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1일 투어

성콜로만의 돌

정준극 2008. 11. 21. 20:24

성당안으로 들어서면 왼편에 기념품 상점이 있다. Dom Shop 이다. 기념품 상점 오른쪽 입구의 위쪽 벽에 성콜로만(St Coloman)의 돌을 놓은 것도 루돌프대공이다.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칫하면 그냥 지나치기가 쉽다. 하지만 눈여겨 볼만하다. 이 돌은 오랜 기간을 통하여 심신이 두터운 순례자들이 손으로 어루만졌기 때문에 닳아서 움푹 들어가고 반질반질해졌다. 그 돌 위쪽에는 지금은 흐릿해서 거의 보이지 않지만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이 돌은 순교자인 성콜로만이 톱으로 다리를 여러 조각으로 썰릴 때 흘린 피가 적셔있던 돌이다.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루돌프4세가 이곳에 그 돌을 안치했다. 순례자들이 이 돌을 만지면 성콜로만의 가호를 받아 순례를 무사히 마칠수 있었다고 한다.

 

 성콜로만의 돌. 사면의 테두리에는 '순교자의 뼈를 톱으로 자를 때 흘러내린 피가 적셔진 돌로서 오스트리아 대공인 루돌프 4세가 이곳에 모셔놓았다'는 내용이 라틴어로 적혀 있다.

 

성콜로만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원래 아일랜드 왕족이었던 그는 성지순례를 위해 아일랜드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 그러던 중 오스트리아를 지날 때 무슨 연유인지 이슬람의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콜로만은 참혹한 고문을 받았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톱으로 정강이를 토막으로 잘릴 정도였다. 더구나 독일어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무죄를 호소할 길도 없었다. 결국 콜로만은 자기의 영혼을 하늘에 의지하게 되었다. 그것이 1012년 오늘날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슈토케라우(Stockerau)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콜로만이 순교한후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묻힌 곳에는 때 아니게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났다. 이듬해 다뉴브강이 범람하였을 때에도 콜로만의 무덤만은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았다.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은 오스트리아의 마르그레이브(Margrave: 군주)인 하인리히(Heinrich)가 콜로만의 순교를 기리고 후한 장례를 치루어 주기위해 그의 무덤을 파 보았더니 콜로만의 시신은 세상 떠나기 직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날 콜로만의 유해는 비엔나에서 서쪽으로 한시간 가량 걸리는 다뉴브강변의 멜크(Melk)수도원의 교회에 안치되어 있다. 멜크수도원은 베네딕트교단의 수도원으로서 바로크스타일과 고틱스타일이 혼합된 방대한 규모의 건축물이다. 수도원에는 5백개의 방이 있으며 그중 12개의 방으로 구성된 도서관, 그리고 금빛 찬란한 제단의 교회는 단연 세계 최고이다. 멜크수도원에는 어린 모차르트가 이곳에 와서 피아노를 연주한 방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수도원의 어떤 벽면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자주 찾아 왔었다는 설명을 써놓은 명판이 있다. 1743년 멜크 사원을 방문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후회했을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멜크사원을 사랑하였다. 멜크라는 단어는 이곳에 있는 도나우강의 지류의 명칭으로 아주 천천이 흐르는 강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멜크수도원의 교회에 있는 성콜로만 제단. 성콜로만의 관이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