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컬 뮤직 팟푸리/오페라와 영화

세기의 스타 데아나 더빈

정준극 2008. 8. 30. 18:23

세기의 스타 데아나 더빈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인 데아나 더빈(Deanna Durbin)은 1921년 12월 4일 캐나다 마니토바(Manitoba) 주의 위니펙(Winnipeg)에서 태어났다. 당시만 하더라도 위니펙은 무척 춥기만 한 작은 도시였다. 데아나 더빈(어릴 때 이름은 Edna Mae Durbin)의 부모인 제임스와 에이다(Ada) 더빈은 영국 랜카셔(Lancashire)에서 캐나다로 이민 온 사람들이었다.

 


데아나 더빈은 1936년부터 1948년에 이르기까지 12년 동안 무려 22편의 음악영화에 주역으로 출연했다. 데아나 더빈은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천사의 음성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데아나 더빈이 출연한 영화는 나오는 대로 대히트였다. 데아나 더빈은 영화에서 여러 노래를 부르지만 오페라 아리아를 부른 영화는 다음과 같다.


- one Hundred Men and a Girl (1937. Verdi - 축배의 노래. Mozart - Allelujah. 우리나라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소녀’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보스턴 교향악단의레오폴드 스토크브스키가 직접 출연하여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 That Certain Age (1938. Gounod- Juliet의 왈츠- Romero et Juliet)

- First Love (1939. Puccini - one Fine Day: Madama Butterfly)

- It's a Date (1940. Puccini - Musetta의 왈츠: La Boheme)

- The Amazing Mrs. Holiday (1943. Puccini - Vissi d'Arte, Vissi d'Amor: Tosca)

- Hers to Hold (1943. Bizet - Seguidilla: Carmen)

- His Butler's Sister (1943. Puccini - Nessum Dorma: Turandot)

- Up in Central Park (1948. Verdi - Pace, Pace Mio Dio)

- For the Love of May (1948. Rossini - Largo al Factum: 소프라노가 바리톤 아리아를 불렀다.)

 

세명의 스마트한 아가씨들(Three Smart Girls) - 가운데가 데아나 더빈


더빈은 1935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MGM과 영화출연 계약을 맺었다. 처음 출연키로 한 영화는 Every Sunday(에브리 선데이)였다. MGM은 역시 아역배우로서 천부적인 재질을 가지고 있는 주디 갈란드(July Garland)와도 공동계약을 맺었다. MGM은 오디션을 통해 두 사람중 한사람을 Every Sunday의 주역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제작자는 두 사람이 모두 뛰어난 재능이 있으므로 함께 출연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더빈으로서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당시 더빈은 아직 데아나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어릴 때 그대로의 이름인 에드나를 사용하였다. 다행히 Every Sunday라는 영화는 단편이었다. MGM은 더빈과 갈란드가 함께 출연하는 영화를 다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영화제작은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시간만 지나가서 해가 바뀌었다. 그러는 사이에 더빈과 맺은 계약기간이 만료되었다. 마침 그때에 라이프(Life)잡지가 1936년 12월 호에 더빈이 14세 생일 케이크를 자르는 사진을 게재하고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였다고 선전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Universal Studios)가 재빨리 더빈과 영화출연계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첫 장편영화인 Three Smart Girls가 완성되었다. 대성공이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하면 더빈이 주역으로 나온 Three Smart Girls에 대한 얘기로 시간 가는지를 몰랐다. 당시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파산지경이었으나 더빈의 Three Smart Girls로 파산을 면하게 되었다. 1938년 더빈은 천재 아역배우인 미키 루니(Micky Rooney)와 함께 아카데미아역상을 받았다. 더빈에 대한 인기는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2차대전중 안네 프랑크는 비록 나치를 피하여 숨어서 지내야하는 다락방이었지만 데아나 더빈의 사진을 구하여 벽에 붙여 놓고 우상처럼 여겼다고 한다. 그때 붙여 놓았던 데아나 더빈의 사진은 지금은 기념관이 된 안네 프랑크의 다락방에 붙여 있다. 나중에 영화감독이 된 안네의 친구 한나 피크-고슬라(Hannah Pick-Goslar)가 만든 Anne Frank Remembered라는 영화에도 안네 프랑크의 방의 벽에 붙어 있는 데아나 더빈의 사진이 나온다.

 

            

'오케스트라의 소녀' 포스터             데아나 더빈 기념품 콜렉션                   데아나 더빈


더빈은 영화배우로서보다는 소프라노로서 더욱 빛나는 진가를 보여주었다. 더빈의 음성은 경쾌하면서도 풍부하며 감미롭고 티없이 맑으며 꾸밈이 없고 소박하다는 평을 받았다. 더빈의 소프라노 음역은 매우 폭이 넓었다. 더빈은 진정한 리릭 소프라노이지만 구체적으로는 리릭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다. 더빈은 대중적인 노래로부터 오페라 아리아에 이르기까지 어떤 소프라노 노래를 소화할수 있었다. 뉴질랜드의 유명한 성악 교사인 메리 레오(Mary Loe) 여사는 더빈의 노래에 너무나 감동하여서 이후로는 제자들에게 더빈처럼 노래를 부르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수녀인 메리 레오는 영국 왕실로부터 귀부인(Dame)의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메리 레오가 그렇게 키워낸 세계적인 성악가로서는 말비나 메이저(Malvina Major), 키리 테 카나와(Kiri Te Kanawa) 등이 있다. 메이저와 테 카나와는 모두 영국 왕실로부터 귀부인(Dame)의 작위를 받았다. 그러므로 성장한 더빈의 음성을 듣고 싶으면 키리 테 카나와의 노래를 들으면 된다.


데아나 더빈은 1941년 배우인 본 폴(Vaughn Paul)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1943년 이혼하였다. 두 번째 남편은 영화제작가인 펠릭스 잭슨(Felix Jackson)이었다. 1945년에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딸을 하나 두었다. 두 사람은 1949년 이혼하였다. 이후 더빈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혼자 지냈다. 가십 칼럼니스트인 헤다 호퍼(Hedda Hopper)는 더빈이 영화배우 조셉 코튼(Joseph Cotten)과 스캔들이 있었다고 썼다. 나중에 조셉 코튼은 그의 자서전에서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고 술회하였다. 헤다 호퍼가 그런 소문을 퍼트린 배경은 더빈과 조셉 코튼이 그 전날 밤에 영화촬영 스튜디오에서 밤새도록 함께 지냈다는 제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은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방에서 일 때문에 밤을 지샜던 것이다. 두 사람은 아침이 되어 슈퍼에 갔다가 우연히 만났는데 신문에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대경실색하였다. 조셉 코튼은 너무 화가 나서 당장 헤다 호퍼의 사무실로 뛰어 올라가 호퍼가 앉아 있는 의자를 뒤에서 잡아당겨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덕분에 호퍼는 엉덩방아를 아주 크게 찌었다. 조셉 코튼이 헤다 호퍼를 엉덩방아를 찧게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깨소금보다 더 고소해 하며 ‘와우!’라고 소리쳤다. 헤다 호퍼는 남에 대한 가십이나 파고드는 여자 칼럼니스트였다.     


더빈은 데아나 더빈이라는 예명으로 전세계를 사로잡았지만 실생활에 있어서는 어릴 때의 이름인 에드나 매 더빈(Edna Mae Durbin)을 줄곧 사용하였다. 어느 때에는 할리우드에서 더빈에게 출연료를 지급할 때에 신참 회계직원이 명세서에 적혀 있는 ‘에드나 매 더빈’이 누구인지 몰라 출연료를 지급하지 못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데아나 더빈은 모두 22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중에는 자기가 직접 제작한 영화도 있다. 1944년에 만든 Can't Help Singing이라는 타이틀의 영화가 첫번째였다. 유명한 작곡가 제롬 컨(Jerome Kern)이 작곡한 노래가 몇편 등장하는 서부시대 배경의 뮤지컬 코미디이다. 유타주에서 로케이션했다. 나중에 어떤 TV가 이 영화의 타이틀인 Can't Help Singing을 따서 시리즈 드라마를 만들었다. TV 연속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더빈과 함께 Can't Help Singing에서 더빈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로버트 페이지(Robert Paige)였다. 영화제작자가 된 더빈은 자기가 주연하는 두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다. 1944년의 Christmas Holiday와 1945년의 Lady on a Train이었다. 두편 모두 이른바 필름 누아(Film Noir)였다. 말하자면 심각한 내용의 영화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더빈의 경쾌한 음악영화를 좋아했다.


1947년 더빈이 속하여있던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다른 영화회사와 합병되어 유니버설 인터내셔널이 되었다. 새로 출발한 회사는 과거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만들어냈던 뮤지컬, 웨스턴, 코미디 등 인기 영화들을 더 이상 제작치 않기로 방침을 세웠다. 더빈은 회사가 합병되기 이전부터 세편의 영화제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더빈은 세편의 영화를 완성하지 못한채 1948년 새로 출발한 유니버설 인터내셔널을 그만두었다. 유니버설 인터내셔널은 더빈이 계약을 위반했다고 하면 손해배상청구를 하였다. 더빈은 이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였다. 즉, 새로운 회사가 더빈이 지금까지 진행해온 세편의 영화를 완성토록 하며 이어 더빈이 주역으로 출연하는 3편의 영화를 새로 만들도록 합의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온 영화가 1948년의 Up in Central Park와 For the Love of Mary, 그리고 1949년의 Love is All이었다. 마지막 영화는 파리에서 로케이션을 하게되었다. 파리에 간 더빈은 Love is All의 감독인 찰스 데이빗(Charles David)과 결혼하였다. 얼마후 더빈은 아들을 낳았다. 피터 데이빗이었다. 더빈은 아기 때문에 파리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후 헐리우드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이로써 유니버설 인터내셔널과 제작키로 약속한 세편의 새로운 영화는 나오지 못했다.


파리에 있는 동안 더빈은 미국의 영화회사들로부터 여러번의 영화출연을 요청받았다. 그중 몇편은 마리오 란자(Mario Lanza)와 함께 출연하는 영화로 계획된 것이다. 하지만 더빈은 누구도 만나지 않으며 조용한 은둔생활을 하였다. 더빈이 파리에서 살기 시작한 후 가진 유일한 행사는 1983년 영화사 연구가인 데이빗 쉽맨(David Shipman)과 가진 간단히 인터뷰뿐이었다. 남편 찰스 데이빗은 1999년 세상을 떠났다. 더빈은 파리 근교에서 지극히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다가 2013년 4월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였다. 데아나 더빈의 이름은 할리우드의 바인 스트리트(Vine Street) 1722번지 앞  로에 스타로서의 기념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데아나 더빈은 마리오 란자와 같은 해인 1921년에 태어났다.

 

세기의 연인 데아나 더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