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역사적 인물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정준극 2008. 12. 6. 16:25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여제 기념상

 

미슬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 사이의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에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기념상

 

미술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의 사이에 있는 광장이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Maria Theresian Platz)이다. 이 광장의 한 가운데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기념상이 웅장하게 서있다. 비엔나의 랜드마크이며 합스부르크-로레인 황실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인 이 기념상은 프란츠 요셉 1세 황제의 우악한 지시에 의해 위대한 족각가 카스파르 폰 춤부슈(Kaspar von Zumbusch)가 완성하였다. 폰 춤부슈는 베토벤플라츠에 있는 베토벤기념상등 수많은 걸작품을 만들어 낸 위대한 조각가이다. 기념상의 여제는 머리아 월계관 모양의 장식(디아뎀: Diadem)을 하고 있으며 왕좌에 앉아 있으며 옥좌의 주변 사방에는 여제의 덕성을 치하하는 조각들을 배치하였다.  하단의 사방에 말을 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시대의 장군들(Feldherren)과 위대한 인물들(Grosse Personlichkeiten)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시절에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공국은 유럽에서 가장 융성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열다섯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에서 막내딸인 마리 앙뚜아네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기념상은 합스부르크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념상이다. 카스파르 폰 춤부슈가 13년이라는 공사기간을 거쳐 완성하여 1888년에 제막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생일인 5월 13일에 프란츠 요셉 1세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비(씨씨)를 비롯한 수많은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세상을 떠난지 108년만의 일이었다.

 

1888년에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건립했다는 내용

 

기념상은 20 미터 높이에 전체 중량은 44톤에 이른다. 마리아 테레지아 좌상의 높이만해도 6 미터에 이른다.

좌대는 오버외스터라이히의 마우타우제너 화강암을 사용했고 인물상들은 체첸에서 가져온 석재로, 기둥은 쥐드티롤의 슈테르칭에서 가져온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총공사비는 오늘날의 화폐로 환산했을 때 8백만 유로가 들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른 손을 내밀어 백성들을 환영하고 있으며 왼 손에는 유명한 Pragmatische Sanktion(국사조서) 문서와 홀을 들고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기념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0년, 부왕인 샤를르 6세의 서거 이후로부터 1789년 작고할 때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실제적인 제왕으로서 군림하였던 인물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기념상의 주변에는 4개의 분수가 있다. 트리톤과 나야데분수(Tritonen-and Najadenbrunnen)이다. 이 분수들은 기념상이 만들어진 후인 1890년에 완성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기념상이 세워진지 125년 만인 1913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와 주변 정리작업이 착수되었다. 공사는 5년만에 마무리 되었다. 총보수비 1백 60만 유로가 들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앉아 있는 아랫쪽에는 사방에 네 여인상을 두었다. 이들은 정의, 용기, 온유(관용), 지혜를 상징한다. 그 아래쪽으로는 역시 사방의 벽면에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를 빛낸 인물들을 주제별로 부조처럼 만들었다. 자문관, 공무원, 군인, 학자 및 예술인이다.

 

- 자문관(Berater): 가운데 인물은 정치가 겸 외교관인 벤첼 안톤 카우니츠(Wenzel Anton Graf Kaunitz-Rietberg: 1711-1794) 백작이며 그 뒤에 서 있는 인물들은 왼쪽으로부터 역시 정치가 겸 외교관인 요한 크리스토프 프라이헤르 폰 바르텐슈타인(Johann Christoph Freiherr von Bartenstein: 1689-1767) 남작, 재무장관을 지낸 군다커 토마스 슈타렘버그 백작(Gundakar Thomas Graf von Starhemberg: 1663-1745), 파리 주재의 외교관인 플로리몽 끌로드 폰 메르시 아르젠토(Graf Florimond Claude von Mercy-Argenteau: 1727-1794)이다. 부조의 배경은 쇤브룬 궁전의 정원과 글로리에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문관들

                           

- 공무원(Verwaltung): 가운데에는 제국의 재상을 지낸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하우그비츠(Friedrich Wilhelm Graf von Haugwitz: 1702-1765)백작이며 그 뒤로 왼쪽으로부터 헝가리 출신의 황실재정총책임자(Hofkammerprasident)인 안탈 그라살코비치 1세(Antal Grassalkovich I: Anton Graf Grassalkovich: 1694-1771), 지벤부르크 총독(Gouverneur von Siebenburgen)인 사무엘 프라이헤르 폰 브루켄탈(Samuel Freiherr von Brukenthal: 1721-1803), 법학자이며 법관인 파울 요제프 폰 리거(Paul Joseph von Riegger: 1705-1775), 역시 법학자이며 법관, 그리고 행정개혁자인 요제프 프라이헤르 폰 존넨펠스(Joseph Freiherr von Sennenfels: 1733-1817) 남작, 법학자이며 법관인 칼 안톤 폰 마르티니(Karl Anton von Martini, Freiherr zu Wasserberg: 1726-1800)남작이다. 뒷면의 그림은 호프부르크의 자문관실 모습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행정개혁을 주도한 관료들

                           

- 군인(Militar) 또는 전쟁(Krieg)와 관련된 인사들이다: 가운데의 인물은 요제프 휘르스트 폰 리히텐슈타인 또는 벤첼 1세(Josef Wenzel Furst von Liechtenstein: Josef Wenzel I: 1696-1772)이라고 불리는 인물로서 장군 겸 외교관이었으며 그 뒤로는 왼쪽으로부터 프란츠 레오폴드 그라프 폰 나다스디(Franz Leopold Graf von Nadasdy: 1708-1783) 장군,  안드레아스 그라프 하디크 폰 푸타크(Andreas Graf Hadik von Futak: 1711-1790) 장군, 프란츠 모리츠 그라프 폰 라시(Franz Moritz Graf von Lacy: 1725-1801)장군이다. 뒷면의 배경은 비너 노이슈타트의 성으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1752년에 테레지아군사학교(Theresianische Militarakademie)를 설립한 곳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군사발전을 위해 기여한 인물들

 

- 학술 및 예술인(Wissenschat und Kunst): 가운데 인물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주치의인 게라르트 프라이헤르 반 스비텐(Gerard van Swieten: 1700-1772)이며 그 뒤에는 왼쪽으로부터 화폐주조관인 요제프 힐라리우스 폰 에크헬(Joseph Hilarius Eckhel: 1737-1798), 역사학자인 기요리스 프라이(Gyorgy Pray: 기요르그 프라이: Georg Pray: 1723-1801), 작곡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Christoph Willibald Ritter von Gluck: 1714-1787), 작곡가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 그리고 어린 시절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가 서 있다.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쇤브룬궁전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와 자녀들, 특히 마리아 안토니아의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배경 그림은 비엔나 구대학교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활동했던 학문 및 예술가들. 앞의 인물은 게라르트 반 스비텐이며 그 뒤로 글룩, 하이든이 있고 가운데 어린이는 모차르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기념상의 아랫쪽에는 네 기마상이 있다. 이들은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를 빛낸 위대한 장군들인 레오폴드 요제프 폰 다운(Leopold Joseph von Daun: 1705-1766), 루드비히 안드레아스 폰 케벤휠러(Ludwig Andreas von Khevenhuller: 1683-1744), 기데온 에른스트 폰 라우돈(Gideon Ernst von Laudon: 1717-1790), 오토 페르디난트 폰 아벤슈페르크 운트 트라운(Otto Ferdinand von Abensperg und Traun: 1677-1748)이다. 이들은 대체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Austrian War of Succession)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장군들이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란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샤를르 6세가 아들이 없이 딸만 둘을 두자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른바 국사조치(Progmatic Sanction)를 발표하고 딸도 왕위를 계승할수 있다고 주장하자 제국내의 열국들이 이에 반기를 들어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프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세력에 패배를 하여 실레지아를 잃는 등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여파로 일어난 전쟁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7년 전쟁이다. 미국은 7년 전쟁의 여파로 독립을 쟁취하였다.

 

루드비히 안드레아스 폰 케벤휠러 백작. 아이헬버그 프란켄부르크 백작이라고도 불린다. 프랑코니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카린티아에 정착한 후 군인이 되어 처음에는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 휘하에서 복무했고 이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등에 참석하여 합스부르크를 위해 두드러진 전과를 올렸다.

 

기데온 에른스트 폰 라우돈 백작. 7년 전쟁의 영웅이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왕에 맞서는 오스트리아의 명장으로 여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결국 오스트리아는 프러시아에게 실레지아를 내주어야 했다. 오스트리아에는 Fix Laudon 이라는 말이 있다. 간혹 일종의 저주 및 비난성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실레지아를 앙숙인 프러시아의 프레데릭에게 빼앗가자 속이 상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내뱉은 말인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오토 페르디난트 폰 아벤슈페르크 운트 트라운 백작. 1743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대승을 거둔 장군이다. 케벤휠러 장군이 전사하자 그의 뒤를 이은 오스트리아군 사령관이었다.

 

레오폴드 요제프 폰 다운 장군.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중 1743년의 도나우 전투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린 장군이다. 그 전에 1737-39년의 오토만 제국에 대한 전투에도 참가하여 오스트리아에 영광을 안겨주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기념상의 제막식은 여제의 171회 생일을 기념하는 1888년 5월 13일에 거행되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비가 참가하는 대축제였다. 마리아 테레지엔 플라츠에는 황실 멤버들과 귀족들을 위한 웅장한 천막이 설치되었고 군인들이 주변을 경호하였다. 비엔나 대주교인 요제프 강글바우어와 20여명의 고위 성직자들이 주께 감사하는 테 데움(Te Deum) 미사를 집전하였다. 장군들은 흰색 군복차림에 화려한 훈장들을 달고 참석하였다. 제막과 함께 비엔나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당시 51세의 엘리자베트 황비(씨씨)는 마리아 테레지아를 송축하여 시를 지었다. 그 시는 그로부터 100년 후에야 발간되었다. 다음과 같은 간단한 내용이다.

 

Welch' grosse Ehren kann man doch

Durch Ahnen sich verdienen

Bei Gott, was soll aus dem Gewuhl

Aus Habsburgsprossen werden?

Aus diesem teuren Ornanment

Das jedes Land belastet....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플라츠에서 거행된 기념상 제막식. 1888년 5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