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독-오 합병

히틀러의 재빠른 움직임과 국민투표

정준극 2009. 2. 6. 22:19

히틀러의 재빠른 움직임

 

잘츠부르크에서 북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브라우나우 암 인 마을. 여기가 히틀러의 생가이다. 길가의 검을 돌에 파치슴을 경계하자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1889년 오스트리아의 서쪽, 잘츠부르크에서 머지않은 곳에 있는 브라우나우 암 인(Braunau am Inn)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관원이었다. 히틀러가 유태계라는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자. 다시 히틀로로 돌아가서, 어린 히틀러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청년이 되자 미술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비엔나 미술대학(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 )에 입학원서를 두 번이나 냈다. 그러나 모두 거절당했다. 그 실력가지고는 미술대학에 들어 올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히틀러는 1년여 동안 비엔나에 머물면서 그림엽서와 같은 것을 그리면서 겨우 돈을 벌어 지내다가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독일의 뮌헨으로 가서 군대에 들어갔다. 만일 당시에 비엔나 미술대학이 히틀러를 학생으로 선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세상이 많이 변했을 것이다. 히틀러는 비엔나에 있을 때 돈을 벌기 위해 임페리알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38년 3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합병을 선포하고 축하하기 위해 비엔나를 방문했을 때 그는 임페리알 호텔 전체를 차지하고 측근들과 함께 묵었다. 감회가 깊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 암 인(Braunau am Inn)의 히틀러 생가 앞길에 놓여 있는 '파치슴 경계석'(Mahnstein). 무어라고 써 있느냐하면 FUR FRIEDEN FREIHEIT UND DEMOKRATIE NIE WIEDER FASCHISMUS MILLIONEN TOTE MANHEN 이라고 써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평화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다시는 파치슴이 있어서는 안된다. 수백만명의 죽음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할수 있다.
                                            

뛰어난 웅변술의 히틀러는 대중들을 선동하여 독일에서 재빠르게 권력을 잡게 되었다. 이제 그의 오랜 숙원사업을 완성할 단계에 이르렀다. 독일인에 의한 세상을 만드는 욕망이었다. 첫 단계가 오스트리아였다. 히틀러는 1938년 2월 12일 바바리아의 베르흐테스가덴에서 오스트리아 수상 쿠르트 슈슈니그를 만났다. 히틀러는 슈슈니그 수상에게 오스트리아에서 정당의 정치활동 금지를 해제할 것, 정당의 완전자유 활동을 보장할 것, 수감된 나치당원들을 전원 석방할 것, 나치당원들이 정부에 참여토록 할것 등을 반강압적으로 요구하였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동원하겠다고 협박하였다. 비엔나에 돌아온 슈슈니그는 히틀러의 요구에 부응하여 변호사 출신으로 친나치 인사인 자이쓰-인크바르트(Seyss-Inquart)를 내무상으로 임명하고 또 다른 나치인 에드문트 글라이제-호흐슈테나우(Edmund Glaise-Horstenau)를 무임소장관에 임명했다. 히틀러의 말이라면 통하지 않는 것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독일의 제3제국에서는 히틀러를 ‘총통’(Der Führer)이라고 부르며 충성을 다짐했다. 실제로 슈슈니그 수상은 1938년 2월에 히틀러를 만나기 전부터 독일로부터 여러 압력을 받아왔다. 그런 압력의 결과로 슈슈니그는 오스트리아군 참모총장인 알프레드 얀자(Alfred Jansa) 장군을 직위해제했다. 얀자 장군은 막료들과 함께 독일의 가상 침공에 대비한 시나리오를 개발했었다. 히틀러로서는 돈 안들이고 오스트리아군을 무력화한 셈이었다.

 

1938년 3월 히틀러의 비엔나 입성. 호프부르크의 헬덴플라츠.

 

슈슈니그 수상이 친나치분자들을 내각에 임명한 것을 후회하는 데에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무상으로 임명된 자이쓰-인크바르트와 기타 나치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 정부를 몽땅 들어서 나치에게 바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차한 슈슈니그는 국민들의 애국심에 불을 지르며 자기를 지지하여 줄것을 호소했다. 이러한 틈을 이용하여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1934년 2월 오스트리아에서 내란이 일어난후 처음으로 얼굴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공산당은 오스트리아 정부를 무조건 지지한다고 밝혔다. 사회당은 슈슈니그에게 사회당에 대하여 좀더 양보하면 지지하겠다고 말했다. 이렇듯 오스트리아의 정치판은 혼돈 자체였다.


비엔나에 입성한 히틀러를 마중하는 신임 수상 아르투르 자이쓰-인크바르트. 

 

국민투표(Referendum)?


슈슈니그 수상은 오스트리아를 독일에게 먹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나섰다. 슈슈니그는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국민투표의 결과, 오스트리아가 독립국으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고 나오면 그 결과를 가지고 히틀러와 대항할 생각이었다. 슈슈니그는 1938년 3월 13일에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슈슈니그는 국민투표에서 많은 표를 얻기 위해 투표자의 연령을 24세로 높였다. 당시 20대 초반의 청년들은 어찌된 일인지 나치이념에 크게 동조하고 있었다. 나치 청년들을 투표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연령을 높였던 것이다. 국민투표는 슈슈니그에게 있어서 위험한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치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과연! 히틀러는 슈슈니그가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한 다음날 즉각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들어내 보였다. 히틀러는 슈슈니그의 국민투표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독일제국으로서는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선언했다. 히틀러의 선전상인 괴링은 한 술 더 떠서 오스트리아에서 수많은 국민들이 현 정권의 국민투표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키고 있으며 독일군이 들어와서 질서를 유지하여 줄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보도자료를 내 놓았다. 슈슈니그는 즉각 반대성명을 내고 오스트리아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보도자료는 거짓이라고 주장했으나 애석하게도 슈슈니그의 소리는 미약했다. 국민투표는 3월 18일 히틀러가 합병을 선언하고 나서도 한참 후인 4월 10일 형식적으로 실시되었다.

 

헬덴플라츠에서 연설하는 히틀러. 1938년 3월 15일.


3월 11일 히틀러는 슈슈니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합병에 대한 전권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위임하라는 것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군사침범을 할수 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히틀러의 최후통첩은 3월 12일 정오에 효력이 상실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히틀러는 마치 관용을 베풀듯 두시간을 연장하여 오후 2시까지 전권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회답을 듣기도 전인 오후 1시에 이미 독일 국방군에게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실제로 히틀러는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 선전상에게 최후통첩의 2시간 연장을 국방군이 국경으로 진격한 한시간 후에 통보토록 하였다. 발등에 불이 붙은 슈슈니그는 나머지 한시간동안 영국과 프랑스에게 지원을 부탁하느라고 피땀을 흘렸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마치 강건너 불보듯 딴청을 부리기만 했다. 슈슈니그는 그날밤 수상직을 사퇴하였다. 슈슈니그는 수상직 사퇴를 발표하는 라디오 연설에서 국민들이 불필요하게 피를 흘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치에게 정부를 넘겨주는 것이 현실로서 어쩔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한편, 오스트리아 대통령인 빌헬름 미클라스(Wilhelm Niklas)는 나치인 자이쓰-인크바르트를 수상으로 임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수상으로 추천했다.

 

나치를 열렬히 환영하는 비엔나 시민들

 

나치는 대단히 조직적이었다. 미리부터 발을 들여밀고 있던 나치는 불과 몇시간 안에 비엔나의 주요 관공서를 모두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경찰을 관장하는 내무성이 우선적으로 나치의 손에 들어갔다. 내무성 장관은 아직도 자이쓰-인크바르트였다. 그런중에도 니클라스 대통령이 계속 자이쓰-인크바르트의 수상임명을 거부하자 자이쓰-인크바르트는 어쩔수 없이 오스트리아 수상이라는 공식직함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오스트리아의 수상으로서 히틀러에게 독일 국방군을 동원하여 오스트리아의 질서를 유지해 달라고 요청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항을 전해 들은 히틀러는 분노를 터트렸다. 히틀러는 밤 10시쯤에 괴링과 합작하여 오스트리아 정부가 독일 정부에게 공식적으로 군대 파견을 요청한다는 가짜 전문(電文)을 만들어 발표했다. 한편, 비엔나에서는 자정이 임박하여서 모든 관공서가 나치의 손에 들어갔으며 구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정치인들은 거의 모두 체포되었다. 니클라스 대통령은 자이쓰-이크바르트를 수상으로 임명하지 않을수 없었다.  

 

히틀러 유겐트가 유태인들에게 거리 청소를 강제로 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