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강화-인천

창영교회

정준극 2009. 1. 18. 00:52

창영(昌榮)교회

 

동인천 창영동에 창영감리교회가 있다. 인천지방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중의 하나이다. 1937년에 선교사들이 세운 영화학교의 유치원에서 교인 몇명이 모여 예배를 본것이 창영감리교회의 시작이다. 이어 이듬해인 1938년 서양식 벽돌건물인 교회당이 완성되어 인천의 명물이 되었다. 나의 친조부이신 춘자식자(鄭春植)님께서 일제시대에 이 교회의 장로님이셨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의 교회와 교육관이 들어서 있지만 옛 교회가 있을 때에는 교회 마당에  할아버지 정장로님이 교회를 위해 파신 우물이 있었다. 그래서 그 우물을 '정장로 우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우물 옆에는 작은 운동장도 있었다. 청년들이 배구도 하며 운동하던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없다. 교회 신축 때에 어쩔수 없이 사라졌다. 창영감리교회의 초대(1937-39)목사님은 갈홍기(葛弘基)박사이시다. 갈홍기 박사님은 나중에 이승만대통령을 도와 공보처장관을 지내셨던 분이다. 창영감리교회의 역대 목사님들 중에는 우리나라 감리교단의 중추적인 분들이 많이 있다. 1941년부터 49년까지 담임하셨던 김응태(金應泰)목사님은 1960년대 중반 감리교 총리원의 부정과 비리에 맞서 호헌을 주장하신 분이며, 신학연구의 대가이신 고영춘 목사님(1967-71), 구약학자로 덕망이 높으신

구덕관 목사님(1971-74)등이 창영교회를 담임하셨다. 창영교회 뒤편에는 옛날 영화학교에서 한국 여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한국에 온 미국 여선교사들의 숙소가 있다. 이 건물은 마치 기념관처럼 되어 있어서 당시 생활모습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창영교회의 슬로간은 '우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겠다'는 것이다. 미국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백성들의 심령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가며 거저 주었으므로 이제는 이들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면서 지내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인지 창영교회는 다른 교회들보다 해외 선교에 열심이다.

 

 창영감리교회의 모습

 

창영교회의 바로 옆은 일제시대에 미국 감리교단이 세운 영화학교(지금은 영화정보학교)가 있으며 영화학교와 담을 사이에 두고 유서깊은 창영국민학교가 있다. 창영국민학교는 1903년에 문을 열었으며 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명문이다. 예를 들면, 월남전에서 부하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강재구 소령이 이 학교 출신이다. 창영국민학교 건물은 인천시 문화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옛 창영감리교회의 건물이 신축으로 보전되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다만, 1938년에 놓았던 옛 교회건물의 주춧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영화학교의 건물도 옛 서양식 벽돌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보기에 좋다.

 

창영초등학교

 

아래 그림은 1940년대 창영교회와 그 주변이다. 가운데 보이는 벽돌건물이 창영감리교회이며 왼편에 있는 큰 벽돌 건물들이 영화학교이다. 영화학교 옆에 창영국민학교의 모습이 작게 보인다. 창영교회와 영화학교는 동인천 역에서 배다리를 거쳐 갈수 있었다. 지금은 배다리가 경인전철의 철로가 생기는 바람에 사용되지 않고 있다. 인천시는 배다리를 문화사적으로 간주하여 옛모습을 간직코자 노력하고 있다. 배다리는 제물포 항구에서부터 배가 직접 도달했던 곳이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즉, 아주 예전에는 배가 창영동 입구의 배다리까지 왔었다는 것이다. 창영교회 앞길을 통해 오른쪽으로 계속가면 박문여고가 나온다. 가톨릭 재단에서 세운 역시 인천의 유서깊은 학교이다. 박문을 지나면 천일염으로 유명했던 주안염전이 있었다. 지금은 염전은 커녕 소금도 구경할수 없다. 주안 염전의 소금밭에는 어쩐 일인지 수정 돌들이 많았다. 그래서 아이들이 수정 돌을 주우러 자주 다녔다. 

 (창영교회 홈페이지에서 퍼옴)

'발길 따라, 추억 따라 > 강화-인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흥궁(龍興宮)  (0) 2009.02.28
강화역사관  (0) 2009.02.28
전등사 가는 길  (0) 2009.02.28
전등사 답사기  (0) 2009.02.28
강화도와 성공회  (0) 2009.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