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명소와 공원

아이젠슈타트와 유태인

정준극 2008. 6. 16. 13:54

[아이젠슈타트와 유태인]

 

아이젠슈타트는 비엔나 근교에서 레오폴드슈타트에 이어 유태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지역이다. 아이젠슈타트의 운터베르크(Unterberg)는 유태인들의 집단촌이었다. 운터베르크에 있는 아름다운 바로크 건물인 베르트하이머 하우스(Wertheimer Haus)는 과거 유태교 시나고그(회당)였으나 현재는 유태박물관이다. 아이젠슈타트가 속하여 있는 부르겐란트는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유태인에 대한 추방이 시작되기 이전까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부르겐란트에는 이른바 셰와 케힐로트(Shewa kehillot)라고 하는 ‘세븐 콤뮤니티’(Seven Communities)가 있었다. 유태인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일곱 마을들이었다. 셰와 케힐로트는 이스라엘을 떠나 살고 있는 모든 유태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명칭이었다.

 

1930년대 아이젠슈타인 게토 입구 

오늘날의 모습


‘세븐 콤뮤니티’는 에스터하지의 치하에서 설립되었다. 에스터하지 가문은 부르겐란트 북부의 거의 모든 지역을 소유하고 있었던 명문이었다. 에스터하지 공자는 자기 소유의 영토에 거주하고 있는 유태인과의 관계를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일곱 마을에 유태인들이 들어와 살며 생업에 힘쓰도록 지원하였다. 아이젠슈타트, 마터스도르프(Mattersdorf: 후에 Mattersburg로 명칭 변경), 코버스도르프(Kobersdorf), 라겐바흐(Lackenbach), 도이치크로이츠(Deutschkreuz: 히브리어로는 Zelem), 프라우엔키르헨(Frauenkirchen), 그리고 키트제(Kittsee)이다. 부르겐란트의 남단, 헝가리의 바티야니(Batthyany) 공자가 다스리던 지역에 세곳의 유태인 집단 마을이 별도로 조성되었다. 귀징(Guesing), 레흐니츠(Rechnitz), 슈타트슐라이닝(Stadtschlaining)이다.

 

아이젠슈타트의 유태인 묘역.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잡초만 무성하다.

 

부르겐란트에 유태인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부터였다. 이들은 대부분 카린티아(Carinthia)와 슈티리아(Styria)에 살던 유태인들로서 1496년 신성로마제국의 가톨릭 정책에 따라 추방되어 살곳을 찾아 헝가리의 부르겐란트로 오게 되었다. 당시 부르겐란트는 헝가리 왕국의 서쪽 끝 영토로서 오스트리아의 통치가 머무르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자유롭게 종교활동을 할수 있었으며 경제활동도 제한을 받지 않았다. 당시 부르겐란트 태수와 유태인간의 의무관계는 상당히 합리적인 내용으로 권리장전에 규정되어 있었다. 말하지면 유태인들에게 일종의 특권을 준 계약이었다. 이같은 ‘특권’으로 대부분 장인(匠人)이거나 상인이던 유태인들은 태수의 보호를 받으면서 유태인 집단 마을을 거의 자치적으로 운영하였다. 유태인들은 자체의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운영했으며 스스로 야경대도 조직하였다. 아이젠슈타트에 있던 탈무드학교(Talmudic School)는 18세기에 부르겐란트 이외의 지역에서도 유명해서 많은 유태인 청년들이 공부하러 왔었다. 부르겐란트의 유태인 집단 마을들은 1848년부터 스스로 시장과 법관을 선출할 정도로 자치적인 운영을 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와서 지나친 자치를 주는 것은 국가운영에 방해가 된다는 주장이 있어서 모두 철회되었다. 다만, 아이젠슈타트-운터베르크만이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전까지 자치운영을 계속하였다. 1938년, 부르겐란트 유태인들의 평화는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끝을 맺었다. 홀로코스트(Holocaust)가 등장하였다. 유태인들은 나치의 군화에 채여 강제수용소로 끌려 갔다. 마을에는 더 이상 유태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오늘날 유태인들이 평화스럽게 번영하며 살았다는 증거는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황폐해진 묘지와 굴러다니는 묘비들뿐이다. 

 

부르겐란트의 크리스탈나하트 이후. 상점들은 불탔다. 유태인들은 다른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