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이야기/비엔나와 페스트

역병시체 처리

정준극 2008. 6. 9. 10:10

역병시체 처리

 

역병에 걸린 사람들은 임파선이 벌겋게 부어 죽는 경우가 많았다. 비엔나 도심에 사는 사람들은 역병이 비엔나 외곽지대에서만 발생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1679년 여름, 비엔나 중심지대에서도 역병 환자가 발생하자 크게 당황했다. 역병에 감염된 사람들은 단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아니 단 몇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비엔나에는 공포가 엄습했다. 귀족의 저택에서도 역병환자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하인들 사이에서 피해자가 생겼으나 나중에는 지체 높은 귀족가족들 중에서도 피해자가 생겼다. 비엔나 시내에는 시체를 수거하는 마차가 등장했다. 어떤 경우에는 시체를 제때에 치우지 않아 며칠째 길거리에 그대로 방치되는 경우가 있었다. 누구도 손을 써서 치우려 하지 않았다. 감염될 것이 겁나서였다.

 

린츠의 페스트조일레


시체들을 매장할 공동묘지가 정해지지 않아서 길거리에 방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역병에 걸려 죽은 사람들은 교회묘지에 매장할수는 없었으며 일반 공동묘지에도 감염을 두려워하여 매장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역병시체들만을 따로 집단 처치하는 별도의 장소가 필요했으며 당국으로서 그런 장소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매장되지 못하고 며칠씩 그대로 방치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역병시체들을 집단 처치하는 곳은 주로 비엔나 성곽 밖의 들판이었다. 그곳에 구덩이를 파고 시체들을 쏟아 넣은후 구덩이가 차면 시체들을 불에 태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구덩이에 시체들이 찰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쥐나 다른 해충들이 득실거려 또 다시 병균을 옮긴다는데 있었다. 아무튼 비엔나에는 시내와 교외를 막론하고 쥐들이 날로 번성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비엔나에는 일곱 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매일 역병시체들이 너무 많이 생기기 때문에 성문 밖으로 내다버리기 위해 드나드는 문이 일곱 개로도 부족했다고 한다. 역병에 걸려 죽은 시체들을 수거하고 매장하는 일은 중죄수들에게 맡겨졌다. 어차피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들이므로 역병시체들을 수거하는 일에 적당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역병시체들을 성밖의 구덩이에 옮기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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