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강화-인천

강화도와 성공회

정준극 2009. 2. 27. 18:05

강화도와 성공회


강화도에 갔다가 강화읍에 있는 성공회(聖公會) 건물들을 보고 정말이지 성공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지않을수 없었다. 마치 강화도가 우리나라 성공회의 본향이며 본산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성공회 강화성당은 사적 424호이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축물이다. 일찍이 1900년에 완성되었다. 천주교 명동성당은 1896년에 완성되었으므로 그보다는 몇년 늦는다. 우리나라 개신교의 어머니교회라고 하는 감리회의 인천 내리교회에 비하면 훨씬 늦다. 내리교회는 1885년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내리교회는 새로 지어서 옛 모습을 볼수 없지만 강화도 성공회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그래서 더 귀중하게 여겨진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고려궁지로 올라가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대궐같이 생긴 건물이다. 누가보면 성당건물과 사제관 등 부속건물이 혹시 고려시대의 궁궐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정도이다. 하기야 성공회 강화성당은 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을 복원할 때에 도목수였던 사람이 건축을 담당했다고 하니 궁전처럼 웅장하게 지은 것이 이해가 간다. 성공회 강화성당에는 커다란 종도 있다. 일반적인 예배당 종이 아니라 절에 있는 범종과 같이 생긴 것이다. 예배시간을 알리기 위해 뎅뎅 쳤다고 한다. 성당 입구의 대문은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을 대표하듯 정말 멋있다. 결론적으로 성공회 강화성당을 보면 대단한 건물, 웅장한 건물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

 

용흥궁공원에서 바라본 성공회 강화성당의 모습 

 

강화에서 성공회와 관련하여 또한가지 놀라운 사항은 온수리성당이다. 온수리(溫水里)는 강화섬 남쪽, 전등사가 있는 작은 마을이다. 주민들도 그다지 많지 않다. 그 작은 마을에 대단한 규모의 성공회성당이 있다. 온수리에 성공회 성당이 처음 설립된 것은 1911년이라고 한다. 아주 오래되었다. 처음 지은 성당은 아름다운 한옥 건물이었다. 그러다가 새로 건축할 필요가 있어서 10년 전에 착공을 했지만 건축비가 여의치 못해서 짓다가 말다가 하기를 수없이 반복하다가 결국 5년전 쯤에 하나님의 섭리로 완공했다는 것이다. 새로 지은 성당은 약 1천명 이상은 수용할수 있는 규모라고 한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지금은 2백명이 모이기도 어렵지만 먼 훗날을 생각해서 1천명 이상이 모일수 있는 성당을 건축했다는 것이다. 현재에도 마을 규모에 비해 성공회 성당에 2백명이 모인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 아닐수 없는데 장차 1천명을 목표로 한다니까 놀라울 뿐이다. 아무튼 온수리성당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자.

 

온수리 성공회성당의 위용. 옆의 작은 집은 새로 지은 사제관

 

강화도에는 교회가 많다. 그중에서도 감리교회가 단연 우세하다. 하지만 천주교 성당과 성공회 성당도 만만치 않다. 강화도는 마치 종교의 전시장과 같다. 강화도는 고려시대부터 불교가 성행했던 곳이다. 강화읍은 약 40년동안 고려 왕조의 임시수도였다. 개성이 수도였지만 몽골의 침입을 걱정하여 강화로 임시 천도했다가 40년을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는 불교국가이므로 비록 임시이기는 하지만 왕도가 있는 강화도에서 불교가 성행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강화도에는 절들이 많다. 역사적으로 강화도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최초로 절이 세워진 곳이다. 전등사(傳燈寺)이다. 일찍이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서기 381년에 창건된 절이다. 중국 진나라로부터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72년이다. 전등사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지 10년도 못되어 창건된 대찰로서 무려 1천6백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고찰이다. 우리나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파한 아도화상은 원래 세 개의 절을 창건하였다는데 그중에서 두곳은 어딘지 알수 없고 오직 전등사만이 아도화상이 세운 절이라고 확인되어 오늘날까지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지탱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전등사를 보유하고 있는데 대하여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 대문. 성공회 강화성당이라고 써있다.

 

강화도의 마니산에는 첨성단이 있다. 단군께서는 지금부터 약 2천4백년전에 마니산에 단을 쌓고 봄과 가을에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개천절에 첨성단에서는 단군 할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며 전국체육대회가 열리면 성화를 채화한다. 그러므로 강화도에는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의 기세도 있다. 아무튼 단군께서 상당히 바쁘실 터인데도 불구하고 강화도까지 오시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셨다고 하니 강화도에 뭐가 있기는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렇고 옛날에 단군께서 마니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실 대에 잠깐 시간을 내어 강화도의 경관을  감상하신후 세아들(三郞)을 시켜 마니산 건너편에 있는 정족산(鼎足山)에 성을 쌓게 했다고 한다. 정족산은 마치 세발 달린 솥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단군에게 세 아들이 있었다는 것은 무식한 나로서 금시초문이었지만 그렇다고 하니 그런줄 믿을수 밖에 없고 또 이 세아들이 정족산에 성을 쌓았다고 하니 그런줄 알고 있을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정족산의 삼랑성(三郞城)은 그렇게 해서 건조되었다는 것이다. 삼랑성은 정족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전등사는 삼랑성 안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 강화도이므로 불교가 성하고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가 기세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역사적으로 불교가 성행했던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강화도는 근대화와 더불어 개신교 선교의 중심무대였다. 특히 감리교회가 강세를 보였다. 미국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목사님이 제물포에 상륙할 때에 선교지 영역에 대하여 묵계 아닌 묵계가 있었다고 한다.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님은 평안도 중심으로, 감리교의 아펜젤라 목사님은 경기와 충남을 중심으로 선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화도에 감리교가 먼저 발을 디디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 개신교가 강화에 들어왔을 때에는 주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여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다가 개신교의 지도자들이 항일운동에 적극적이자 주민들은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 강화도라고 하면 조선 팔도에서 외세에 대한 항쟁으로 두번째 가라고 하면 서러워할 입장이 아니던가? 개신교중에도 감리교회가 항일 독립운동에 활발했다. 강화도 서북쪽에 있는 교산감리교회는1893년에 설립되었다. 교산교회와 강화읍교회(강화중앙감리교회)는 항일운동의 은밀한 온상이었다. 강화도 서남쪽의 화도면 내리에 있는 내리감리교회도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이다. 강화의 감리교회들은 훌륭한 교역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강화에 있는 개신교 교회중 거의 70%가 감리교회이다. 6.25 사변 이후에는 황해도에 사는 사람들이 강화도로 많이 피난왔다. 그중에는 개신교, 특히 감리교 교인들도 많았다. 강화도에 감리교회가 많은 이유중의 하나이다. 

 

한국 성공회 초대 주교 고요한 기념비(오른쪽)

 

강화도의 성공회는 어떠한가? 우리나라에 성공회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5년이라고 한다. 당시 중국에 파견되었던 울프라는 영국 성공회 신부가 뜻한바 있어서 부산에 들어와 약 2년동안 선교활동을 하다가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아마 처음이라서 별로 소득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1885년이라고 하면 미국의 감리교단 소속인 아펜젤라 목사와 장로교단 소속인 언더우드 목사님이 제물포(인천)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마침 4월 5일 부활절 아침이었다고 한다. 아마 이들이 제물포를 통하여 한국에 상륙했기 때문에 영국 성공회의 선교사는 제물포를 피하여 부산으로 갔던 모양이다. 아펜젤라 목사는 서울에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이듬해인 1886년에 고종황제로부터 배양영재(培養英材)라는 교명을 받아 학교를 정식으로 배재(培材)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우리나라 신학문의 효시였다. 그건 그렇고 영국 성공회는 울프 신부를 통하여 일차로 한국 선교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한후 1890년에 정식으로 영국 해군 군종신부인 챨스 존 코프(한국이름 고요한)를 우리나라에 파송하여 성공회 선교를 시작하도록 했다. 고요한 신부는 마침 고종황제의 조선근대화작업의 추진에 힘입어 강화도에 상륙할수 있었다. 당시 영국 해군은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고요한신부가 강화읍에서 성공회 포교를 시작한 것이 1899년이라고 하며 현재의 위치에 성당을 세운 것은 1900년이라고 한다. 온수리성당은 1906년에 설립되었다. 온수리라고 하면 전등사로 유명한데 당시에 온수리에 성공회 성당을 지으려 했으니 대단하다. 강화도에 있는 기독교 건물로서 사적으로 지정된 것은 강화읍의 성공회 성당과 온수리의 성공회 성당, 그리고 1923년에 완성된 서도에 있는 중앙교회(주문교회)의 셋뿐이다. 모두 한옥의 멋을 살려 지은 교회당이다. 강화중앙감리교회(옛 잠두교회, 그후 강화읍교회)는 1900년에 설립되었지만 한옥이 아니라 벽돌식 서양건물이었다.

 

 성공회 한국 전래 1백주년 기념비. 노아의 방주를 본땄다.

 

강화도는 도대체 어찌된 심판인지 강대국의 한국 침략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서 소란을 떨더니(병인양요) 곧이어 미국함대가 등장하여 난리를 쳤고(신미양요) 이어서 1875년에는 일본이 운양호를 앞세워 초지진을 침범하여 결국 병자수호조약을 맺게까지 되었다. 왜 하필이면 강화도에만 몰려든 것일까? 궁금증은 뒤로 하고 당시 영국의 정세를 보면, 영국은 스페인과의 약속에 따라 아시아-아프리카 지역만을 식민지로 삼기로 하여 그 넓은 인도를 집어 삼키고 말레이와 미얀마를 식민지로 만든후 이번에는 극동의 조선까지 넘보려 하였지만 이미 일본과 청국의 세력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성공회나 전파하자고 생각하여 해군 군종신부인 코프를 강화도에 상륙시켜 우리나라에 대한 선교를 본격화하였다.

 

 강화읍 관청리의 표지판. 성공회길이 별도로 지정되어 있다.


코프신부(고요한)는 강화를 중심으로 인천과 수원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인 사제의 양성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여 1914년 강화도에 성공회 신학원을 설립하였다. 바로 지금의 사적 424호인 성공회성당의 한쪽 건물에서 한국인 사제들을 양육하였던 것이다. 신학원 설립은 고종황제의 직접적인 윤허를 받았다. 때문에 성공회는 다른 교단에 비하여 강화도에서 포교활동을 하기가 더욱 용이했다. 신학원 설립  이듬해인 1915년에는 김희준(마가)이라는 분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성공회 신부로 서품되었다. 그후 성공회는 일제시대와 해방후의 혼란기를 거쳐 6.25를 경험하는 동안 꾼준히 성장하여 1965년에는 전국에 하나뿐이던 교구를 서울과 대전 교구로 분할하였다. 한편, 이천환(李天煥)신부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주교의 성좌에 앉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10년후인 1974년에는 대전교구에서 부산교구가 분할되어 현재 3개의 교구로 운영되고 있으며 전국에 약 30곳의 성당이 있다. 한국성공회의 역사와 현황을 소개코자 하는 목적이 아니므로 이쯤해서 그만하고 다시 강화읍의 성공회성당으로 돌아가 보자. 기왕에 기회가 있는 김에 설명을 추가하자면 성공회는 영국에서 Anglican Church라고 하지만 미국에서는 Episcopal Church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성공회인은 영국에서 The Anglican이라고 부르지만 미국에서는 The Episcopalian이라고 부른다. 영국성공회에서 요한 웨슬리에 의해 개신교의 일파인 감리교가 파생되었으며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도 성공회에서 나온 것이다. 영국의 성공회는 다 아는 대로 1534년 헨리8세가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고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으로부터 연유한다. 독일에서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무려 17년 후이다.

 

 강화읍 성당 입구에 있는 종. 성공회 마크가 뚜렷하다. 성당의 종만 해도 순전히 우리나라 스타일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성공회 강화성당의 모습은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생겼다. 넓직한 장방형 건물이다. 말하자면 바질리카 스타일이다. 한국식 건물에 성당을 개설하였으니 운치가 있다. 성당 입구의 대문은 마치 어느 양반집의 소슬 대문처럼 멋이 있다. 문에는 성공회의 상징인 원형 십자가가 뚜렷하다. 대문을 들어서면 종각이 있다. 불교의 범종과 같은 큰 종이다. 종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어서 불교의 종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예배시간을 알리기 위해 종을 뎅뎅 쳤다고 한다. 방주형의 메인 빌딩은 마치 대궐의 전각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강화읍 성당을 건축한 사람은 대궐을 짓던 도편수였다고 한다. 성당 지붕 위에는 십자가가 올려져 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성당에 다니는 교인들을 보고 ‘천주장이’라고 부르며 무던히도 핍박했었다. 더구나 강화읍처럼 전통적인 불교 성향의 지역에서 성공회 성당이 언덕위에 우뚝 서서 사람들에게 어서 성당에 나오라고 종을 뎅뎅 쳤을 것이니 외국문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을 강화에서 사람들의 미움깨나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꿋꿋이 버텨왔으니 과연 감회를 느낄지 않을수 없었다. 쇄국의 핍박속에서도 꾸준이 신앙을 지켜온 성공회였기에 그 집을 사적으로 지정해 놓은 것 같다.


성공회 강화 성당의 바로 아래쪽에는 이른바 용흥궁(龍興宮)이 있다. 강화 도령 철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집이 있었던 곳에 강화 유수가 초가집을 허물고 새로 기와집 여러 칸을 세운 것이 용흥궁이다. 임금이 임금이 되기 전에 대궐이 아닌 민가에서 살았던 집을 어려운 말로 잠저라고 부른다. 마치 잠수함에서처럼 숨어서 은밀하게 지내던 집이라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길에 용흥궁의 입구가 있다. 궁이라고 부르기에는 초라한 기와집이다. 그런데 바로 위에는 진짜 대궐처럼 멋들어지게 보이는 성공회 성당이 있으니 철종을 생각하는 사람들로서는 은근히 속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성당에서 조금 올라가면 고려궁지가 있다. 성공회 성당은 고려와 조선의 사이에 있는 셈이다.

 

 조선성공회 제3세 주교 조마가 기념비 

강화읍 성당에 붙어 있는 아담한 사제관

 사제관과 성당

 정문. 정말 대단한 정문이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입구

 성공회 강화성당 본성당. 천주성전이라고 써있다.

 방주와 같은 모습의 강화읍 성당

 강화읍 성공회 성당 사제관. 태극 문양의 성공회 마크가 인상적이다.

 강화읍에서 세상을 떠난 영국 성공회 알마 수녀 기념비

 바실리카 스타일의 강화읍 성당의 위용

 

 

[온수리 성공회 성당]

온수리의 성공회 성당은 서울 정동에 있는 성공회 성당보다 규모가 더 큰 것처럼 보인다. 정말 웅장한 건물이다. 그 옆에는 원래 옛날부터 있던 성당 건물이 보존되어 있다. 한옥의 성당이다. 성안드레아성당이라는 현판이 선명하다. 잠시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온수리 성당의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사진이 진열되어 있고 예배에 사용하는 각종 성물과 의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귀중한 사료들인것 같았다. 온수리 성당은 1906년 영국인 주교인 조마가(Mark Trollope)가 지었다고 한다. 온수리 옛 성당건물은 우리나라에 서양기독교가 들어 올때의 초기 건물 양식으로 말하자면 동서 절충식이다. 성당 한쪽에는 작은 벽돌집이 한 채 있다. 온수리 성당의 신도였던 김실라와 황아가타가 주민들의 교육을 위해 봉헌한 건물이라고 한다. 현재 그 옆에는 어린이 집이 있어서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 놀고 있다. 온수리에는 영국성공회가 1898년부터 선교를 시작했다고 한다.

 

 온수리 성당의 옛 입구. 교회라는 인식을 준다.

 온수리 옛 성당의 아담한 모습

 온수리 옛 성당은 성안드레 성당이라고 불렀다.

 온수리 옛 성당과 새 성당

 온수리의 사제관

 

 온수리 옛 성단안의 전시품

 온수리에 있는 교육관. 한국인 신자들이 기증한 건물.

 아름다운 온수리 성공회 성당. 1천명을 수용할수 있다. 노아의 방주처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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