벤기념관은 비엔나에 5 개소가 있고 바덴에 1개소가 있다. 비엔나에는 고전시대와 낭만시대를 풍미하였던 브람스, 하이든, 모차르트, 요한 슈트라우스의 기념관이 각각 1곳씩 있으며 슈베르트 기념관은 2곳이 있다. 슈베르트 기념관은 그가 태어난 집과 세상을 떠난 집이다. 하지만 베토벤 기념관은 5개나 된다. 베토벤 기념관은 그가 태어난 독일의 본(Bonn)에도 있다. 함부르크에 있는 브람스 생가가 2차 대전중 폭격으로 파손된 것과 마찬가지로 본의 베토벤 생가도 2차 대전 중에 폭격으로 크게 파손되었다. 사실상 베토벤은 전 생애중에서 본에 고작 어린 시절 4년 동안만 살았었고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5년 정도만 살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의 베토벤 기념관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훌륭하다.

 

3구 운가르가쎄 5번지. 베토벤이 교향곡 제9번을 완성한 집이다.

 

[비엔나]

- 아우어슈페르그슈트라쎄(Auerspergst.) 3 번지 / 트라우촌가쎄(Trautsohngasse) 2 번지 (모퉁이 집)

- 되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쎄(Doeblinger Hauptst.) 92 번지 (에로이카 하우스)

- 예네봐인가쎄(Jeneweingasse) 17 번지

- 라임그루벤가쎄(Laimgrubengasse) 22 번지

- 묄커바슈타이(Moelkerbastei) 8 번지 (파스크발라티 하우스)

- 슈봐르츠슈파니어슈트라쎄(Schwarzspanierstrasse) 15 번지 - 폭격으로 파손. 새로 지음.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집.

- 운가르가쎄(Ungargasse) 5 번지 / 베아트릭스가쎄(Beatrixgasse). 교향곡 제9번을 완성했다.

- 티퍼 그라벤(Tiefergraben) 241 번지 - 폭격으로 파손. 신축건물이 들어섬.

 

비엔나의 베토벤이 서거한 집. 슈봐르츠슈파니에슈트라쎄 15번지였다. 슈봐르츠슈파니에는 검은 스파니어 개를 말한다. 몽세라 베네딕트 수도승들이 검은 옷을 입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붙었다. 이 아파트는 전쟁 중에 파손되었고 현대 복구되어 있다.

비엔나의 베토벤 기념상(베토벤플라츠)



[하일리겐슈타트]

- 그린칭거슈트라쎄(Grinzingerstrasse) 64 번지

- 칼렌버거슈트라쎄(Kahlenbergerstrasse) 26 번지

- 화르플라츠(Pfarrplatz) 2 번지

- 프로부스가쎄(Probusgasse) 6 번지 (하일리겐슈타트 테스타멘트 하우스)


프로부스가쎄의 베토벤하우스

모차르트를 만난 베토벤. 어느 장소인지는 모르겠지만 베토벤이 처음 비엔나에 와서 모차르트에게 레슨을 받으려고 찾아가서 피아노를 시연하는 장면이다. 벽에는 모차르트의 어머니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시기는 1787년으로 보고 있다. 모차르트가 31세였고 베토벤은 17세였다.

 

[뫼들링]

- 아셰나우가쎄(Aschenaugasse) 6 번지

- 하우프트슈트라쎄(Hauptstrasse) 79 번지 (하프너 하우스)



뫼들링의 하프너하우스

 

[바덴]

- 안톤가쎄(Antongasse) 4 번지

- 브라이트너슈트라쎄(Breitnerstrasse) 26 번지

- 프라우엔가쎄(Frauengasse) 10 번지

- 요한네스바드가쎄(Johannesbadgasse) 12 번지

- 카이저 프란츠 링(Kaiser Franz Ring) 9 번지

- 라트하우스가쎄(Rathausgasse) 10 번지

- 봐이부르크슈트라쎄(Weiburgstrasse) 13 번지

 

바덴 바이 빈의 라트하우스가쎄 10번지에 있는 베토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