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1일 투어

프레데릭 대왕의 대리석관

정준극 2008. 11. 21. 19:53

성캐터린채플을 일견하기 전에 잠시 중앙제단 방향으로 눈을 돌리면 성당의 오른쪽 회랑 끝까지 가서 출입금지가 되어 있는 곳의 안쪽 끝에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네모난 조형물이 높직하게 안치되어 있는 것을 볼수있다. 프레데릭 대왕의 대리석관이다. 일반인들은 그곳까지 들어갈수 없으므로 그저 멀리서만 볼수 있지만 그 규모의 웅장함에는 찬사를 보내도 좋은 것이다.

 

 프레데릭(프리드리히)3세의 대리석 관

 

그 장소는 슈테판성당에서도 명당에 속한다. 왜냐하면 슈테판성당에서 저명인사의 장례식이라도 열기게 되면 바로 프레데릭3세의 석관 앞에 합창단이 자리잡고 장엄한 미사곡을 연주하기 때문이다. 프레데릭3세는 자기가 세상을 떠난후 들어갈 석관을 만들기 위해 플란더스(Flanders) 조각가인 니클라스 게르하르트 반 레이덴(Niclas Gerhaert van Leyden)을 오스트리아로 데려와 아름다운 석관을 만들게 했다. 조각가인 반 레이덴은 1467년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1493년 프레데릭3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석관은 겨우 뚜껑 부분만이 완성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프레데릭3세는 임시로 대공들의 묘소에 안치되었다가 그로부터 20년후, 웅대한 석관이 완성된 1513년에 장엄한 의식과 함께 예정된 자리에 안치될수 있었다. 그러나 프레데릭3세가 세상을 떠난 곳은 비엔나가 아닌 린츠(Linz)이며 더구나 사후 20년 동안 다른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슈테판성당의 납골당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는 소문도 있다.

 

프레데릭 3세 석관

  

이러한 소문의 진위를 확실히 하기 위해 1969년 3월, 학자들이 과학적인 조사를 실시했다. 아마 이런 형태의 조사는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프레데릭3세의 문장을 장식한 석관의 뚜껑이 조심스럽게 벗겨졌다. 그리고 탐사경(探査鏡)을 석관 내부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탐사경의 끝에는 조명장치가 된 반사거울을 장치했다. 거울에 비친 것은 붉은 색과 황금색 옷조각이었다. 역사학자에 의하면 황제의 수의(壽衣) 색깔은 붉은 색과 황금색이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프레데릭3세는 슈테판성당에 안치되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프레데릭 3세

 

프레데릭 3세는 에르네스트 공작의 아들로 인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에르네스트 공작은 인너 오스트리아(Inner Austria), 즉 슈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Carniola)를 통치하였다. 그는 마조비아(Masovia)의 심부르기스(Cymburgis)와 결혼하여 마조비아까지 통치하게 되었다. 에르네스트 공작은 합스부르크의 레오폴드 라인이다. 프레데릭 3세는 1424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레데릭 5세로서 인너 오스트리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1440년에는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때에는 프레데릭 4세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12년후인 1452년,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이때부터는 프레데릭 3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가지던 해에 포르투갈의 엘레오노르(Eleonor)공주와 결혼했다. 엘레오노르는 막대한 지참금을 가지고 왔다. 프레데릭은 그 돈으로 빚을 갚았다. 뿐만 아니라 재정이 넉넉해지자 입지가 크게 강화되었다.

 

프레데릭 3세는 북부 부르군디(Burgundy)의 샤를르를 제압하여 샤를르의 딸인 메리를 자기의 아들인 막시밀리안과 결혼토록 했다. 샤를르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브루군디는 샤를르의 딸과 사위인 막시밀리안이 통치하게 되었다. 결국 합스부르크는 브루군디라는 막강한 영토를 손 안에 넣게 되어 유럽에서 강호로 부상하게 되었다. 당시 합스부르크의 모토는 ‘다른 사람들은 전쟁이나 하라, 우리는 결혼이나 하겠다’였다. 한편, 프레데릭 3세의 딸인 쿠니군데(Kunigunde)와 바바리아 공작인 알베르트 4세와의 결혼은 또 다른 음모와 기만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프레데릭의 패배라고 할수 있다. 알베르트는 프레데릭의 영토 일부를 불법적으로 차지한 후에 당시 인스부르크에 별도로 살고 있는 쿠니군데에게 청혼하였다. 프레데릭은 알베르트의 청혼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알베르트는 결혼 지참금으로 그가 불법으로 점령한 프레데릭의 영토들을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후 알베르트는 또 다시 프레데릭의 영토를 차지했다. 이번에는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였다. 분노한 프레데릭은 결혼약속을 취소했다. 그러나 프레데릭이 결혼취소를 인스부르크에 있는 딸 쿠니군데에게 전하기도 전에 알베르트는 재빨리 인스부르크로 가서 프레데릭이 이미 허락한 사항이라면서 쿠니군데와 결혼식을 올렸다. 프레데릭의 아들 막시밀리안이 중간에 나서서 ‘기왕 이렇게 된 것을 어떻게 하느냐? 남들의 이목도 있는데’라면서 중재하는 바람에 다행히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프레데릭은 77세에 린츠에서 세상을 떠났다. 왼쪽 다리의 큰 상처 때문에 절단하는 수술을 받다가 수술이 실패하여 숨을 거두었다. 니콜라우스 게르하르트 폰 레이덴이 만든 프레데릭 3세의 대리석관은 중세 조각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절단된 그의 다리는 함께 안장되었다. 프레데릭의 뒤를 이어 아들 막시밀리안이 오스트리아를 통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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