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독-오 합병

안슐르쓰 이전의 상황

정준극 2009. 2. 6. 22:17

안슐르쓰 이전의 상황


1806년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의 영향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신성로마제국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독일의 여러 나라, 체코슬로바키아(보헤미아), 헝가리 등을 거느린 대제국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종식 이후 일각에서는 모든 독일 국가들을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실상 이에 대한 논란은 과거 60여년동안 진행되었지만 결론을 얻지 못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만일 독일국가들의 통합을 추진한다면 오스트리아가 주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 통합하여 대제국을 이루고 있었으며 신성로마제국의 본류인 합스부르크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프러시아의 발흥을 예측하지 못했다. 대독일(Grossdeutschland: 그로스도이치란트) 창설과 관련하여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는 라이벌 관계에 있게 되었다.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였다. 만일 프러시아의 주장대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의 통합이 우선되어야 한다면 오스트리아는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는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을 포기하고 단독으로 프러시아의 우산 아래에 들어가야 했다.

 

독-오 합병 이후 인스부르크에서 환영을 받고 있는 히틀러


그러는 와중에 오스트리아-프러시아 간에 해묵은 영토문제를 둘러싼 전투가 간헐적으로 전개되었다. 전투는 대개의 경우,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막강 프러시아 군대를 당할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대독일 구상의 무대에서 프러시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발언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아예 회담탁상에서 제외되기까지 했다. 그러는 사이에 프러시아는 북독일연맹을 창설하고 대부분 독일국가들을 통합하는 결실을 맺었다. 당시 독일은 수많은 소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후인 1871년, 프러시아는 드디어 대망의 독일제국을 창설하게 되었다. 대작업의 막후에는 철혈재상이라는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가 있었다. 프러시아는 독일내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커다란 독일제국을 창설하게 되었지만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의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은 통합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물론 비엔나의 프란츠 요셉 황제도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이 비스마르크에 의한 제2제국의 멤버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프란츠 요셉황제는 만일 오스트리아가 독일제국과 통합한다면 베를린의 제2제국 황제보다 격이 낮은 황제로 남아 있게 될 것이므로 그것이야 말로 심각한 체면문제라고 생각했다.

 

크리슈탈나하트(Kristallnacht)가 지난 다음날, 거리의 유태인 상점 앞에는 나치당원들이 지켜서고 있다. 피켓에는 '여기 보십시오. 독일인들이여, 이 상점은 유태인의 소유입니다. 유태인들은 독일 경제를 파탄하고 있고 독일 직원들에게 굶어 죽을 정도의 임금만을 주고 있습니다. 이 상점의 실제 주인은 유태인 나탄 슈미트입니다.'라고 써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1차 대전의 와중인 1916년에 세상을 떠났다. 프란츠 요셉의 손자 격인  칼이 비록 전쟁 중이었지만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의 다음 황제로 대관식을 가졌다. 그로부터 2년후인 1918년 제1차 대전은 끝났다. 헝가리는 독립하였고 보헤미아도 체코로 독립하였으며 이어 오스트로-헝가리제국에 속해 있던 다른 지역들도 각각 자기의 갈길로 떠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프러시아에 합병되는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보불전쟁 이후 베르사이유 조약과 생제르망 조약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합병을 절대 금지하고 있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또 다시 힘을 기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통합하여 대독일을 이루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독일과의 통합을 반대하는 데에는 오스트리아의 귀족들도 큰 역할을 했다. 기본적으로 오스트리아는 가톨릭국가이며 독일은 개신교 국가였다. 특히 프러시아 중앙정부는 개신교가 장악하고 있었다. 종교가 서로 다른 두 집단의 통합은 이모저모로 많은 문제를 야기할수 있다. 물론 통합을 바라는 세력도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민주세력은 제2제국과의 통합을 희망하였다. 프러시아의 봐이마르헌법과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의 헌법에는 정치적 목적으로 독일어 국가간의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한 조항도 있다. 독일보다도 오스트리아에서의 통합지지가 더욱 활발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서는 더구나 그러했다. 거의 매일 비엔나의 의사당 앞에서는 통합지지 시위가 벌어졌다. 오스트리아 나치당이 막후에서 지원했음은 물론이다. 오스트리아의 제1공화국은 독일 제2제국과의 통합에 대하여 신중하게 검토하지 않을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에 이어 합병당한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의 여인이 너무나 서러워서 눈물을 흘리는 중에 나치 독일군에게 억지로 히틀러식 환영인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