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1일 투어

카타콤

정준극 2008. 11. 22. 16:29

지하 납골당(카타콤)으로 들어가려면 성당 내부에서 방문 시간을 기다렸다가 약간의 입장료를 내고 안내를 받아 지하로 내려가서 구경할수 있지만 예전에는 카타콤으로 통하는 문이 성당 외부에 있어서 비교적 출입이 자유로웠다고 한다. 카타콤 방문시간은 오전 10시부터 11시30분까지, 오후에는 1시 30분부터 4시 30분까지이다. 주일과 축일을 비롯한 공휴일에는 방문할수 없다. 투어는 요청이 있을 때에 매 15분과 30분에 모여서 시작한다. 카타콤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모여 있으면 된다. 방문 시간은 약 30분이다. 입장료는 어른이 4유로 50센트이며 14세까지의 아이들은 1유로 50센트이다. 카타콤에는 약 1만1천명의 유골들이 남아 있다. 슈테판스돔에는 크립트(납골당)가 세개가 있다. 주교(Bishop) 납골당, 본당사제(Provost) 납골당, 공국(Ducal) 납골당이다. 가장 최근의 납골당 안치는 2004년 비엔나대주교를 지낸(1956-85) 프란츠 쾨니히가 98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주교 납골당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슈테판성당의 카타콤

 

슈테판성당이 서 있는 자리는 모르긴해도 중세 이전부터 묘지자리였다고 한다. 슈테판성당 주변 건물을 지을때 땅을 파보면 유골들이 심심치 않게 나왔기 때문에 그렇다고 짐작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부터는 더 이상 묘지로 사용되지 못하였다. 건물들이 자꾸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대신, 성당 지하에 거대한 카타콤이 마련되었다. 오스트리아 역사상 상당히 중요한 인물들의 납골당과 그런 사람들의 관을 안치한 묘지가 카타콤의 형태로 들어선 것이다. 합스부르크 황제와 황비 또는 황태자의 유해 또는 장기(臟器)를 엄숙하게 모신 곳도 이곳 지하 카타콤이다. 일설에는 슈테판스돔의 카타콤에 모차르트의 유골도 포함되어 있다는 소리가 있지만 소문뿐이며 확실치 않다. 모차르트는 슈테판성당의 성십자 채플에서 장례미사만을 드렸으며 지하 카타콤에는 안치되지 않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모차르트의 시신은 잘 아는대로 당시 비엔나 교외에 있는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다른 시신들과 함께 집단으로 매장되었으며 더구나 어느 장소인지를 몰라서 훗날 사람들이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가묘를 만들어 비석을 세웠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비엔나 시당국이 남쪽 짐머링에 대규모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를 마련하고 예술가 묘역을 조성하자 그곳으로 형식상 이장하였다. 그러므로 중앙공동묘지의 예술가묘역에 있는 모차르트의 묘소도 사실은 가묘일 뿐이며 아무것도 없이 아름다운 비석만 세워져 있다.

 

 

슈테판스돔 카타콤의 유골들

 

슈테판성당의 카타콤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자. 1735년에 비엔나에는 역병이 번져 큰 고통을 받았다. 역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중의 하나로 슈테판성당 인근에 있는 공동묘지 8곳을 폐쇄하고 아울러 성당의 납골당도 문을 닫도록 했다. 납골당에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유골들이 산처럼 싸여 있었다. 폐쇄된 공동묘지에서 나온 유골들과 납골당에 있던 산처럼 많은 유골들을 한데 모아 성당의 지하실에 보관하도록 했다. 게다가 역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신도 당장 적당히 묻을 곳이 없으므로 성당 지하에 던져 넣도록 했다. 성당 지하가 확장되었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성당의 지하로부터 나오는 기분 좋지 않은 냄새였다. 성당측은 당국과 협의하여 죄수들을 동원하여 성당 지하에 내려가서 시신들과 유골들을 정리토록 했다. 뼈들을 분질러서 마치 장작을 쌓아 놓은 것처럼 차곡차곡 쌓아 놓도록 했다. 해골들을 위에 놓고 팔다리와 갈비뼈 등은 아래에 쌓아 놓도록 했다. 그렇게 정리작업을 했는데도 완전하게 정리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뼈들이 그냥 수북히 쌓여 있는 곳이 있다. 카타콤에 시신을 그대로 던져 넣는 방식은 1783년까지 계속되었다. 다만, 슈테판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치룬 사람의 경우가 우선이었다. 그러다가 1783년에 비엔나 시내에는 절대로 시신을 매장을 할수 없다는 법이 제정되었다. 그래서 1791년에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도 비록 슈테판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치루었지만 카타콤에 들어가지 못하고 교외의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그야말로 공동으로 매장되었던 것이다

 

슈테판성당 지하의 합스부르크 카타콤

 

신성로마제국의 프레데릭 3세(1415-1493) 황제는 1469년에 비엔나 교구를 창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치하에서 비엔나가 슈테판스돔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구로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런 프레데릭 3세의 묘지는 슈테판스돔 내의 동남쪽 코너에 있는 사도들의 콰이어에 엄숙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대리석관은 프레데릭 3세가 세상을 떠나기 25년 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완성까지는 45년이 걸렸다. 즉, 프레데릭 3세가 세상을 떠난지 20년 후에야 장엄한 관이 완성된 것이다. 대리석 관의 상단에는 보석으로 장식한 왕관을 쓴 프레데릭 3세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며 관의 사방에는 240개에 이르는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프레데릭 3세 치하의 신성로마제국 각 지역의 문장들도 관에 새겨져 있다.

 

프레데릭 3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의 묘소도 성당 내에 있다. 오이겐 공자는 유럽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장군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 전쟁에서 제국의 군대를 이끌고 참여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워 합스부르크의 영광을 드 높인 인물이다. 오이겐 공자는 특히 프랑스와의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이룬 것으로 유명하다. 오이겐 공자의 묘소는 지금의 기념품상점이 있는 곳의 옆에 있는 성십자 채플에 있다. 성십자채플이라고 부르는 것은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제단에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의 수염이 매년 조금씩 자란다는 주장이 있어서 해마다 한번씩 성당의 사제들이 수염을 깎는 의식을 거행한다고 하니 신비롭다. 이곳에서 모차르트의 장례미사가 거행되었다. 사람들은 혹시 모차르트의 결혼미사는 물론이고 장례미사가 슈테판스돔의 대중앙제단 앞에서 거행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 성당 내의 작은 예배처(카펠레)에서 거행되었다. 성십자 채플은 평상시에는 닫혀 있어서 들어가 볼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슈테판성당의 성십자 채플. 사보이의 오이겐공자의 묘소가 있다. 모차르트의 장례미사가 거행된 장소이다.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는 수염이 해마다 자라난다고 한다. 그래서 1년에 한번씩 수염을 깍아 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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