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강화-인천

전등사 가는 길

정준극 2009. 2. 28. 01:05

전등사 가는 길


강화도에 있는 전등사(傳燈寺)라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아마 1968년이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면 거의 40여년 전의 일이다. 그해 4월 6일에 신문사의 같은 부서 사람들과 함께 전등사에 가기로 했다. 전등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말로만 듣던 그런 전등사를 느닷없이 탐방키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니 지금 생각해도 아무튼 신통했다. 4월 6일은 신문의 날이다. 이날만은 신문사 직원들이 하루를 쉰다. 1년에 한번 공식적으로 쉬는 신문의 날이기 때문에 아무리 할 일이 있어도 신문사에 나와 책상이나 지키고 있으면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모두들 작심하고 신문사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는다. 바로 전날인 4월 5일은 식목일이다. 모든 학교와 관공서가 식목행사 때문에 쉰다. 하지만 신문사는 식목일이라고 해도 쉬지 않는다. 다른 집의 아이들은 식목일에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한달 후에 있을 어린이날에 대한 예행연습이라도 하려는 듯 고궁이나 백화점으로 놀러간다. 신문사 직원들은 식목일이라고 해도 놀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이란 있을수 없다. 다만, 마음속으로 아이들과 마누라에게 미안한 심정을 가질 뿐이다. 신문의 날에는 모든 신문사가 휴무이지만 평일이기 때문에 신문사 직원들은 가족들과 나들이를 가기가 어렵다. 오히려 신문의 날이 괴로운 입장이다. 집에 우두커니 앉아 있어보았자 마누라에게 눈치만 보인다. 무엇보다 밤낮으로 싸돌아다니던 습성 때문에 집에서 낮잠을 자는 것도 지루해서 견딜수 없다. 할수 없이 밖으로 나오지만 별로 갈데가 없다. 그래서 나온 김에 을지로 4가에서 전차를 타고 창경원으로 향한다. 식구들이 그렇게도 가보자고 조르는 창경원 벚꽃놀이를이핑게 저핑게로 한번도 가지 못했기 때문에 오기로라도 창경원의 벚꽃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 위해서 창경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4월 초면 그나마 창경원에 벚꽃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볼수 있다. 그래서인지 4월 6일에 창경원에 가면 이곳저곳에서 아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안면이 있는 다른 신문사 사람들도 많이 눈에 띤다. 


그러다가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는가?’라는 자각심이 생겨 1968년 신문의 날에는 유별나게 부부동반으로 저 멀리 강화도의 전등사를 탐방키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던 것이다. 당시 문화부 직원들은 6명이었다. 모두 부부동반야유회를 박수로 대찬성하며 이번에야 말로 와이프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투철한 사명감을 다졌다. 다만, 나는 그때만 해도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부동반의 책임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편집국의 옆에 위치한 사진부 사람들도 끼어 달라고 부탁하여 두세명이 함께 가도록 했다. 각 집마다 임무가 부여되었다. 어떤 집에서는 솥뚜껑 삼겹살을 준비토록하고 다른 집에서는 김밥과 소주를 준비토록 했다. 주로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임무부여였다. 아침 일찍 서울역 대합실에서 만나 기차를 타고 하인천까지 간후에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초지까지 가는 교통편이 구상되었다. 당시에는 강화도로 가려면 그길 밖에 없었다. 점심은 초지에서 맛있게 먹고 그 다음에 전등사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일정이 세밀하게 작성되었다. 누가 문화부 기자가 아니랄까봐 전등사에 대하여 한마디씩 거들며 4월 6일이 오기를 기다렸다. ‘전등사는 말야!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찰이란 말씀이야! 고구려 소수림 왕때에 창건되었다니까? 뭣들 알기나 해?’ ‘거 뭐야, 고려 충렬왕의 부인인 정화공주인가가 옥으로 만든 등잔을 시주했기 땜에 전등사란 이름이 붙었다며?’ ‘전등사도 전등사지만 그 위로 올라가면 이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史庫)가 있다고 하는데 이번에 가서 그것도 좀 보고 와야 겠어!’ ‘정족산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정족산 안에 고려 때에 임시로 궁궐을 지었던 터가 있다는데 발굴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등등의 얘기였다. 모두들 상당한 지식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날이 오자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그 전날인 식목일에는 그렇게도 고사를 지내며 오라고 해도 안오던 비가 신문의 날에 모처럼 신문사 동료들이 제법 멀리 나들이를 가려니까 하늘이 축복이라도 내리는 듯 비가 내렸다. 부인네들은 모처럼 직장 사람들과의 부부동반 나들이를 위해 며칠전부터 무던히도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이날 아침에 보니 거의 모든 부인들이 옷차림에 꽤나 신경을 쓰고 등장하였음을 문외한이 나로서도 즉각적으로 인식할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이구, 오랜만이네요. 어머머, 차장님 사모님, 너무 멋있어요, 너무 젊게 보이시네요! 몰라보겠어요!’ 등등 부인네들의 대화는 미리 각본이나 짠 것처럼 정해진 것이었다. 옷차림도 옷차림이려니와 거의 모든 부인네들이 평소에는 어디다 두었는지도 모르는 선글라스를 찾아서 쓰고 있었고 파라솔도 하나씩 들었다. 아마 날씨가 쾌청할줄 알고 그렇게들 준비한것 같았다. 아니면 날씨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이번 기회에 멋이나 한번 부려보자고 그렇게들 준비한것 같았다. 아무튼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데 선글라스들을 쓰고 파라솔들을 들었으니 마치 1960년대의 어느날, 달밤에 체조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릇 남편의 직업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두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경찰관이요 다른 하나는 신문사 기자일 것이다. 남들이 노는 날에도 반드시 일을 하기 때문이다. 방송국 사람들도 남들이 노는 날에 반드시 일을 하지만 그들은 경우가 좀 다르다. 밤낮으로 예쁜 탤런트들이나 가수들과 시시덕거릴 수 있으니 방송의 날이 다가와도 심려할 일이 없다. 그나저나 같은 직장 사람들끼리 부부동반으로 야유회를 가던지 회식을 가질 때면 이른바 쫄짜(卒者)들의 부인들은 몇가지 유의사항을 기억하고 집에서 열심히 연습을 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아예 무시하는 정책을 고수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쫄짜의 부인은 부장님 마누라나 차장님 여편네에게 다음 사항을 유의해서 처신해야 할 것이니 첫째는 무조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고, 부장님 사모님은 왜 그렇게 젊으세요? 저는 아까 먼발치에서 보고 아니, 신문사의 경리 보는 아가씨가 왜 왔을까 라고 생각했어요? 호호’라든지 또는 ‘아이고, 차장님 사모님이 쓰고 계신 그 선글라스, 혹시 불란서제 라이방이 아닌가요? 어쩌면, 차장님 사모님은 너무너무 좋으시겠어요. 차장님이 외국 출장만 갔다 오시면 그렇게도 좋은 선물을 사 오신다면서요? 호호’라고 말을 해야 할것이다. 둘째는 아무리 맛이 없더라도 음식에 대한 칭찬만은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고, 부장님 사모님이 가져오신 김밥은 정말 너무너무 환상적이어요! 아니, 무얼 넣고 만드신 거예요? 부탁입니다만, 제발 김밥 만드는 방법 좀 가르쳐 주세요!’라든지 또는 ‘아이고, 차장님 사모님이 가져오신 김치는 정말 너무너무 맛있어요! 둘이 먹다가 둘이 죽어도 모르겠어요! 호호’라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 자녀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이고, 부장님네 큰 아드님이 이번에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면서요? 아니, 어쩜 그렇게 공부를 잘해요! 너무너무 좋으시겠어요!’라든지 또는 ‘아이고, 차장님네 따님이 그렇게도 노래를 잘한다면서요? 성악가들이 그냥 칭찬만 한다고 들었어요! 너무너무 좋으시겠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그런 아양 내지 아첨을 도무지 꿈에서라도 하지 못하는 쫄짜 직원의 부인이라면 평소의 감정을 숨김없이 내 뱉을수도 있다. ‘저, 부장님 사모님! 이번에 아드님이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면서요?’라고 말한다고 하자. 그러면 부장님 사모님이 ‘아니예요, 서울대학교가 아니라 북서울대학에 들어갔어요!’라고 대답하면 즉각적으로 ‘북서울요? 아니, 그런 학교도 다 있나요? 살면서 처음 들어보네요!’라고 말해 버리는 것이다. 당장은 속이 시원할 것이다. 더구나 얘기를 들어보니까 부장 마누라는 고등학교밖에 다지지 못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부장님 사모님, 저요, 이번에 대학원에 등록했어요. 내친김에 박사까지 하려고 해요. 그런데 부장님 사모님은 어느 대학교 나오셨어요?’라며 속을 긁어 놓는 것도 좋은 반찬이 될 것이다. 차장 여편네는 또 어떠한가? 남편이 다방 아가씨와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사느니 죽느니 하며 난리를 쳤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가만히 있을수 없는 노릇이다. ‘저 차장님 사모님, 요즘 차장님이 나비 다방 레이지와는 관계를 아주 끊었나요? 대단했다면서요?’라고 짐짓 걱정이라도 하는듯 말하면 역시 당장은 속이 시원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가 되었든지 직장내에서 부부동반으로 모임을 갖고 나면 대부분 쫄짜들의 부인들은 집에 와서 이를 박박 갈면서 다시는 그런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고 악을 쓸 것이 틀림없다.


그건 그렇고, 다시 전등사 야유회 일정으로 돌아가 보면, 결론적으로 일이 아주 우습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모두들 서울역에 모여 인천 가는 기차를 탔다. 제일 늦게 나타난 사람은 당연히 나이가 많은 부장님과 부장님 사모님이었다. 그래도 누구 하나 핀잔을 주는 사람이 없이 기분들이 상당히 고조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슬부슬 오는 비는 곧 그칠 것으로 믿었다. 관상대(기상청)의 예보로는 하루 종일 쾌청하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사실 기분들이 고조되어 있는 편은 여자들이지 밤낮으로 얼굴을 마주대고 지내는 남자들로서는 서로 별로 할 얘기도 없다. 그러는 터에 누가 ‘우리 심심한데 카드나 한번 돌리지요! 아직 도착하려면 한시간이나 있어야 하는데 말예요!’라고 제안했다. 포커 게임을 하자는 것이었다. 개중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트럼프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아니할 말로 신문사 사람들은 포커라고하면 밥 먹던 숟가락도 놓고 나서는 사람들이다. 모두들 이의가 있을수 없다. 아쉬운 대로 신문지를 깔고 판을 벌이게 되었다. 누가 신문사에 다니지 않는다고 할까봐 일행 중에는 반드시 신문을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모두들 ‘여보! 나 백원짜리 동전 좀 있으면 몇 개 줘요!’라며 짐짓 심심풀이로 카드 게임을 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바빴다. 사실 포커판이라고 해서 무슨 거창한 판돈이 왔다 갔다 하는 꾼들의 도박판은 결코 아니었다. 백원짜리 삥판이었다. 말하지면 심심풀이 땅콩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기차는 이윽고 하인천에 도착하였다.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두들 ‘하하, 벌써 인천에 왔네! 시간 참 잘 간다!’라며 손에 든 백원짜리 동전들을 짤랑거리며 즐거운 마음이었다. 초지로 가는 배에 올라탔다. 여자들은 객실에 앉아 수다를 떨었지만 남자들은 당연히 갑판 한쪽에 신문지를 깔고 포커 판을 계속하였다. 가만히 보니까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식으로 몇사람은 벌써 2-3만원이나 깨졌다. 세상에 돈 잃고 기분 좋을 사람이 있을 수는 없다. 배는 어느덧 초지에 도착했다.


인천으로 돌아가는 배는 두시간 후와 다섯시간 후에 있다고 했다. 다섯시간 후에 떠나는 배를 타기로 결정하고 미리 표를 사놓았다. 누가 ‘자, 이제 그만하고 어디 적당한 곳에서 밥이나 먹고 전등사나 보고 옵시다!’라고 말했다. 그때 한 사람이 ‘아니, 비도 오는데 그깟 절을 봐서 뭐해요! 그러지 말고 여기서 하던 일이나 계속 합시다’라고 제안했다. 트럼프 게임을 업무의 연장이라고 생각한 그 의지가 대단했다. 누군가 했더니 돈을 제일 많이 잃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제안이 너무나 진실하고 엄숙했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반대의견을 표명하지 못했다. 그러는 차에 누가 ‘아니, 돈은 도대체 누가 다 쓸어 간거야?’라고 질문을 던지자 모두들 ‘난 아냐! 나도 나갔단 말야! 에이!’라고 말하였다. 세상에는 불변하는 진리가 몇가지 있다. 그 중에서 하나는 노름에서 돈을 땄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부자(父子)간에 친선목적의 고스톱을 쳐도 나중에 계산이 맞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자 누군가가 ‘계속하는것 좋지! 헌데 밥은 먹고 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원래 제안자는 ‘밥 좋아하네! 아까 배타고 오면서 소주하고 삼겹살 군거 먹지 않았는가? 그만하면 됐어! 난 배 안고파!’라며 즉각적인 게임 재개를 요청하였다. 그 제안자의 말이 너무나 엄숙하고 위엄이 있어서 또다시 누구도 반대의견을 내놓지 못하였다. 다만, 하나의 타협안으로서 여자들은 여기까지 왔으니 적당한 곳에서 밥 먹은 후에 양산 쓰고 전등사까지 갔다 오면 되고 남자들은 배에서 여자들이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면 된다는 것이었다. 전등사 안내는 전에 한번 갔다온 경험이 있는 내가 맡도록 결정되었다. 초지에서 전등사가 있는 온수리까지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그래서 초지의 어떤 식당에 있는 봉고차를 하나 대절하여 주로 여자들을 싣고 전등사로 떠났다.  


서너시간 후에 전등사에 갔던 부인네들이 초지로 돌아왔다. 전등사에서는 비가 내리기 때문에 사진도 찍지 못했다. 그보다도 사진부 기자들도 왔지만 카메라를 들고 온 사람은 하나도 없어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 오늘만큼은 짤까닥 소리에서 해방되고 싶었다는 변이었다. 초지에서는 그때까지도 배의 갑판에서 우비를 뒤집어 쓴채 포커 판이 계속되었다. 아침에 타고 왔던 바로 그 배가 정비 때문에 다섯시간 후에 떠나게 스케줄이 되어 있어서 선장의 양해를 얻어 갑판에서 시간을 때워도 좋게 되었던 것이다. 비가 와서 바닥이 젖었기 때문에 모두들 편하게 앉지도 못하고 꾸부리고 앉은채 게임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윽고 배가 인천을 향하여 출발했다. 인천에 도착할 때까지 판이 계속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하인천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가면서도 아침과 마찬가지로 신문지를 깔고 판이 계속되었다. 밤 8시쯤해서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누군가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이러지 말고 우리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계속합시다!’라는 제안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사무실 숙직실이 제일 좋아요! 그리로 갑시다!’라고 말했다. 모두들 그렇다고 수긍했다. 신문사 사무실에는 ‘신문의 날’에 재수 없이 당직에 걸린 사람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남자들은 여자들을 모두 집으로 보내고 신문사 숙직실로 향하였다. 여자들은 투덜거리지도 못했다. 웬수같은 남편들의 얼굴을 빨리 보지 않는 것이 좋을 뿐이었다. 아무튼 대단한 ‘신문의 날’ 야유회였다. 다음날 아침, 얼굴들을 보니 모두 부수수했다. 밤을 꼬박 샌 모양이었다. ‘어저께 스코어는 어떻게 되었나요?’라고 물어보았더니 모두 잃었고 딴 사람은 정말이지 하나도 없었다. 당연한 결론을 공연히 물어본 셈이었다.


그건 그렇고 내가 처음으로 전등사를 방문했던 것은 1962년의 여름이던가, 대학교 다닐 때였다. 내가 다니던 교회 청년 중에 강화가 고향인 사람이 있어서 그의 초청을 받아 갔었다. 전등사 동문 입구의 바로 옆에 전등각(傳燈閣)이라는 오래된 여관에 하루 밤을 묵었다. 산사의 여관이어서 그런지 밤중만해서는 아주 적막하여 풀벌레 소리만 들렸다. 마치 해인사 입구에 있는 홍도(紅濤)여관을 연상케 하는 운치 있는 여관이었다. 이번에 다시 찾았을 때, 우정 전등각을 찾아보았으나 식당으로 변해 있었다. 여관이었던 단층집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옛날을 생각하여 다시한번 그 여관에 묵으려던 기대는 한풀에 사라졌다.


아주 오래전에 서울에서 강화도로 가려면 서울역에서 인천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초지진에 내린후 가고 싶은 곳으로 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통진에서 역시 배를 타고 거센 물결을 헤쳐 건너가야 했다. 통진에서 강화로 연결하는 강화대교가 설치되기 전이었다. 다리를 놓지 못했던 것은 물살이 세어서였다. 얼마후인 1970년대 초에 육지의 통진으로부터 지금의 강화역사관 바로 옆까지 연결되는 다리가 생겼다. 강화사람들로서는 꿈만 같은 연육교였다. 버스가 좁은 다리를 비집고 건너갈 때면 버스에 탔던 사람들이 다리 아래의 물살을 내려다보며 ‘세상 참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다리를 지나기 전에 통진에서 해병대의 검문을 받았고  다리를 건너 강화도에 발을 디디면 다시 헌병들의 검문을 받았다. 헌병들이 버스에 올라와서 경례를 하고 증명서를 일일이 검사하였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초지로 갈 때에도 검문을 받았다.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기 전에 증명서 검사를 받았고 초지에 내리면 또 해병대의 검문을 받았다. 시민증이나 도민증이 없으면 헌병에게 연행되어 고초를 겪어야 했다. 잘못하다가는 간첩으로 오인받기가 십상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강화대교가 옛날 다리의 바로 옆에 새로 생겼다. 왕복 4차선의 듬직한 연육교이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다리가 되었다. 놀라운 일은 초지대교라는 것도 생겼다는 것이다. 대명리 항구와 초지를 연결하는 대형 연육교이다. 초지대교를 통해 김포와 인천에 아주 쉽게 갈수있게 되었다. 이제 내가면의 외포리와 석모도의 석포리 선착장을 연결하는 다리, 그리고 하점면의 화개해운여객터미널에서 교동도의 월선포까지 연결하는 다리만 생기면 그야말로 강화는 섬이 아니고 육지가 된다. 실제로 교동도와 석모도를 잇는 연육교 공사가 계획되어 있다고 한다.

 

 

 초지 선착장이 있던 곳에 있는 등대와 억새풀밭

 전등각 여관이었던 집. 지금은 폐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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