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터키/터키의 비엔나 공성

술탄 술라이만의 서정(西征)

정준극 2008. 6. 8. 07:03
 

술탄 술라이만의 서정(西征)


1529년 봄, 오토만 터키의 술탄 술라이만은 헝가리 전국을 평정하기 위해, 그리고 나아가 비엔나를 함락하기 위해 오토만 제국의 영토인 불가리아에서 대규모 군대를 소집하였다. 술라이만의 군대는 최소 12만명, 최대 30만 명 이상 이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오토만 제국의 정규군 경기병부대인 시파히(Sipahi: 페르시아어로 군대라는 뜻)와 야니싸리(Janissary)라고 불리는 용맹스런 술탄 술라이만의 근위군단도 원정군에 편입하였다. 야니싸리는 새로운 군대라는 뜻으로 술탄이 용병과 포로 또는 노예들로 구성한 일종의 사병이지만 술탄에 대한 충성심만은 대단하였다. 한편 술탄 술라이만은 헝가리의 개신교 영주들과 귀족들이 이끄는 병사들을 오토만 제국의 예비군으로 편성하였다. 헝가리의 개신교도들은 오스트리아의 가톨릭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술라이만은 이 모든 군대의 총사령관이었다. 술라이만은 이어 그리스 노예 출신인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를 제국의 총리대신 겸 국방장관으로 임명하여 술탄의 특명으로 전군을 지휘하게 했다.

 

  

 터키군 정예병인 야니싸리                   터키군 경기병인 시파히


술라이만의 대군은 1529년 5월 10일 불가리아와 헝가리를 떠나 비엔나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진군 초기부터 뜻하지 아니한 어려움에 부딪혔다. 가장 힘든 난관은 폭우였다. 동남부 유럽에서는 매년 봄에 우기가 되어 비가 내리지만 1529년의 봄에는 예상외로 많은 폭우가 쏟아졌다. 때문에 홍수의 피해를 본 불가리아와 남부 헝가리에서 대군을 진격시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행군 진로를 수시로 바꿔야 했으며 더구나 대포들은 진흙탕 속에 묻혀 뒤에 남겨두고 진군해야 했다. 수많은 낙타들이 죽어간 것도 폭우 때문이었다. 주로 사막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가져온 낙타들은 폭우와 홍수로 꼼짝없이 피해를 보았다. 운반수단인 귀중한 낙타들이 떼로 죽어나가자 터키 군대의 진군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헝가리의 야노스 자폴리아


술레이만의 대군은 8월 6일 오시제크(Osijek: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도시: 헝가리어로는 Eszek)에 도착하였다. 며칠후 술레이만은 헝가리의 얀 자폴리아(Janos Zapolya: Jan Szapolyai)가 이끄는 기병대와 합류하였다. 얀 자폴리아는 술라이만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지원군을 받은 터키 진영은 그나마 원기를 되찾아 페르디난트에게 점령당한 서부 헝가리의 요새들을 하나하나 탈환하기 시작하였고 9월 8일에는 마침내 부다(현재의 부다페스트의 부다 쪽)까지 되찾았다. 터키 군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 저항이 있었다면 브라티스라바(Bratislava)에서 도나우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터키 군대가 포격을 받은 정도였다.

 

 오늘날의 오시제크 시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