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터키/터키의 비엔나 공성

제1차 비엔나 공성, 그 이후

정준극 2008. 6. 8. 07:06

제1차 비엔나 공성, 그 이후


술라이만이 마지막으로 비엔나를 공격토록 한 것은 정말 비엔나를 함락시키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되도록이면 비엔나에 타격을 주어 훗날 다시 공략할 때에 유리한 입장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작전은 그가 1526년 부다(Buda)를 공략하였을 때 사용했던 전법이었다. 일단 헝가리로 퇴각한 터키군은 1532년 페르디난트군이 탈환한 서부 헝가리의 쾨체크(Koeszeg)를 공략하여 재탈환코자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겨울이 다가 왔기 때문에 추위에 견디기 어려웠으며 더구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샤를르 5세가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헝가리를 오토만 터키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새로 8만명의 군사를 일으켜 파견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오토만 터키로서는 비엔나가 터키능력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술라이만은 집에 돌아가 침묵을 지키며 비엔나를 넘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티프키르헤에 안치되어 있는 니클라스 폰 잘름 백작의 석관


술탄 술라이만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비록 비엔나에서는 퇴각했지만 남부 헝가리에서의 영향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비엔나의 합스부르크에게 상당한 손실을 입힌 것은 결국 합스부르크의 헝가리에도 손실을 입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하여 합스부르크가 헝가리 전역을 통치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아 놓았다고 볼수 있다. 실제로 페르디난트 군대도 심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전쟁이 계속되었다면 그 군사력을 가지고는 술라이만을 도저히 대적할수 없었다. 그것도 술라이만의  성과라면 성과일수가 있다. 한편, 술라이만은 헝가리에 야노스 자폴리아(Janos Szapolyai)를 왕으로 하는 괴뢰왕국을 세워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완충 역할을 하도록 한 것도 큰 성과였다. 술라이만의 비엔나 공성으로 양측이 입은 손실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수천명의 병사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천명의 비엔나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이들은 거의 모두 비엔나 외곽에 살던 주민들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보면 오토만 터키의 중부 유럽 공략을 비엔나가 저지한 것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르네상스 세계의 맹주였던 오토만 제국은 서서히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라트하우스파르트(시청공원)에 있는 니클라스 폰 잘름 백작 기념상

 

비엔나를 지켜낸 주인공은 무어라 해도 니클라스 폰 잘름(Niklas von Salm) 백작이었다. 잘름 백작은 터키군의 마지막 공격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그 여독으로 1530년 5월 4일 세상을 떠났다. 페르디난트1세는 잘름 백작의 공적을 높이 기려 훌륭한 장례식을 거행해 주었다. 잘름 백작의 관은 정교하게 조각된 대리석관이다. 이 르네상스 대리석관은 나중에 보티프교회(Votivkirche)에 안치되었다. 페르디난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2세는 훗날 술라이만이 터키군 사령부를 설치했던 장소에 노이게보이데(Neugebaeude) 여름궁전을 건축했다. 마구간처럼 생긴 이 궁전은 온전히 보전되지 못하여 폐허가 되었으며 현재는 마이들링 공동묘지이다. 비엔나 시당국은 옛 노이게보이데 궁전을 복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노이게보이데 여름궁전.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