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서울

한남회

정준극 2008. 7. 11. 07:35

한남회

 

한남회는 내가 군대생활을 했을 때 함께 지내던 친구들의 모임이다. 통상 예닐곱명의 친구들이 가끔 모이는 것이기 때문에 거창하게 무슨 회라고 이름 붙이기가 뭐 했지만 그래도 이름이 없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여 수긍하여 왔다. 더구나 경조사등에 화환을 보내더라도 무슨 명칭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기왕에 한남회라고 부르는 것이 무난하다는 생각이다. 나는 1964년 4월인지 5월인지에 입대하여 1966년 말에 제대하였다. 육군 3516부대에서 3년을 복무했다. 본부는 한남동 현재 하야트 호텔 자리에 있었다. 나와 함께 같은 부서에서 복무하던 동료들이 제대후 계속 만나 친교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이른바 한남회이다. 1967년부터 몇몇이서 만나기 시작한 모임이므로 2009년으로 40년이 넘게 이어온 모임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40년이 넘게 군대에서 함께 지내던 동기들이 모인다고 했더니 '무슨 그런 모임이 다 있느냐? 대단하다!'면서 놀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육군 3516부대가 어떤 부대이며 우리가 그 부대에서 어떤 업무를 보았는지에 대하여는 지면상 생략코자 한다. 아무튼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입대하여 같은 부대에서 함께 고생했던 동기들이 거의 반세기가 되도록 우의를 다지며 지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 모이는 군대 친구들은 아홉명이다. 박형규는 아직도 무슨 피혁관련 제조업을 하고 있으며 박신은 프랑스어에 능통하며 프랑스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한동현은 문교부 공무원으로 시작하여 영등포의 어느 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정년퇴직하였고 이문치와 유경하는 우리나라 굴지의 해운업계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하였다. 이종민은 방송계에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하였다. 대전 MBC 사장을 지냈고 MBC 청룡 야구단장도 지냈다. 그리고 브리타니카에 근문하던 김길룡이 있고 최근에 연락되어 만남에 참가하는 천안사람 김명중도 있다. 신앙심들이 두터워서인지 박형규, 김길룡, 김명중은 교회 장로님들이다. 이종민의 신앙심도 뿌리가 깊어 강건하다. 우리의 모임이 가능했던 것은 마침 거의 동년배들이기 때문이다.

  

2010년 4월 15일 신문로 또순이 집에서. 왼쪽으로부터 한동현, 박형규, 이문치, 유경하, 이종민, 김용은, 김명중, 오른쪽 끝이 박신.

 

누구든지 군대 갔다온 얘기가 나오면 며칠이 걸려도 끝내기에 부족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3년동안의 군대생활 얘기를 모두 기록으로 남길수는 없는 일이다. 나에게는 중요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통치 않은 얘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블록을 통해 기록을 위해서라도 조금은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두서없이 적어본다. 나는 논산훈련소에 두번 갔었다. 한번은 대학교 2학년 초반때였고 다음은 대학을 졸업한 후이다. 왜 두번이나 논산훈련소에 갔었는지에 대하여는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어찌어찌하여 대학에 들어가고 1학년을 보냈지만 2학년에 들어서자 학비가 걱정이었다. 등록금을 낼 형편이 되지 못하여 휴학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 되었다. 아르바이트로 어떤 중학생의 가정교사도 해보았지만 등록금을 내기에는 턱도 없었다. 고등학교 동창으로서 대학에도 함께 다니게 된 친구 주염돈의 사정도 나와 다를바가 없었다. 어느날 주염돈이 나에게 기왕 휴학하려면 통역장교로 30개월만 지내다가 제대하고 다시 복학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했다. 마침 5.16 이후에는 이른바 빵빵 군번의 학병 제도가 없어졌다. 학병은 1년반만 복무했고 일반병은 30개월을 복무해야 했다. ROTC가 생기기 바로 직전이었다. 마침 군사정부는 참모장교의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통역장교를 모집하였다. 우리 국군이 유엔군, 특히 미군과의 연합을 잘 하기 위해서는 통역장교가 필요하여 모집하였던 것이다.

 

2009년 5월 모임(좌로부터 한동현, 박형규, 김길용, 정준극, 박신, 유경하) - 이종민과 이문치는 사정상 불참. 서초동 긴자에서.

 

동국대학교에서 시험을 보았다. 구름같이 몰려 들었다. 20대 1이었다고 한다. 나와 주염돈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별로 실력도 없었지만 용케 합격하여 며칠후 수색 30사단에 모여 기차를 타고 논산으로 가게 되었다. 국방부에서 내건 통역장교의 복무 조건은 우선 소위가 아닌 중위를 준다는 것, 일반병과 마찬가지로 30개월만 복무한다는 것, 일선부대가 아닌 사단 및 군단에 배치한다는 것, 논산에서는 전반기만 마치고 당장 배치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니 기왕이면 장교로 가지 누가 일반병으로 가겠는가? 수색에서 기차는 밤새 달려 다음날 아침 논산훈련소가 있는 연무대 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신체검사가 끝나고 적성검사니 뭐니 하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동료 신병들 사이에서 수근수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용을 알아보니 중위를 주기는 커녕 소위를 주며 논산에서 전반기를 마치고 나면 금마에서 후반기까지 마쳐야 하고 그후 광주의 보병학교와 영천의 부관학교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대에서 교육이라는 것은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고달픈 것이다. 게다가 군단이나 사단에 배속되는 것이 아니라 연대로 떨어져 잘못하면 소대장을 맡아야 한다는 소식도 들렸다. 가장 문제가 된 소문은 복무기간이었다. 30개월은 고사하고 몇년을 복무해야 할지 모르는데 아마 7년은 지내야 제대할것 같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신문광고가 모두 사실이 아니지 않는가? 통역장교 시험에 합격하여 논산까지 온 신병들의 마음은 갈팡질팡이었으나 대부분 신병들은 사회에 나가도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체념하고 입대를 진행하였다.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만일 군대에서 7년을 복무한다면 대학교 졸업은 언제가 될지 까마득하여 결국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입대하지 않고 귀향키로 했다. 귀향은 간단했다. 신체검사에 불합격하면 되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색맹조사표를 읽지 못하여 불합격을 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대학을 마친후 다시 사병으로 자원입대하여 육군 제3516부대에 복무하게 되었던 것이다. 3516이라는 타이틀은 이 부대가 516이 난지 3년후에 재출범하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친구 주염돈은 그냥 통역장교로 입대하겠다고 하여 들어가 소위 계급장을 달고 연대에서 통역은 커녕 다른 장교들의 심부름이나 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몇년후 의도적 제대를 하여 늦게나마 대학을 졸업하였다.

 

친구 주염돈-이연주 부부

 

논산훈련소에 갔다 온 사람들은 살아 있는한 논산을 향하여 소변도 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만큼 논산훈련소라면 지긋지긋했던 것이다. 나는 4월에 입대하였다. 그래도 훈련소의 날씨는 무척 더워서 날마다 갈증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28사단 1대대 1중대 1소대 1분대 1번이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하면 우리 내무반에 대학 졸업자가 나밖에 없어서 당연히 향도를 맡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군번은 와리바시 군번이어서 10원짜리 군번을 갖 지나 11로 시작되는 것이었다. 논산훈련소의 모기는 유명하다. 군대 모포도 뚫고 들어온다는 모기이다. 확실히 다른 지방 모기보다 덩치가 큰 것 같았다. 여름철에 훈련을 받아야 하는 우리 신병들은 낮이건 밤이건 모기 때문에 군사훈련보다 더 심한 고생을 해야 했다. 논산훈련소에 대한 얘기는 끝이 없으므로 이만 끝내기로 한다.  다만, 하루는 주일에 논산훈련소 소본부 교회를 다른 훈병들과 함께 열을 지어 갔었는데 찬송을 부르면서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혼난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전반기를 마친 나는 배출대에서 며칠을 지내다가 육군 제3516 부대에 배속되어 기차를 타고 영등포까지 와서 제6보충대에서 하루를 지낸후 부대에서 보낸 스리쿼터 트럭을 타고 한남동 부대에 도착하여 신병 생활을 시작하였고 제대할 때까지 같은 부대에서 지냈다. 제대 특명을 받아 놓고서 마침 김신조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제대가 늦어진 것은 사족이다.

 

군대 친구들 

 

박 신

박형규

유경하 

김명중  

김길용 

한동현 

이문치  

이종민

  

2010년 4월 15일 경희궁에서. 왼쪽부터 유경하, 김명중, 이문치, 김용은, 박형규, 정준극. 김용은은 제대후 농진청에서 근무했다. 실은 우리들보다 선배여서 그동안 참여하지 못했다.  

2010년 9월 6일 청와대 앞 무궁화동산에서(왼쪽으로부터 이문치, 박 신, 박형규, 한동현)

 

2011년 1월 21일 신문로의 어떤 식당에서(좌로부터 이종민, 유경하, 박형규, 박신, 한동현, 김명중, 정준극). 산행을 떠난 이문치와 공사다망한 김길룡이 빠졌다. 도합 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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