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이야기/비엔나와 페스트

두 차례의 대재난

정준극 2008. 6. 8. 21:37

두 차례의 대재난


비엔나는 페스트 때문에 두 차례 큰 재난을 겪었다. 이른바 흑사병이라고 불리는 병이다. 첫 번째는 1349년이었으며 두 번째는 1678-79년이었다. 두 번째 역병은 대역병(The Great Plague)이라고 부를 정도로 무서운 결과를 던져준 것이었다. 터키의 제2차 비엔나 공성이 1683년이었으므로 비엔나는 터키의 무자비한 공성이 있기 불과 4-5년전에 페스트 때문에 말할수 없는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페스트가 도대체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비엔나가 페스트 예방을 위해 주의사항에 대한 포고문을 채택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후인 1779년이었다. 그러면 과연 비엔나는 1678-79년의 역병 때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가? 공식적으로는 7만6천명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12만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대단하다.

 

그라벤의 페스트조일레

                               

어떻게하여 비엔나에 그런 역병이 들어왔는가? 도나우(다뉴브)강변에 위치한 비엔나는 동서교역의 교차로였다. 그런 연유로 비엔나는 이미 14세기에 ‘검은 죽음’(Schwarze Tote: Black Death)이라고 하는 전염병으로 커다란 홍역을 치루었다. 비엔나에는 많은 인구가 살았지만 거리는 비좁게 건설되었다. 중세의 기록에 따르면 비엔나에는 하수도나 배수시설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떠했겠는가? 집에서 버린 쓰레기와 오물이 좁은 거리를 뒤 덮어 냄새가 진동했을 것이다. 더구나 무역의 중심지였던 비엔나에는 옷감, 양탄자, 곡물 등을 보관해 두는 창고들이 많았다. 문제는 곡물창고였다. 대부분 곡물창고에는 쥐들이 들끓었다. 쥐는 병균을 옮기는 선수들이었다. 정말로 비엔나의 공중위생은 형편없었다. 그래서 유럽에 역병이 돌자 사람들은 이를 ‘비엔나의 죽음’이라고까지 불렀다.

 

7구 노이바우의 장크트 울리히스플라츠에 있는 성울리히교회와 성삼위일체 탑(페스트조일레)


비엔나에서 페스트가 물러가자 시민들은 크게 기뻐하여 오늘날 비엔나 시내 중심가인 그라벤(Graben)에 페스트기념탑(페스트조일레)을 세웠으며 7구 노이바우(Neubau)에는 성울리히(hl. Ulrich) 교회를 세워 페스트 소멸을 축하하였다. 또한 비엔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인 칼스키르헤(Karlskirche)도 역병의 성인인 성 칼 보로모이스(hl. Carl Borromaeus)에게 봉헌된 교회이다.

 

비엔나에서 역병이 사라진 것을 기념하여 세운 칼스키르헤(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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