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터키/터키의 비엔나 공성

슈테판성당을 지키자

정준극 2008. 6. 8. 07:04

 방어조치: 슈테판성당을 지키자


터키 군대가 진격해오자 비엔나에서는 방어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병사들과 시민들은 내심 무척 불안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9월 초에 터키 군대가 헝가리의 부다(Buda)를 탈환했을 때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병사들과 일부 시민들이 대거 학살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엔나 시민들은 만일 비엔나가 함락되면 똑 같은 운명에 처해 질것 같아 걱정이 태산같았다. 페르디난트는 주위의 권고에 따라 합스부르크의 가족들을 보헤미아로 피신시켰다. 페르디난트는 형인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르 5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샤를르 5세도 프랑스와의 전쟁을 치루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군대를 파견할 처지가 못되었다. 하지만 동생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데 가만히 있을수는 없어서 소수의 스페인 보병들과 일부 독일 용병들을 추려서 비엔나로 파견하였다.

 

샤를르5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스페인의 카를로스 5세.


비엔나 수비대장은 빌헬름 폰 로겐도르프(Wilhelm von Roggendorf)였다. 그는 유능한 장군이었지만 이미 나이가 지긋하여 혼자서 수성(守成)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독일 용병출신으로 27세의 젊은 장교인 니클라스 잘름(Niklas Salm) 백작에게 전체 군대를 통솔할수 있는 실권을 주었다. 잘름백작은 1525년 이탈리아의 파비아 전투(The Battle of Pavia)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린바 있는 명장이었다. 이탈리아에 있던 잘름은 샤를르 5세가 파견한 독일 용병(Landsknechte)과 스페인 소총부대(Musketmen)가 비엔나에 도착할 즈음에 비엔나에 왔다. 잘름은 성슈테판성당을 둘러싸고 있는 3백년 이상 오래된 성곽을 우선 보수하고 그 곳에 방어사령부를 설치했다. 잘름은 비엔나가 오래 버틸수 있도록 비엔나를 둘러싼 4개문을 봉쇄하고 부실한 성벽을 강화했다. 그는 흙으로 요새들을 만들고 보루를 세웠으며 성벽에 면하여 있는 시내의 건물들을 높여 적군을 내려다 볼수 있게 했다. 당시 비엔나 성곽은 오늘날 링슈트라쎄를 둘러싸고 있는 한정된 형태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인네레 슈타트(Innere Stadt)의 한 가운데에 있는 성슈테판 성당은 비엔나 수성의 센터였다. 한편, 오늘날 링슈트라쎄에 있던 성곽은 제2의 저지선이었으며 제1차 저지선은 현재의 귀어텔(Guertel)로 삼았다. 오늘날의 귀어텔은 당시에 해자(垓字)와 같은 구실을 했었다. 물론 터키군은 오늘날의 귀어텔을 손쉽게 타파하고 링슈트라쎄를 집중적으로 포위했다. 당시 터키군의 총사령부는 현재의 19구 되블링에 있었다.  


1529년 터키의 1차 공성 때의 비엔나 중심지역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