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터키/터키의 비엔나 공성

터키의 공성(攻城)

정준극 2008. 6. 8. 07:05

터키의 공성(攻城)


비엔나에 당도한 터키 군대는 실상 오랜 행군으로 지쳐있었다. 이들은 행군 초기에서부터 폭우와 홍수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에 비엔나에 도달하였을 때는 건강도 나빠지고 배고픔에 지쳐있었다. 모든 것이 부족하였다. 식량도 부족했고 운송수단인 낙타도 부족했으며 중장비인 대포도 부족했다. 터키 군대는 사실상 사기마저 저하되어 있었다. 그나마 전투능력이 있는 부대는 경기병(시파히스: 샤파히스)이었다. 하지만 비엔나 성을 공격하는데 경기병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였다. 술탄 술라이만은 우선 비엔나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항복을 권유했다. 비엔나군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인 잘름(Salm)은 아무런 회답도 주지 않고 술탄의 사자를 돌려보냈다. 해볼테면 해보자는 표현이었다. 그러자 터키군의 포탄이 비엔나 성벽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잘름백작이 미리 성벽을 단단히 보수했기 때문에 심각할 정도의 손해를 주지 못했다. 그나마 오토만의 궁수부대가 활을 쏘아 대는 바람에 한때 비엔나 성곽 내에 있던 병사들과 시민들이 우왕좌왕하여 혼란에 빠졌을 뿐이었다. 

 

1683년의 비엔나 전투


터키 군대는 성벽 밑에 지하 터널을 파고 비엔나에 침투하여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비엔나의 병사들과 시민들은 일치단결하여 밤낮으로 망을 보아 터키 군이 지하터널을 파기 시작하면 곧바로 대응하여 쫓아 버렸다. 어느 때는 비엔나군이 터키군의 부사령관이며 총리대신인 이브라힘 파샤를 거의 생포할뻔 하기도 했다. 터키군의 지하터널 작전은 점차 대규모로 발전하였다. 마치 전병력을 동원하여 지하 터널을 파는 듯했다. 이에 잘름 백작은 8천명의 돌격대를 구성하여 성문을 열고 나가 터키의 지하터널 작전 본부를 급습하여 큰 손실을 주었다. 터키 군대는 비엔나 입성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