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독-오 합병

안슐르쓰(Anschluss)란?

정준극 2009. 2. 6. 22:16

안슐르쓰(Anschluss)


안슐르쓰는 1938년 나치정권에 의해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된 것을 말한다. 독일어로 안슐르쓰는 원래 동맹(Link-up: Joinder)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1938년의 ‘안슐르쓰'는 동맹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합병(Annexation)이었다. 독일어에서 합병이라는 뜻의 단어는 아네크티룽(Annektierung)이란 것이 있다. 이 단어는 주로 군사적으로 다른 나라를 합병한 경우에 사용한다. 하지만 안슐르쓰는 군사적 방법이 아닌 합의적 방법에 의해 두 나라가 하나가 되었다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안슐르쓰와는 다르지만 아우스글라이히(Ausgleich)라는 단어도 있다. 두 나라가 합의하여 한 나라가 되는 경우에 사용한다. 원래는 타협이라는 뜻의 단어이다. 1867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합의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다시 탄생한 것이 아우스글라이히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 일제는 어쩌면 그렇게도 나치 독일과 닮았는지 조선을 자기 나라로 먹으면서 표면적으로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나 실제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고 선전했다. 이경우에 내(內)는 일본을 말했다. 이 내선일체를 독일어로 표현하자면 안슐르쓰에 가깝다. 그래도 나치 독일은 일말의 준법 정신이 있었던지 국민투표를 시행하여 그 결과로서 안슐르쓰를 공식적으로 결정하겠다고 했지만 일본은 을사늑약으로서 조선을 강제로 차지하였다.

 

히틀러가 그린 자화상. 1908-12년 사이의 작품으로 보아진다. 히틀러가 미술공부만 계속했더라도 2차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르며 600만명의 유태인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림실력이 고작 이 정도이기 때문에 비엔나 미술대학은 히틀러에게 일단 집에 가서 더 공부하고 다시 오라고 하면서 입학을 허가 하지 않았다.

 

나치는 오스트리아를 강제 합병하면서 선전을 위해 안슐르쓰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것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실상 오스트리아는 1938년 3월 12일 나치독일에게 물리적으로 합병되었다. 독일이 수년동안 오스트리아에게 합병 압력을 가한 결과였다.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기 이전부터 오스트리아 국내에서의 이른바 ‘제국으로의 귀향’(Heim ins Reich)이라는 운동이 조용한 중에서도 끈질기게 일어났다. 나치당원이든 비나치당원이든 상당수의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우리는 한 나라’라는 기치아래 하임스케르(Heimskher: 고향으로 돌아가기)운동, 즉 안슐르쓰 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를 위해 나치독일은 몇 년전부터 오스트리아 자체의 나치당이 파시스트 주도권을 잡을수 있도록 치밀하게 지원해 왔다. 당시 오스트리아 수상이던 쿠르트 폰 슈슈니그(Kurt von Schuschnigg)는 오스트리아가 독립국으로서 존재하기를 바랐지만 계속적인 압력 때문에 굴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슈슈니그 수상은 국민투표를 시행하여 국민들이 과연 오스트리아가 독립국으로 남아 있는 것이 좋은지 또는 독일과 합병되는 것을 원하는지를 묻고자 했다. 슈슈니그 수상은 국민투표를 하면 국민들이 독립국으로 남아 있기를 선호할 것으로 생각했다. 국민투표는 3월 13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타임지 커버의 쿠르트 폰 슈슈니그


국민투표가 시행되려고 하는 시점에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사전에 치밀하게 조직한 정치 쿠데타를 일으켰다. 만일 국민투표에서 합병을 반대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면 큰일이기 때문에 사전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치당은 독오합병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들을 정부와 의회에서 몰아내는 작업을 벌였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정부가 진행하려던 3월 11일의 국민투표는 취소되었다. 그날부터 오스트리아의 나치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의 정권을 독일에게 이양하는 작업을 빠르게 진행하였다. 바로 다음날인 3월 12일, 독일 국방군(Wehrmacht)이 탱크를 앞세워 전격적으로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에 진군하였다. 합병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나치는 나름대로의 국민투표를 새롭게 준비하였다. 나치는 최대한의 선전으로 국민투표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기로 했다. 결과, 나치는 4월 10일의 국민투표에서 99.73%라는 절대 압도적인 찬성표를 받았다. 불행하게도 합병에 대한 어떠한 반대투쟁도 없었다. 인접국가들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프랑스가 그랬고 영국이 그랬다. 파치스트 이탈리아는 오히려 짐짓 환영의 뜻을 표명하기도 했다. 1차 대전의 연합국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1차 대전을 마무리하면서 맺은 베르사이유 조약과 생제르망(St Germain) 조약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건 서류상으로만이었다. 이들 조약에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연맹을 금지하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오스트리아로 들어온 히틀러가 독일군을 사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합병을 강행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합병은 아돌프 히틀러 숙원사업의 첫 단계였다. 히틀러의 숙원은 1차 대전 이후에 잃은 독일 영토를 수복해야 한다는 것과 아울러 독일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대제국을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한번도 독일 영토에 속한 일이 없으므로 히틀러가 말하는 실지(失地)회복이란 주장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1945년, 2차 대전이 종식을 알릴 때까지 독립적인 주권국가로서 행세를 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4월 27일이었다. 이어 5월에는 연합국들이 오스트리아 임시정부를 승인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오스트리아가 완전한 주권을 되찾은 것은 그로부터 10년후인 1955년이었다. 그동안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열강들은 냉전의 기류에서 서로 패권다툼을 벌이느라고 오스트리아에 대하여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연합군들은 그저 오스트리아의 화려한 궁전에 죽치고 앉아서 포도주나 마시고 있었다.

 

나치 선전상 괴벨이 독일국민들에게 유태인이 국가경제를 망쳤다고 연설하고 있다. 유태인에 대한 적개심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 나치의 커다란 선전작전이었다.


1차 대전에 패한 독일은 재무장을 할수 없었다. 그러나 1938년의 독오 합병시작 이전에 이미 라인란트(Rheinland)에서는 군사 재무장이 이루어졌다. 실지반환에 있어서도 히틀러의 독일은 성과를 거두었다. 1차대전 이후 15년간 프랑스에 속해 있던 자르(Saar)는 1938년 이전에 국민투표를 통하여 독일로 돌아왔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직후인 1939년,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Sudetenland)를 거의 강압적으로 찾아왔다. 주데텐란트의 주민들은 대부분 독일인이어서 항상 분규의 실마리가 되고 있었다. 그해에 나치독일은 리투아니아로부터 메멜란트(Memelland)를 반환받았다. 메멜란트를 되돌려 받은 것은 독일로서 2차 대전이 정식으로 일어나기 전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영토를 차지한 마지막 경우라고 볼수 있다.

 

비엔나 거리의 어떤 유태인 옷감 상점에 '유태 돼지들은 손이나 썩어라'라는 낙서가 적혀 있는 가운데 나치들이 상점 주위를 감시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