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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테너 마리오 란자

정준극 2008. 8. 30. 18:25

세기의 테너 마리오 란자


마리오 란자(Mario Lanza)는 1940년대와 50년대에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던 헐리우드의 배우이며 위대한 테너였다. 마리오 란자는 1921년 1월 31일 태어나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1959년 10월 7일 세상을 떠났다. 세계적 영화배우이며 소프라노인 데아나 더빈이 마리오 란자와 같은 해인 1921년 태어난 것은 뜻 깊은 일이다. 마리오 란자는 리릭테너이다. 마리오 란자가 필적할 테너는 아마 엔리코 카루소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마리오 란자가 1951년에 엔리코 카루소의 일생을 그린 The Great Caruso라는 영화에서 카루소의 역할을 맡은 것은 기념비적인 일이다. 마리오 란자는 대단히 폭넓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오페라 아리아로부터 대중적인 노래에 이르기까지 어떤 노래든지 감미롭게 또는 드라마틱하게 소화할수 있었다. 마리오 란자는 테너의 왕자라는 별명을 들었다.

 

 

필라델피아의 이탈리아 이민가정에서 태어난 마리오 란자는 어릴 때부터 둘째 가라고하면 서러울 정도로 노래를 잘 불렀다. 원래 그의 이름은 알프레도 아놀드 코코짜(Alfredo Arnold Cocozza)였다. 그리하여 마리오 란자는 이미 10대 중반에 기성 성악가들 뺨칠 정도의 완벽한 테너가 되었다. 마리오 란자가 오페라 생활을 하기 시작한 것은 16세 때부터였다. 필라델피아의 어떤 작운 오페라단에 끼어 들어가 무대에 서기 시작한 것이다. 지휘자 세르게 쿠쎄비츠키(Serge Koussevitzky)가 마리오 란자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고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쿠쎄비츠키는 어린 코코짜(마리오 란자)에게 매사추세츠의 탱글우드에 있는 버크셔음악센터(Berkshire Music Center)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나중에 쿠쎄비츠키는 마리오 란자에게 ‘여보게, 자네 목소리는 정말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대단한 것이야!’라며 감탄했다.

 

나비부인에서 캐스린 그레이슨과 함께


탱글우드에서 마리오 란자는 지휘자 레오나드 번슈타인(Leonard Bernstein)과 보리스 골도브스키(Boris Goldovsky)로부터 오페라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마리오 란자가 오페라에 정식으로 데뷔한 것은 1942년 여름 탱글우드에서 공연된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오토 니콜라이)에서였다. 마리오 란자는 펜튼(Fenton)을 맡았다. 이 공연부터 청년 알프레도 아놀드 코코짜는 마리오 란자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마리오 란자라는 이름은 어머니의 결혼전 이름인 마리아 란자의 남성형이다. 당시 그는 21세였다. 마리오 란자의 오페라 데뷔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뉴욕타임스의 노엘 슈트라우스(Noel Straus)라는 음악전문기자는 마리오 란자에 대하여 ‘우리 시대에 이만한 테너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음성은 따듯하고 힘이 있으며 우수하다’라고 하며 찬사를 보냈다.

 

캐스린 그레이슨과 공연한 영화 '뉴올리언스의 토스트'의 장면


마리오 란자의 오페라 활동은 2차대전으로 잠시 중단되지 않을수 없었다. 군대에 입대한 마리오 란자는 미공군 특수부대에 배속되었다. 마리오 란자는 Winged Victory와 같은 공군 정훈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장병들을 위문하고 격려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본업에 복귀하였다. 그는 1945년 10월부터 CBS 라디오의 ‘음악의 위대한 순간’(Great Moments in Music)이라는 프로그램에 고정출연하여 여러 오페라 아리아들을 불렀다. 마리오 란자는 1947년 7월부터 1948년 5월까지 미국과 캐나다와 멕시코의 86개 도시를 순회하는 콘서트에 참여하였다. 이때 함께 무대에 섰던 성악가는 유명한 조지 런던(George London), 프란시스 옌드(Frances Yeend)등이었다. 첫 공연으로 1947년 7월 시카고의 그랜드 파크에서 야외연주회를 가졌을 때 시카고 선데이 트리뷴(Chicago Sunday Tribune)의 저명한 음악전문기자인 클라우디아 캐씨디(Claudia Cassidy)는 마리오 란자에 대하여 ‘하늘이 내린 놀라운 테너’(Superbly natural tenor)라고 격찬하고 ‘그는 노래의 의미를 청중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오페라가 음악 드라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였다.

 

영화 '위대한 카루소'에서 오페라 팔리아치의 아리아 '의상을 입어라'를 부르는 마리오 란자

 

1948년 4월 마리오 란자는 뉴올리언스오페라단의 공연인 ‘나비부인’에서 핀커튼(Pinkerton)을 맡았다. 세인트루이스뉴스지는 ‘완벽한 역할이었다. 마리오 란자는 핀커튼 대위로서의 의무를 열정으로 완벽하게 소화하였다. 이만한 로맨틱 테너는 일찍이 찾아볼수 없었다. 그의 놀랍도록 아름다운 음성은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이다’라고 썼다. ‘나비부인’에서 성공한 그는 이듬해 뉴올리언스의 초청을 다시 받아 이번에는 알프레도(라 트라비아타)를 맡아 또한번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이때쯤 마리오 란자오페라 무대보다는 영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할리우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947년 여름, 마리오 란자는 할리우드 보울(Hollywood Bowl)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MGM의 루이스 마이어(Louis Mayer)가 마리오 란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데아나 더빈과 주디 갈란드를 스카웃했던 제작자였다. 마리오 란자는 MGM과 7년간의 영화출연 계약을 맺었다. 젊은 테너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마리오 란자는 곧이어 두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미드나이트 키쓰’(That Midnight Kiss)와 ‘뉴올리언스의 토스트’(The Toast of New Orleans: 토스트는 유명인사  또는 명성 높은 미인을 말한다)였다. 대성공이었다. 이 영화에서 마리오 란자는 소프라노 캐스린 그레이슨(Kathryn Grayson)과 함께 ‘나비부인’의 역할을 맡아 관중들을 열광케 했다. 1949년 5월, 그는 RCA 빅터 레코드와 처음으로 음반을 취입하였다. 마리오 란자의 레코드는 영화에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대히트를 하였다.   


마리오 란자는 1951년 ‘위대한 카루소’(The Great Caruso)에서 카루소의 역할을 맡았다. 놀라운 성공이었다. 이 영화는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대단한 클래식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1952년 마리오 란자는 또 하나의 MGM 영화인 ‘황태자의 첫사랑’(The Student Prince)에 출연키로 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마리오 란자는 영화에 나오는 노래들을 모두 미리 녹음했다. 그러나 영화가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MGM 측은 돌연 마리오 란자와의 계약을 취소하고 그를 MGM에서 해임하였다. 나중에 알려진 이유인즉, 마리오 란자의 몸이 너무 비대해져서 젊은 왕자의 제복을 도저히 입을수 없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출연할수 없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리오 란자의 자서전을 집필한 작가들은 감독과 마리오 란자와의 불화 때문에 마리오 란자가 ‘황태자의 첫사랑’에 출연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자서전 집필자들은 당시 마리오 란자의 체구는 그다지 비대한 것이 아니어서 황태자의 의상을 충분히 소화할수 있다고 설명했다. 마리오 란자와 감독간의 의견충돌은 다름 아니라 마리오 란자가 세트에서 걸어 나가면서 한곡을 부르고자 했던 것을 감독이 필요없다고 커트해 버렸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마리오 란자는 세트에서 걸어나가면서 부르는 노래를 이미 녹음까지 마친 상태였다. 이탈리아 출신답게 욱하고 흥분한 마리오 란자는 MGM측에 감독 커티스 베른하르트(Curtis Bernhardt)를 교체하라고 요구했다.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핀커튼 역을 맡은 마리오 란자


하지만 MGM은 그같은 요구를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감독의 제안대로 미남배우 에드먼드 퍼돔(Edmund Purdom)를 기용하여 영화를 촬영했다. 에드먼드 퍼돔은 영화에서 립싱크로 마리오 란자가 녹음해 두었던 노래들을 불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황태자의 첫사랑’의 촬영도중 감독 커티스 베른하르트는 사정상 물러나고 대신 리챠드 소프(Richard Thorpe)가 감독이 되어 영화를 완성했다. 리챠드 소프는 The Great Caruso를 감독한 사람으로 마리오 란자가 커니스 베른하르트 감독을 대신할 인물로 강력히 추천했던 사람이었다. 그건 그렇고 뚱뚱해 졌다고 해서 영화에 출연하지 못하게 된 마리오 란자는 낙담 경 자존심이 상해서 그후 거의 1년동안 공식활동을 하지 않고 술만 마셨다. 그는 또한 이기간에 전에 매니저로 일했던 사람이 마리오 란자의 돈을 잘못 투자하는 바람에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마리오 란자는 낭비벽이 심하여 그 많은 돈이 남아나지 않게 되었고 결국 25만불이라는 거금을 부채로 안게 되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마리오 란자는 1955년 영화에 복귀하여 Serenade에서 주역을 맡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종전의 영화에 비하여 지나치게 음악적이어서 대중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1957년 5월 마리오 란자는 로마로 자리를 옮겨 Seven Hills of Rome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였고 그후에는 영국, 아일랜드, 독일, 프랑스 등을 방문하여 콘서트를 가졌다. 하지만 마리오 란자는 건강이 점점 악화되는 바람에 여러번의 콘서트를 갑자기 취소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마리오 란자는 마지막 정열을 음반 취입에 쏟기로 결심했다. 그는 사람들이 오래도록 기억할수 있는 것은 음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958년부터 일련의 음반 취입을 시작했다. 로마 오페라하우스에서의 오페라 레코딩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로마 오페라하우스에서의 공연장면 일부는 나중에 그의 마지막 영화인 For the First Time(첫사랑)에 활용되었다. 영화가 성공하자 마리오 란자의 명성은 다시 올라갔다. 로마 오페라하우스, 밀라노의 라 스칼라, 나폴리의 산카를로에서 오페라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마리오 란자는 우선 1960/61년 시즌에 로마 오페라의 팔리아치(Pagliacci)에 출연하여 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테너로서 그의 건강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마리오 란자는 정맥염과 급성고혈압으로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오 란자는 옛 버릇인 과식과 과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59년 4월, 마리오 란자는 일종의 심장마비 증세를 보였다. 그러다가 8월에는 양쪽 폐렴으로 고통을 받았다. 결국 그해 10월 7일, 세기의 테너 마리오 란자는 로마에서 38세라는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장례식에는 소프라노 마리아 카닐리아(Maria Caniglia)등이 참석하였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조전만 보냈다. 미망인인 베티(Betty)는 네 자녀(2남 2녀)와 함께 할리우드로 돌아왔다. 그러나 베티도 5개월후에 3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호흡기질환에 의한 질식사였다. 1991년 둘째 아들인 마르크(Marc)가 심장마비로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97년에는 큰딸 콜린(Coleen)이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큰아들 데이몬(Damon)은 2008년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마리오 란자는 비록 38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으며 15년 남짓의 예술활동을 했지만 그의 경력은 오페라, 라디오, 콘서트, 음반취입, 그리고 영화를 망라하는 폭넓은 것이었다. 마리오 란자는 최초로 RCA 빅터 레코드의 골드 디스크 상을 받은 성악가이다. 마리오 란자의 음악성은 여러 후진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마리오 란자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테너들은 플라치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 레오 누치(Leo Nucci) 등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도 마리오 란자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94년 호세 카레라스는 마리오 란자를 추모하여 세계순회연주회를 가졌다. 호세 카레라스는 ‘내가 오페라 테너라면 그것은 마리오 란자에게 감사할 일이다’라고 말했다.

        

마리오 란자는 8편의 할리우드 영화에 주역으로 출연하였다. 그는 이들 영화에 출연하면서 수많은 오페라 아리아와 예술가곡, 민요등을 불러 음악에 대한 일반대중의 관심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주역으로 출연한 영화는 다음과 같다.


The Midnight Kiss (1949. Kathryn Grayson과 공연)

The Toast of New Orleans (1950. Kathryn Grayson, David Niven 과 공연)

The Great Caruso (1951. Ann Blyth와 공연)

Because You're Mine (1952. Doretta Morrow, James Whitmore와 공연)

The Student Prince (1953. 직접 출연하지는 않고 노래만 불렀음)

Serenade (1956. Joan Fontaine과 공연)

The Seven Hills of Rome (1957. Peggy Castle과 공연)

For the First Time (1959. Zsa Zsa Gabor와 공연)

 


영화 ‘위대한 카루소’(The Great Caruso)

마리오 란자는 엔리코 카루소를 가장 존경하였다. 마리오 란자와 엔리코 카루소는 같은 이탈리아 사람들이다. 카루소는 란자보다 48년 먼저 태어났다. 영화 ‘위대한 카루소’(The Great Caruso)는 카루소의 생애를 담은 작품이다. 마리오 란자는 카루소 역할을 맡게 되어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위대한 카루소’는 1951년 봄에 개봉되었다. 마리오 란자의 상대역은 미모의 뮤지컬 배우인 앤 블라이스(Ann Blyth)였다. 이 영화에는 당대의 소프라노 도로시 키르스텐(Dorothy Kirsten)과 바리톤 칼 벤튼 리드(Carl Benton Reid)가 출연하여 마리오 란자와 함께 오페라 아리아들을 부른다. 이밖에도 메트로폴리탄의 오페라 성악가들인 자밀라 노보트나(Jarmila Novotna), 블랑세 테봄(Blanche Thebom), 테레사 첼리(Teresa Celli), 니콜라 모스코나(Nicola Moscona), 주세페 발덴고(Giuseppe Valdengo), 루신 아마라(Lucine Amara), 마리아나 코세츠(Mariana Koshetz) 등이 등장한다. 이 영화에는 베르디, 푸치니, 레온카발로 등의 오페라 아리아가 등장한다. 감독은 ‘황태자의 첫사랑’을 완성한 리챠드 소프(Richard Thorpe)였다.


영화 ‘위대한 카루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50년대 말에 상영되었다. 대성공의 열쇠는 마리오 란자였다. 뉴스위크는 ‘마리오 란자가 불멸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를 그대로 재현하였다’고 찬사를 보냈다. 이 영화를 본 플라치도 도밍고와 호세 카레라스는 카루소 또는 란자와 같은 위대한 테너가 되려는 결심을 했다.

 

'위대한 카루소'에서 오텔로 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