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터키/터키의 비엔나 공성

제2차 비엔나 공성 - 비엔나 전투

정준극 2008. 6. 8. 07:07
 

[제2차 비엔나 공성] - 비엔나 전투

 

카라 무스타파 


제1차 비엔나 공성으로부터 150여년이 지난 1683년 터키군은 비엔나를 함락키 위해 또 다시 공격을 감행하였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비엔나 전투’라고 부른다. 오토만 터키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로마였다. 성베드로 대성당을 모스크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토만 제국군의 총사령관은 카라 무스타파(Kara Mustafa)였다. 카라 무스타파는 1682년 10월 스탐불(Stambul: 오늘날의 이스탄불)을 떠나 비엔나로 진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레오폴드1세(Leopold I)는 크게 걱정하여 동맹군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변의 국가들은 비엔나를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이 없었다. 카라 무스타파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터키군은 1683년 5월 베오그라드(오늘날의 유고 공화국 수도)를 점령하였다. 야니싸리(Janitscharen)라고 하는 술탄의 근위대, 그리고 스파히(Spahi: 경기병) 부대를 주축으로 한 터키군은 파죽지세로 비엔나로 향하여 진군을 계속하였다. 전체 병력은 15만명이었으며 그중 4만명이 야니싸리와 경기병인 시파히였다. 반면 비엔나에 있는 레오폴드1세의 병력은 3만2천명이었다. 레오폴드1세의 군대는 헝가리로 나가서 터키군과 전투를 벌일 계획이었으나 너무 병력이 적어서 일단 비엔나만 방어키로 하였다. 그리고 헝가리에 있는 군대도 모두 비엔나로 불러들였다.  


구원병으로 온 용감한 폴란드 병사들

 

파싸우(Passau)로의 피난

 


페르흐톨드스도르프 교구교회의 중앙제단과 스테인드 글라스.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터키군이 페르흐톨드스도르프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레오폴드1세와 합스부르크의 가족들은 일단 바바리아에 있는 파싸우로 피신하였다. 이 때 비엔나 시민 6만명이 함께 따라갔다. 비엔나에 남아 있는 비엔나 시장 안드레아스 리벤베르크(Andreas Liebenberg)는 비엔나 방어군을 조직하였다. 비엔나 추기경인 레오폴드 콜로니츄(Leopold Kollonitsch)도 리벤베르크 시장을 도와 비엔나 사수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비엔나에는 1만6천명의 병력밖에 없었다. 레오폴드1세의 나머지 병력은 헝가리 일부와 바바리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리벤베르크 시장의 기념상은 비엔나 대학교 길건너 란트만 카페 옆의 광장에 높이 솟아 있다.

 

레오폴드1세가 피난하였던 바바리아의 파싸우. 가운데 교회는 슈테판스돔.


1683년 7월 16일, 터키군은 또 다시 비엔나 성문에 이르러 진을 쳤다. 비엔나에는 흉흉한 소문들이 나돌았다. 터키군이 비엔나 근교의 페르흐톨드스도르프(Perchtoldsdorf) 마을을 점령하고 주민 모두를 몽둥이로 무참하게 구타하여 죽였다는 소문이었다. 비엔나 근교 뫼들링의 페르흐톨드스도르프는 터키군과 협정을 맺어 터키군이 마을을 보호해준다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어 터키군은 릴리엔펠츠(Lilienfeld), 빌헬름스부르크(Wilhlemsburg), 하인펠드(Hainfeld), 튀르니츠(Tuernitz) 마을들을 점령하고 역시 주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터키군은 어린이와 노약자들 까지도 학살하고 심지어 노예들도 사정없이 죽였다. 터키군으로서는 십자군전쟁에서의 피해를 이곳에서 만회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포로로 잡혀 터키로 보내져 노예생활을 해야 했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생전에 고국 오스트리아의 땅을 디시 밟아 보지 못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비엔나 시민들은 만일 터키가 비엔나를 함락하면 자기들도 그러한 운명에 처할 것 같아서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페르흐톨드스도르프 교구교회에서의 성체축일 장면. 야콥 알트 작품. 평화로운 와인 마을인 페르흐톨드스도르프. 그러나 터키의 제2차 비엔나 공성 때에 너무나 참혹한 피해를 보았다.


참혹한 비엔나의 현실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는 값비싼 보물들이 많았다. 터키군에게는 비엔나의 보물들을 마음대로 약탈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터키군의 사기는 크게 고무되었다. 터키군은 비엔나를 더욱 거세게 공략하였다. 마치 거센 파도처럼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비엔나의 병사들과 시민들은 사력을 다해 터키군의 공략을 방어하였다. 외부와의 연락이 단절된 비엔나의 사정은 점점 악화되었다. 탄약은 떨어지고 이질과 같은 질병이 창궐하였다. 식량도 턱없이 부족했다. 고양이 고기는 고급 식품이었다. 많은 시민들이 죽어나갔다. 비엔나 방위군의 3분의 2가 손실을 입었다. 터키군은 비엔나 시내에 밤낮으로 포탄을 날려 보냈다. 건물들의 지붕이 날아가고 기둥이 무너졌으며 길거리는 파손된 건물들의 잔해 때문에 걸어 다닐수가 없을 정도였다. 시민들은 언제 어디서 포탄이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날마다 불안 속에서 떨며 지내야 했다. 비엔나에게 있어서 마지막 희망은 외부로부터의 구원군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이었다.


 1683년의 비엔나 전투. 칼렌버그의 얀 조비에스키 3세 폴란드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