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수원

신풍초등학교

정준극 2008. 6. 27. 06:16

나는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를 수원에서 다녔다. 화성행궁 바로 옆에 위치한 신풍(新豊) 국민학교였다. 신풍초등학교의 전신은 일찍이 1896년 설립된 수원공립소학교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몇개 되지 않는 1백년 이상 역사를 간직한 학교이다. 나는 1947년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학하여 3학년이었던 1950년 6.25 사변 때에 피난을 갔다가 3년후인 1953년 휴전과 함께 다시 신풍국민학교를 다녀 1954년 봄 졸업하였다. 나는 1.4 후퇴 때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수원에서 천안까지 추운 겨울날씨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걸어갔으며 거기에서 용하게 화물차를 얻어 탈수 있어서 며칠만에 대구까지 와서 지내다가 부산으로 다시 가게 되었다. 그러나 부산에서도 도저히 살수가 없어서 거제도 앞의 가덕도 천성리까지 가게 되어 그곳에서 천성국민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피난시절 얘기를 하려면 수십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일단 접고자 한다. 

 

사변후 축구 골문 쪽에 가건물이 있었다. 6학년이 사용했다.

 본관 건물 자리에 새로 건물을 지었다. 옛 모습은 볼수 없다.

현재의 신풍초등학교 본관 중앙부분 

 

휴전후 수원에 돌아와 다시 신풍국민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 건물이 모두 파괴되어 가건물을 짓고 공부를 했다. 운동장 한가운데 있는 아주 큰 고목만이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교실도 없고 책상도 없었다. 그래서 각자 집에서 책상을 만들어 매일 지고 다녀야 했다. 나도 사과궤짝으로 책상을 만들어 지고 다녔다. 세상에 학생들이 각자 자기의 책상을 매일 가지고 다녀야 하는 학교도 있었으니 기관이 아닐수 없었다. 아무튼 학교건물들이 폭격으로 파손되어 교실이 부족하므로 5학년까지는 2부제 수업을 하였다. 그러므로 모르고서 자가용 책상을 교실에 두고 가면 다른 사람이 가져갈 위험이 있으므로 잃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들고 오고 들고 가야 했다. 당시에는 중학교 입학이 뺑뺑이가 아니고 시험제여서 대단히 어려웠다. 그러므로 6학년은 죽어라고 공부를 해야 했다. 6학년은 2부제 수업을 하지 않고 온종일, 그리고 저녁 먹고 밤늦게까지 공부하였다. 어떤 문제가 중학교 시험에 나올지 모르므로 우리는 미국의 48개주 이름까지도 외웠다. 지금 생각하면 학원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세상이어서 학교에서만 공부를 했고 이와 함께 당연히 담임선생님은 가장 무서운 분이었다. 수원의 국민학교에서 서울의 중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과거시험을 보는 것과 같이 중요하고 어려웠다. 나는 배재학당을 나오신 외삼촌의 권유에 의해 배재중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7대1의 경쟁이었다. 다행히 합격하였다. 담임선생님에게 합격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그렇게도 무섭고 엄하시던 선생님께서 함박 웃음을 띠우시면서 직접 교장선생님에게 데려가 인사를 드리도록 했다. 서울의 중학교에 합격한 다른 아이들도 담임선생님의 인도하에 교장선생님을 배알하는 영광을 가졌다. 담임선생님으로서는 서울의 중학교에 입학한 어린 제자들이 무척 자랑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교장선생님도 흐믓해 하시면서 손을 잡아 주셨다.   

 

 

신풍초등학교 교가비. 하단에는 악보까지 그려져 있다.

 

신풍초등학교의 교가 1절은 다음과 같다.

 

'팔달산 기슭 아래 고요한 품속

화령전 유서깊다 거룩헌 터전

빛나라 우리 신풍 지녀온 자랑

대한의 아들 딸들을 지켜주노라

 

무럭무럭 자라라 신풍 학우들

만세만세 억만년 높이 불러서

온세계에 이민족 널리 알리자'

 

지금 보면 약간 유치한 내용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 때에는 교가를 부르면 초연했던 기상이 높이지는 듯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신풍초등학교 교문. 충효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운동장 한가운데 있던 고목에 대하여는 한마디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 없다. 벼락을 여러번 맞은 듯 나무 밑둥이가 크게 뚫린 고목이었다. 봄이면 나뭇가지마다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펼쳐주는 고마운 나무라는 등의 얘기는 진부하기 때문에 생략한다. 다만, 기억에 남는 것은 이 고목에 빗자루 귀신이 살고 있어서 비오는 날 밤이면 빗자루를 들고 이리저리 방황한다는 전설따라 삼천리 식의 얘기가 당시 아이들 사이에 심각하게 퍼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학생들은 비오는 날, 특히 밤중에는 절대로 학교 운동장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학교 변소에 갔던 어떤 여학생이 이번에는 달걀 귀신이 저쪽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고 기절하여 쓰러졌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나살려라하고 집으로 달려 갔는데 한참 달려간후 이젠 집에 다 왔겠지 하고 돌아보니 아직도 변소에 있더라는 것이었다. 참고로 달걀귀신이란 얼굴이 달걀처럼 갸름하지만 하얀 얼굴에는 눈과 귀와 코와 입이 없어서 그저 달걀처럼 보이는 귀신을 말한다. 아무튼 변소에 달걀귀신이 나타났었다는 얘기가 학생들 사이에 순식간에, 그것도 살을 붙여서 퍼지자 신풍국민학교는 귀신이 자주 나오는 학교라는 소문이 나게 되었고 6학년 야간 수업하는 우리들까지도 전전긍긍하며 불안에 떨었던 기억이 난다. 그 고목나무는 지금 화성행궁의 신풍루를 지나 왼편에 잘 보존되어 있다. 내가 학교 다닐 때에는 분명히 운동장 한 가운데에 있었는데 지금은 화성행궁의 내부에 있다.

 

현재는 화성행궁 안에 있는 고목. 예전에는 신풍국민학교 운동장 한가운데에 있었다. 밑둥의 구멍안에는 아이들이 서너명씩이나 들어갈수 있었다.

 

기왕에 귀신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어느 때는 학교와 담장 하나 사이로 붙어 있는 화령전(華寧殿)에서 으스스한 밤중에 귀신이 나와 돌아 다니는 것을 직접 보았거나 또는 누가 '애앵---'하며 마치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다는 얘기가 있었으며 심지어 그 이상한 귀신과 얘기까지 나누었다는 사람이 있어서 더군다나 걱정하며 지내기도 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화령전에서 국악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밤에 창 연습을 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신풍국민학교에는 귀신들이 많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매산국민학교와 세류국민하교 등 우리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국민학교 아이들이 신풍국민학교 학생들만 보면 '에그...귀신이야!'라면서 놀려 대던 일은 속상한 일이었다. 우리는 그 때까지만 해도 화령전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세상 떠난 영조대왕의 영정을 모신 집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전 가보니 나의 지식이 잘못되었음이 발각되었다. 영조대왕의 영정이 아니라 정조대왕의 어진이 모셔져 있는 곳이었다.

 

 

 교문에 들어서면 마주치는 신풍 마크 탑. 좀 어설프로 조잡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상징적이다.

                                                   

휴전 이후 학교에 돌아온 학생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 행색이었다. 피난민 신세 그대로였다. 모두들 아무 것도 없이 가난했다. 우리 반에서 제일 부자집 아이는 시장에서 신발가게를 하는 집의 아이였다. 그 아이만이 검은색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다른 아이들은 검은 고무신이거나 그것도 없으면 일본식 게다(나무 신발)을 신고 다녔다. 고무신은 고무의 품질이 좋지 않아서 자주 갈라졌다. 그러면 집에서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바늘로 꿰매어 주셨다. 많은 아이들이 꿰맨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공책이란 것도 아예 없었다. 재수 좋은 아이들은 도청에 다니는 삼촌이 가져온 양면궤지 파지를 노끈으로 묶어 공책으로 썼다. 다른 아이들은 군청이나 공장에서 나온 양회 부대 종이를 짤라 묶어서 공책으로 썼다. 6학년이 되니 하루 종일 학교에 있어야 하므로 점심을 싸가지고 다녀야 했다. 잘 사는 집 아이들은 멸치 볶음이나 콩자반을 반찬으로 싸가지고 와서 자랑삼아 벤토(도시락)를 펼쳐 보였다. 하지만 못 사는 집 아이들은 점심 벤토를 싸올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그런 아이들은 점심시간만 되면 슬며시 교실 밖으로 나갔다가 한참후에 들어왔다. 혹시 집에 가서 밥먹고 오는 것이나 아닌지 몰라 궁금하게 생각하던 차에 얼핏 한 아이를 따라가 보았더니 학교 우물가로 가서 수도꼭지에서 졸졸 흘러 나오는 물을 열심히 마시고 그것으로 점심을 대신하지 않던가? 처지가 그러하니 대부분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비쩍 말라 있고 기운도 없어서 책상에 엎드려 쬔병아리처럼 눈을 감고 조는 아이들이 많았다. 1954년부터는 결식아동을 위해 정부가 대영빵을 만들어 점심시간에 한개씩 나누어 주었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그냥 밀가루 빵이었지만 그것이 너무 먹고 싶어서 극빈자만이 받아 먹을수 있는 빵 한개를 벤토를 싸온 아이들이 벤토와 바꾸어 먹는 일도 많았다. 

 

 충효비와 교가비.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자가 모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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