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1일 투어

비엔나의 영혼 슈테판성당(Stephansdom)

정준극 2008. 11. 21. 19:40

비엔나의 영혼

 

하늘에서 본 슈테판대성당

                               

비엔나의 국립오페라극장(슈타츠오퍼: Staatsoper)을 비엔나의 맥박을 뛰게 하는 심장이라고 한다면 슈테판성당(슈테판스돔: Stephansdom)은 비엔나의 존재가치를 알게 해주는 영혼이다. 비엔나의 첫날은 슈테판스돔을 방문하여 그 장엄함에 감탄하는 일정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슈테판스돔(또는 성슈테판대성당)은 영욕이 점철된 천년 비엔나의 역사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이다. 실로 슈테판성당은 비엔나 수백년의 역사와 운명을 함께 하여왔다. 슈테판성당은 바벤버그 왕조와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화를 지켜보았다. 슈테판성당은 페스트의 처참함과 터키의 두 차례에 걸친 공성,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과 1차대전과 2차대전의 참화를 경험하였다. 슈테판성당은 비엔나의 살아 있는 역사이다. 슈테판성당은 비엔나 시내의 가장 중심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슈테판성당을 중심으로 비엔나의 구시가지가 사방으로 펼쳐있다. 슈테판성당 앞의 슈테판스플라츠(슈테판 광장)는 비엔나의 '만남의 장소'이다. 밤이나 낮이나 인파로 붐빈다. 슈테판성당이 1147년 처음 세워졌을 때에는 비엔나 성벽 밖에 있었기 때문에 비엔나의 중심으로서의 역할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18년후인 1155년에 비엔나 시내가 현재의 1구 인네레 슈타트를 중심으로 재정비되자 슈테판성당은 비로소 비엔나의 센터(첸트룸: Zentrum) 중의 센터에 자리 잡게 되었다. 슈테판성당을 찾아간다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보물 창고를 찾아가는 것과 같다. 숱한 비밀들을 간직한 보물창고이다.


슈테판대성당의 회랑. 온갖 조각과 성화로 장식되어 있다.

 

고틱양식의 슈테판성당은 건축 예술의 정수이며 각종 건축 예술의 전시장이다. 1147년에 초석을 놓을 때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시작하였다. 슈테판성당의 가장 오래된 부분인 '거인의 문'(리젠토르: Riesentor)과 '이교도의 탑'(하이덴튀르메: Heindentürme)은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거인의 문'은 13세기에 만들어 졌으니 오래 되기는 오래 되었다. '거인의 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15세기에 그곳을 파헤치다가 거대한 맘모스 뼈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슈테판성당이 본당 회중석(Nave)과 두개의 측랑을 만들기 위해 기초를 놓은 것은 1359년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4세 대공때였다. 이로써 슈테판성당은 웅장한 모습을 나타내보이기 시작했다.

 

비엔나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슈테판성당. 왼쪽의 돔은 칼스키르헤

 

슈테판성당에는 남탑과 북탑이 있다.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남탑은 비엔나의 사방 어디서나 볼수 있을 정도로 높다. 비엔나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이다. 누구둔지 시내에서 방향을 잃으면 슈테판성당의 남탑을 보고 찾으면 된다. 슈테판성당은 마치 등대와 같다. 비엔나 시민들의 마음의 등대이다. 비엔나 사람들은 멀리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슈테판성당을 보고 이제야 비로소 집에 돌아온듯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 비엔나 시민들은 슈테판성당의 남탑을 슈테플(Steffl: Old Steve)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사랑하고 있다. 시내 중심지역에 유일하게 있는 백화점인 캐른트너슈트라쎄의 슈테플은 슈테판성당 남탑의 애칭을 사용한 것이다. 남탑(쥐드투름: Südturm)은 1433년에 완성되었다. 높이가 137 미터이며 중부 유럽에서는 독일의 울름대성당과 쾰른대성당에 이어 가장 높은 교회탑이다.1359년 루돌프 4세 대공이 본당 회중석을 만들 때에 함께 착공되었다. 남탑은 거장 한스 프라하티츠(Hans Prachatiz)가 완성했다. 북탑(노르드투름: Nordturm)은 '독수리탑'(아들러투름: Adlerturm)이라고도 부른다. 남탑보다 훨씬 후인 1467년에 착공되었다. 그러다가 1511년에 공사를 중단했다. 고딕 양식을 르네상스 양식으로 변경하느라고 그랬다. 르네상스 돔인 8각형의 탑상단을 완성한 것은 1556-79년이었다.

 

슈테판스돔의 위용

 

북탑에는 푸메린(Pumerin)이라고 부르는 20톤 무게의 종이 설치되어 있다. 푸메린이라는 말은 '뎅~ 울리는 소리'라는 뜻이다. 커다란 종이 울릴때 나는 소리가 품(Pum: 영어로는 붐: Boom)이기 때문에 그런 연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푸메린은 1683년 터키의 2차 비엔나 공성 때에 터키군이 퇴각할 때 남긴 대포알 100여개를 녹여서 만들었다고 한다. 푸메린은 일반적으로 1년에 한번,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에 울린다. 비엔나의 모든 시민들에게 새해가 오는 기쁨을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국가적으로 특별히 경축하거나 애도할 일이 있을 때에도 울린다. 예를 들면 2011년 7월, 합스부르크 최후의 황태자인 오토의 장례식 때에 울렸다. 슈테판성당은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이 가미되었다. 중앙 제단이 대표적이다. 중앙제단은 토비아스와 요한 포크 형제가 완성했다. 제단 중앙의 성화는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 성슈테판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와 함께 중앙제단의 양 옆에는 네 명의 성자들, 즉 성레오폴드, 성플로리안, 성세바스티안, 성로후스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그 위에는 성모상이 있어서 이 모든 성자상들을 위엄있게 제압하고 있다. 중앙제단에는 다섯개의 커다란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이 제단을 병풍처럼 감싸듯 설치되어 있다. 각 유리창에는 성안나에 대한 수태고지 등 성자들에 대한 그림, 그리고 슈테판성당의 건축에 대한 그림, 그리고 합스부르크  군주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그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들을 '합스부르크 창문들'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보헤미아의 루돌프 1세 왕,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 2세 공작, 루돌프 4세 공작, 오토 공작, 레오폴드 1세 공작, 프레데릭 1세 왕, 알베르트 1세 왕, 루돌프 1세 왕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중앙제단으로부터 왼쪽에 있는 제단은 비너 노이슈타트 제단(Wiener Neustadt Altar)라고 부른다. 프레데릭 3세 황제의 지시에 의해 1447년에 만들어진 제단이다. 중앙제단의 옆 쪽에 프레데릭 3세의 석관이 놓여 있다.

 

슈테판성당의 본당 회중석과 중앙 제단의 위용

 

슈테판성당에는 여러 성화(이콘)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아마 마리아 포츄(Maria Potsch)의 성화일 것이다.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린 것이다. 비잔틴 양식으로 그려진 이 성화는 성모가 아기 예수에게 그가 걸어가야 할 고난과 영광의 길을 지적해 주는 듯한 모습을 그린 것이다. 아기 예수는 세 송이의 장미꽃을 들고 있다. 성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슈테판성당은 지붕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참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디자인이다. 전에는 평범한 지붕이었으나 2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52년에 현재의 기하학적 디자인의 지붕을 완성했다. 모두 25만개의 타일이 소요되었다. 슈테판성당의 길이는 107 미터이며 넓이는 40 미터이고 높이는 136 미터이다. 원래의 성당 외벽은 하얀 색이었으나 공해로 인하여 검게 오염되었다. 성당 당국은 비엔나 시의 협조를 얻어 오염을 제거하는 작업을 착실하게 계속 수행하고 있다.

 

비엔나에서 가장 번화한 슈테판성당 광장(슈테판스플라츠)

 

슈테판성당은 모차르트가 결혼식을 올렸고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장례 미사가 올려진 곳이다. 또 모차르트의 아이들이 태어나면 세례를 받은 곳이다. 그런가 하면 하이든과 슈베르트가 소년시절 성가대원으로 활약한 곳이기도하다. 슈테판성당의 카타콤에는 1만 1천명에 해당하는 유골들이 안치되어 있다. 그보다도 슈테판성당의 카타콤이 유명한 것은 카타콤의 한 편에 합스부르크 왕조 인물들의 내장들이 귀중하게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장영묘이다. 그곳을 '대공의 묘소'(Tomb of the Duke)라고 부른다. 내장영묘가 처음 시작된 것은 오스트리아가 대공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왕실의 관례에 따르면 왕족 중의 누가 세상을 떠나면 심장은 아우구스틴 교회에 보관하며 내장은 슈테판성당에 보관하고 시신은 관에 넣어 카푸친교회 지하의 황실영묘(제국납골당: Kaisergruft)에 보관하게 되어 있다.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내장도, 아름다운 왕비 엘리자베트(씨씨)의 내장도 슈테판성당의 지하 카타콤에 있는 작은 항아리에 보관되어 있다. 슈테판성당에는 오스트리아의 영웅인 사보이의 오이겐(Eugen) 공자의 묘소도 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의 프레데릭 3세(1452-1493)와 루돌프 4세의 석관도 있다. 그런데 루돌프 4세와 왕비의 석관에는 그들의 모습이 겉에 조각만 되어 있고 안은 비어 있다. 프레데릭 3세의 웅장한 석관은 거장 니클라에스 게르하르트 반 레이덴(1467-1513)이 붉은색 대리석을 사용하여 만든 것이다.

 

비엔나의 영혼(정신) 슈테판대성당(슈테판스돔)

 

슈테판성당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여러번 재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복구에 전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유지될수 있었다. 2차 대전 중에 가장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2차대전이 막바지일 때 비엔나 시가지는 나치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동쪽으로 다뉴브강의 둔덕에는 러시아군을 중심으로한 연합군이 공격 진지를 구축하고 비엔나 탈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독일군 사령관은 퇴각하면서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슈테판성당을 대포로 쏘아 완전히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하게도 그 명령을 받은 게르하르트 클린키히트(Gerhard Klinkicht)라는 대위가 명령을 거부했다. 그렇게하여 슈테판성당은 파괴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수 있었다. 시내 한 가운데 우뚝 서있는 슈테판성당은 소련군의 직접적인 포격망 안에 들어가 있었다. 소련군은 슈테판성당이 비엔나의 센터이므로 이를 목표로 삼고 그 주변을 무작정으로 포격하였다. 슈테판성당 인근에도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성당 옆 건물이 직격탄을 맞아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불길은 바람과 함께 슈테판성당으로 옮겨왔다. 슈테판성당은 꼬박 이틀동안 불길에 휩싸였고 지붕이 무너지는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성당 내부는 크게 피해를 입지 않았다. 비엔나 시민들은 슈테판성당이 포화로 인하여 불길에 싸이고 파괴되고 있는 모습을 보자 포화의 위험 속에서도 불을 끄기 위해 너도 나도 몰려 나왔다. 불길이 잡히자 시민들은 잿더미 속에서 부서진 벽돌 한장 한장, 깨진 조각상 한 조각 한 조각을 소중하게 찾아서 간직하였다. 언젠가 복구될 때에 다시 사용될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슈테판성당에 대한 복구가 시작되자 시민들은 그동안 간직하였던 성당의 잔해들을 들고 나왔다. 슈테판성당은 비엔나 시민들의 영혼이기 때문에 다른 어느 것보다도 먼저 살려야 했다.

 

테판성당 인근에 있는 슈테플 백화점 (비엔나의 명동인 캐른트너슈트라쎄에 있다). 슈테플은 슈테판성당의 남탑의 애칭이다. 비엔나에는 서울처럼 대형 백화점들이 없다. 있다고 한다면 마리아힐르프의 게른그로스 정도일 것이다. 캐른트너슈트라쎄의 슈테플도 백화점이긴 하지만 규모가 작다. 지하층에 식품관이나 식당가도 없다.

 

슈테판성당은 아침 6시부터 문을 열고 밤 10시에 문을 닫는다. 비엔나에서 이만큼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관람할수 있는 곳은 슈테판성당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아침 6시에 들어가서 밤 10시에 나와도 된다. 더운 여름에는 시원해서 좋고 눈내리는 추운 겨울에는 추위를 피할수 있어서 좋은 곳이다. 지하의 카타콤은 하루에 두차례의 가이드 관람이 가능하다. 오전 10시부터 11시 30분까지, 오후 1시부터 2시 30분까지이다. 지하 카타콤과 탑관람은 입장료를 내야 한다. 슈테판성당의 탑들을 올라가는 것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가능하다. 남탑과 북탑을 따로 올라간다. 슈테판성당의 비밀들을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가이드를 따라 다니며 귀를 기울여 잘 들어야 할 것이다.

 

이교도의 탑이 웅장한 슈테판스돔의 앞 면. 교회의 앞 광장이 슈태판스플라츠이다.

 

ü ö 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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