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터키/터키의 비엔나 공성

모하츠 전투와 페르디난트1세의 전투

정준극 2008. 6. 8. 07:02

 모하츠 전투와 페르디난트1세의 전투

 

  

 페르디난트1세                                         페르디난트1세의 부인으로 헝가리왕 루이2세의 여동생인 안나


1526년 8월, 오토만 제국의 술탄 술라이만은 헝가리의 모하츠(Mohacs) 전투에서 헝가리 왕 루이2세(Louis II)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헝가리 왕 루이2세(1506-1526)는 바로 그 모하츠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로써 오토만 터키의 술라이만은 남부 헝가리를 손에 넣을수 있었다. 루이2세가 세상을 떠나자 헝가리의 다음 왕위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당시에 헝가리도 신성로마제국의 우산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문제에 있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입김은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샤를르5세(카를 5세: 1500-1558)였다. 그런데 샤를르 5세의 동생으로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는 대공인 페르디난트1세(1503-1564)는 루이2세의 여동생인 안나 야겔로니카(Anna Jagellonica: 1503-1547)와 결혼하였다. 그러자 페르디난트1세는 자기의 부인인 안나가 루이2세의 뒤를 이어 헝가리의 왕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이2세는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왕위 계승자는 루이2세의 유일한 혈육인 누이동생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페르디난트의 주장은 서부 헝가리의 일부 영주들과 귀족들로부터 겨우 호응을 받았을 뿐 동북부와 남부 헝가리의 영주들과 귀족들로부터는 냉대를 받았다. 그중에서 헝가리 동북부 트란실바니아에 근거를 둔 얀 자폴리아(Jan Zapolya: 1487-1540)는 페르디난트의 주장에 과감히 반대하고 나섰다. 얀 자폴리아는 마치 헝가리를 대표하는 인물처럼 부각되었다. 오토만 제국의 술탄 술레이만은 헝가리가 오토만 제국의 분봉왕국이 되는 조건으로 얀 자폴리아를 헝가리의 새로운 왕으로 인정한다고 나섰다. 오토만 제국은 모하츠(Mohacs: 독일어로는 Mohatsch)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후 헝가리 전역에 대한 영향력을 은연중에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얀 자폴리아로서 술레이만의 후원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헝가리가 어떤 나라인가?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동양의 마쟈르(Magyar)민족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가깝다고 하면 오스트리아보다는 오토만 제국이 더 가깝다.

 

모하츠 전투 후에 루이 2세의 시신을 발견하여 운반코바 하는 헝가리인들


그러한 와중에서 오스트리아 대공인 페르디난트는 처음에는 자기의 부인인 안나가 헝가리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내세웠다가 여론의 화살을 맞자 방향을 바꾸어서 자기야 말로 세상 떠난 루이2세의 처남매부 관계이므로 헝가리의 왕이 되는데에 부족함이 없다고 내세웠다. 페르디난트는 1526년 10월 26일에 브라티스라바(Bratislava)에서 제국의회를 개최하고 스스로 헝가리 왕을 겸한다고 선언하였다.  페르다난트는 그런 결정을 실해에 옮기기 위해 1527년과 1528년에 군대를 몰아 부다(Buda: 오늘날의 부다페스트의 부다쪽)를 공격하여 점거하였다. 그러자 오토만 제국은 1529년 초에 당장 반격에 나서서 부다와 인근 지역을 점령한 페르디난트 군대를 몰아냈다. 술탄 술라이만은 페르디난트를 그대로 놓아두면 오토만 제국에 위협이 될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 기회에 오스트리아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손에 쥐고자 결심했다. 그러자면 우선 비엔나를 점령해야 했다. 비엔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일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다.

 

헝가리 왕 루이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