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명소와 공원

칼 맑스 호프(Karl Marx Hof)

정준극 2008. 6. 15. 07:19
칼 맑스 호프(Karl Marx Hof)

칼 맑스 호프. 한때는 하일리겐슈태터호프라고 불렀었다.


칼 맑스 호프는 19구 되블링의 페브루아르플라츠(Februarplatz) 12번지와 하일리겐슈태더 슈트라쎄(Heiligenstaedter Strasse)에 걸쳐 있는 거대한 규모의 주거 건물이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주거빌딩일 것이다. 12세기에 이곳은 도나우 강의 지류가 흐르던 곳이었다. 18세기에는 강의 흐름이 바뀌어 이곳에 커다란 저수지가 생겼다. 요셉2세 황제가 저수지를 메꾸어 평지로 만들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이곳 평지에는 규모가 큰 시장이 들어섰다. 그러다가 당시 사회민주당이 비엔나 시민들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이곳에 대규모 아파트를 건축키로 하여 시장은 사라졌다. 새로운 복합주택의 설계는 오토 바그너(Otto Wagner)의 제자인 칼 엔(Karl Ehn)이 맡게 되었다. 공사는 1829년부터 시작되어 이듬해인 1930년 마감되었다. 1,382가구가 들어가 살수 있는 아파트가 완성되었다. 당시 비엔나 사회에는 프로레타리아 혁명의 사상이 감돌았다. 그 영향으로 새로 지은 주택건물을 칼 맑스 호프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엔나 시장인 칼 자이츠(Karl Seitz)는 이렇게 말했다. Wenn wir einst nicht mehr sind, werden diese Steine fuer uns sprechen. 굳이 번역하자면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더라도 여기 있는 이 돌이 우리를 대신하여 말해 줄 것이다.’이다. 즉, 집을 참 잘 지어놓았다는 의미라고 풀이할수 있다.

 

칼 맑스 호프

                             

칼 맑스 호프는 유명한 1934년 2월 12일의 봉기의 주무대였다. 그래서 나중에 칼 맑스 호프 앞의 광장을 ‘2월 광장’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칼 맑스 호프의 주소는 ‘2월 광장’의 12번지가 되었다. 이날 노동자와 공화주의자들이 건물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정부군에 대항하였다. 이들의 봉기는 정부군의 포격으로 무산되었다. 나치 기간중에는 건물의 명칭을 ‘하일리겐슈태더 호프’라고 고쳐 불렀다. 그러나 나치가 물러가자 옛 이름을 다시 찾게 되었다. 나치기간중 이곳에 살고 있던 가구중 약 66가구가 순수 아리안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강제로 쫓겨났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강제수용소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현재 칼 맑스 호프에는 이에 대한 명판이 붙어 있다.

 

칼 맑스 호프에서의 유태인 추방 명판


칼 맑스 호프는 전체 길이가 1.100m에 이르며 약 5천명이 입주하여 살고 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큰 연립주택일 것이다. 건물이 하도 길기 때문에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가려면 전차로 4개의 정류장을 지나야 한다. 칼 맑스 호프에는 주변에 여러 공원이 있어서 녹지대를 제공해주고 있으며 운동장도 별도로 있다. 칼 맑스 호프는 하나의 마을과 같다. 건물 안에 유치원, 병원, 목욕탕, 25개의 점포, 우편국, 약국, 청소년센터, 카페, 도서관 등이 들어서 있다.   

 

2월광장 12번지 표지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