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터키/터키의 비엔나 공성

역사적인 비엔나 전투

정준극 2008. 6. 8. 07:10

역사적인 비엔나 전투


드디어 구원군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기독교 연합군이 아시아에서 온 터키군을 몰아내기 위해 비엔나로 진격하여 오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군은 신성로마제국 군대가 2만1천명, 바바리아 병사가 1만 1천명, 슈봐비아(Swabia)와 프랑코니아(Franconia)의 병사가 1만명, 작소니 병사가 1만명, 그리고 용감한 폴란드 병사가 2만4천명으로 구성되었다. 폴란드군은 얀 조비에스키(Jan Sobieski) 폴란드 왕이 직접 지휘하는 군대로서 그중 1만4천명은 기병대였다.

 

터키군 사령관인 카라 무스타파 파샤


터키군 사령관인 카라 무스타파는 구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되도록 빨리 비엔나를 함락하고 싶었다. 카라 무스타파는 병사들에게 앞으로 다섯시간 안에 비엔나는 함락될 것이라고 공언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러나 카라 무스타파는 몇가지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다. 우선 자기의 군대를 조직적으로 편성하여 강화하지 못하고 즉흥적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전략적으로 중요한 비엔나 숲의 언덕들에 대하여는 상대적으로 경계를 소홀히 하였다. 결과, 기독교 연합군은 칼렌버그등 비엔나 숲의 중요 전략적 요지들에 쉽게 포진할수 있었다. 1683년 9월 11일의 일이었다.

 

 

비엔나를 구원한 폴란드 왕 얀 조비에스키


비엔나 숲의 전략적 언덕들을 빼앗긴 터키군은 이튿날인 1683년 9월 12일 일단 사력을 다하는 공세로 나왔다. 그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기독교연합군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기독교 연합군과의 건곤일척 전투는 칼렌버그(Kahlenberg)에서 벌어졌다. 이날 새벽 4시, 기독교 연합군은 칼렌버그의 정상에 집결하여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며 전투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모두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임하였다. 기독교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은 폴란드 왕 조비에스키였다. 조비에스키는 전군을 3대로 나누었다. 제1대는 신성로마제국군과 작소니군으로서 좌익을 담당토록 했고 제2대는 바바리아군으로서 중앙을 맡도록 했다. 제3대는 조비에스키 왕이 직접 지휘하는 폴란드군으로서 우익을 맡았다. 폴란드의 기병대는 비엔나 숲을 가로질러서 가야했기 때문에 돌격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래도 코자크의 용맹함으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터키의 대군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전투가 격심했던 곳은 대부분 비엔나 숲 언저리의 포도밭이었다. 점심때 쯤, 기독교 연합군의 선봉대가 되블링의 터키군 사령부에 다다랐다. 오후에는 수비가 강했던 터키군 사령부가 기독교 연합군에게 함락되었다. 몇시간후 터키군 대부분은 도주하기 시작했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지역은 중앙이었다. 지금의 배링지구였다. 카라 무스타파 자신이 군대를 독려하며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저녁이 되자 카라 무스타파도 도주하기 시작했다. 터키에 돌아간 카라 무스타파는 전투에 실패한 죄로 베오그라드에서 비단끈으로 목을 조이는 죽임을 당했다.

 

폴란드 왕 조비에스키와 카라 무스타파가 이끄는 터키군의 전투


새로운 오스트리아 제국의 위상 강화

- 유행의 알라 투르카 -


비엔나 전투로 터키군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이제 터키는 더 이상 위험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후 몇십년 안에 오스트리아는 동유럽의 동부와 남부에서 꾸준히 영토를 확장할수 있었다. 헝가리는 완전히 오스트리아의 관할아래 들어갔으며 오늘날의 유고연방공화국은 터키로부터 해방되어 오스트리아 제국에 편입되었다. 전투에 패배한 터키군은 앞뒤 가리지 않고 분주히  도주하였다. 터키군은 거의 모든 군장비들을 막사에 놓아둔채 도주하였다. 물론 커피자루도 그대로 놓아두고 떠났다. 이것을 쿨치키라는 사람이 가져다가 비엔나에 커피를 전파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스토리이다. 오늘날 비엔나 1구 콜슈츠키-가쎄(Kolschtzky-gasse) 4번지에는 쿨치키가 커피를 작은 절구에 넣고 가는 모습의 기념상이 서 있다. 터키군이 물러난후 비엔나에는 이른바 알라 투르카(Alla turca)가 큰 패선이었다. 여자들 모자가 터키식 터반을 흉내낸 것도 그 즈음이었다. 무엇보다도 비엔나는 동방세력과 대치하는 중부유럽의 동쪽 마을이 아니라 새로운 오스트리아 제국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커피를 처음으로 비엔나에 유행시켰다는 쿨치키 기념상. 4구 콜쉬츠키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