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독-오 합병

평화적 안슐르쓰에 안도? 그럴까?

정준극 2009. 2. 6. 22:23

안슐르쓰에 대한 반응과 영향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비엔나에 입성한 히틀러는 바로 그 다음날부터 본색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던 상당수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눈으로서는 참으로 뜻밖이었다. 사회의 각 분야에서 공포통치가 시작되었다. 수천명의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나치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 만으로 체포되기 시작했다. 거리마다 나치의 합병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연행해 가는 모습이 끊이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양식있는 사람들은 해외로 도피처를 찾아 하나 둘씩 무작정 떠나기 시작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폰 트랍 대령도 그 중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독일군을 따듯하게 환영하고 있는 모습만 보고 있었다. 상당수의 오스트리아 정치지도자들은 목숨이나 부지하자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치를 지지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들은 아무런 폭력 없이 합병이 이루어진데 대하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손을 번쩍 내뻗으며 '하일 히틀러'를 연습했다.


크리스탈나하트에서 거리의 유태인 상점들은 거의 모두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종교계가 문제였다. 독일은 1517년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후 개신교의 본산이 되었다. 개신교가 로마가톨릭에 반기를 들고 종교개혁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들을 저항자(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렀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전통을 지닌 로마가톨릭(기독교)이기 때문에 독일과  입장이 달랐다. 오스트리아제국에서는 한동안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운동이 크게 일어나서 독일에서 비롯된 종교개혁에 가담한 사람들을 박해하였다. 그러나 독일과 합병이 이루어진 이제 로마 가톨릭의 지도자들 조차 개신교인 독일을 지지하고 협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스트리아의 기독교사회당(기사당)은 원래 로마 가톨릭이 주축이 된 정당이었다. 기사당 지도자중의 한사람인 테오도르 인니처(Theodor Innitzer: 1875-1955) 비엔나 대주교는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성명을 내고 ‘비엔나의 로마 가톨릭 신도들은 이같은 정치적 대변혁이 어떠한 유혈도 없이 이루어진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아울러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미래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우리 모두는 새로운 정부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인니처 추기경은 나치에 대한 그의 애매모호한 태도 때문에 나치의 통치기간 중에 '하일 히틀러 카르디날'이라는 별명을 들었고  전후에도 친나치인물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인니처 추기경의 성명서 발표 후에 다른 주교들도 비슷한 내용의 성명서를 내놓았다. 하지만 바티칸의 입장은 달랐다. 바티칸 라디오는 독일의 행동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비엔나의 추기경인 인니처에게 그런 성명서를 낸 연유에 대하여 바티칸에 와서 해명하도록 지시했다. 바티칸을 방문하고 돌아온 인니처 추기경은 어쩔수 없이 오스트리아의 모든 주교들을 대신하여 수정된 성명서를 내놓았다. 내용인즉 두루뭉실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지 아니한 어떠한 것도 승인할 의향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는 것이었다. 바티칸 신문은 인니처 추기경이 처음에 발표한 성명서가 바티칸으로부터 아무런 승인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일 히틀러 카르디날'이라는 별명을 들었던 테오도르 인니처 추기경


오스트리아의 개신교도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마치 가뭄에 단비를 맞은 듯 했다. 로마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에서 개신교(주로 루터교)는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비엔나의 루터교회 회장인 로베르트 카우어(Robert Kauer)는 3월 13일 성명을 내고 히틀러를 ‘오스트리아에 있는 3만5천명 개신교 신자들의 구원자’라고 칭송하며 그를 환영했다. 제1공화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민당 정치인인 칼 렌너(Karl Renner)는 독-오 합병(안슐르쓰)을 지지한다고 발표하고 모든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4월 10일 합병여부를 결정하는 국민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져야 할것이라고 강조했다. 유혈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주장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 렌너는 나치에 협조적이었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수 없었다. [독토르 칼 렌너 링은 그를 기념하여 붙인 거리이름이다. 그는 중앙공동묘지의 대통령묘역에 다른 대통령들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종전후 오스트리아 초대 대통령을 지낸 칼 렌너. 그도 히틀러의 합병을 지지했었다.


외국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타임(TIME)지의 보도가 대부분 국가들의 의견을 반영한다고 볼수 있다. 타임지는 ‘약 2백년전에 같은 영어를 쓰는 스코틀랜드가 영국에 통합되었던 것과 크게 다를바가 없다.’라고 썼다. 영국수상 네빌 챔버레인(Neville Chamberlain)은 하원 연설에서 온갖 의례적인 표현으로서 독일의 영토확장은 크게 걱정할 것이 아니지만 앞으로 예의주시하겠다고만 말했다. 그는 ‘지금은 어떤 급한 결정을 내릴 단계도 아니며 부주의한 말을 할 때도 아니다. 우리는 냉정한 판단력으로 사태를 주시하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열국들이 반응이 이렇다 보니 히틀러로서는 자신감이 생기지 않을수 없었다. 히틀러는 독일어권의 지역들을 합병함으로서 제3제국을 확장한다는 목적을 위해서는 더욱 공격적인 전략을 사용해도 관계없다고 생각했다. 결과, 히틀러는 곧이어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어권 구역인 주데텐란트를 무혈 합병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이를 바탕으로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는데 성공했다.

  

1938년 11월 11일 비엔나에서의 크리슈탈나하트. 나치는 유태인을 청소한다고 생각하여 무조건 체포하여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유례없는 공개투표


4월 10일 오스트리아 국민투표의 결과는 비록 조작된 것은 아니지만 투표의 절차는 결코 민주적이라고 할수 없는 것이었다. 이날의 국민투표는 자유선거도 아니고 비밀선거도 아니었다. 투표자가 자기가 투표한 용지를 투표함에 넣는 일반적인 절차가 아니었다. 나치에 물든 정부의 관리들이 기표소 바로 옆에 서 있다가 투표를 마치고 나온 사람으로부터 투표용지를 손으로 받아 정리했다. 그러니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투표용지 자체도 문제였다. 투표용지에는 ‘1938년 3월 13일 법적으로 효력을 발생한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의 재통일을 찬성합니까? 우리의 지도자인 아돌프 히틀러의 당을 지지합니까? 라는 두가지 설문이 있고 그 아래에 있는 예(Ja)와 아니오(Nein)칸에 찬성과 반대여부를 표시하도록 되어 있다. 문제는 Ja를 표시하는 칸은 대문짝만큼 크고 Nein을 표시하는 칸은 아주 작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합병을 재통일(Wiederereinigung: Reunification)이라고 적은 것도 국민들을 기만한 표현이었다. 사실상 재통일이라는 말이 뭐가 뭔지 잘 모르는 국민들도 많았다. 어떤 사람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다시 합치는 내용인줄 알았다고 말할 정도이니 말해야 무엇하랴! 원래 슈슈니그 수상은 3월 13일에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오스트리아가 독립국으로 존재할 것인지 독일과 합병할 것인지를 묻기로 계획했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히틀러의 분노를 사서 취소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어떤 시골에서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3월 13일의 국민투표 용지를 나누어 주고 투표를 실시했다. 예를 들어 인너빌그라텐(Innervillgraten)마을이었다. 비록 독일 국방군이 3월 12일에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넘어 침공하기는 했지만 전국을 장악하는 데에는 사나흘이 더 걸렸기 때문에 아무리 나치라고 해도 오스트리아의 시골을 장악하는데에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인너빌그라텐에서의 투표결과는 마을주민 95%가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안슐르쓰에 대한 국민투표 용지. Ja라는 난의 칸을 Nein이라는 칸보다 훨씨 크게 만드어놓았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을 아주 크게 써 놓았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에게 강제로 합병을 당한 후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 제3제국의 일원으로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45년 4월 27일 오스트리아 임시정부가 합병의 ‘원천적 무효’(Null und Nichtig)를 선언함으로서 독일과의 관계는 끝을 맺었다. 전쟁후 연합국이 점령한 오스트리아는 독일과는 별도의 국가로서 인정을 받았지만 정식으로 주권을 인정받은 것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1955년 오스트리아 국가조약이 체결되고 오스트리아가 영세중립국임을 선언한 때였다.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냐하면 전후에 동서 양진영의 냉전이 급속도로 진전되어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치는 유태인들을 무조건 연행하여 맨손으로 길바닥 청소를 히도록 시키고 즐거워하고 있다.


안슐르쓰 메달


안슐르쓰 메달(훈장)은 오스트리아가 독일제국에 귀속한 것을 기념하여 1938년 5월 1일부로 수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통 안슐르쓰 메달이라고 불리지만 원래 명칭은 ‘1938년 3월 13일 기념 메달’(Die Medaille zur Erinnerung an den 13 März 1938)이다. 독일군은 1938년 3월 12일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다.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무혈점령함으로서 체코슬로바키아 등을 위협하는 양 날개를 갖추게 되었다.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은 오스트리아 나치당이 사전에 은밀하게 충분히 준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히틀러의 첫 작품인 오스트리아 합병이 이루어져 장차 유럽의 판도를 참혹하게 바꾸는 불씨를 마련했지만 세계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열방들은 오랫동안 형제처럼 지내던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연합한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냐면서 가볍게 생각했다.


안슐르쓰 메달은 전체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에게 수여되었다. 합병에 대한 공로 때문이었다. 메달은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넘어 처음으로 진격했던 독일 국방군과 친위대(SS) 대원 모두에게도 수여되었다. 1938년 5월부터 시작하여 1940년 12월 13일까지 모두 31만 8천여명에게 수여되었다. 메달의 앞면에는 1938년 독일 나치 전당대회의 상징을 그려 넣었다. 두 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한 사람은 제3제국의 문장을 그린 나치기를 들고 있고 다른 사람은 부서진 낫을 들고 있다. 뒷면에는 안슐르쓰의 날인 ‘1938년 3월 13일’이 적혀 있으며 둘레에는 ‘한 민족, 한 국가, 한 총통(지도자)’(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라는 글이 적혀 있다. 합병 이후 안슐르쓰 메달을 달지 못한 사람들은 공연히 주눅이 들어 지내야 했고 반면에 안슐르쓰 메달을 건 사람들은 목에 깁스를 한듯 의기양양하게 지냈다. 오늘날 비엔나 나슈마르크트의 벼룩시장에 가면 어쩌다가 때묻은 안슐르쓰 메달을 파는 것을 볼수 있다. 하지만 그 메달이 그 무슨 귀중한 물건이라고 사겠는가? 돈을 얹어서 가져가라고 하면 겨우 가져갈까 말까일 것이다.


크리스탈나하트 후에 체포된 유태인들. 강제수용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