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독-오 합병

테오도르 인니처 대주교의 처세

정준극 2010. 5. 23. 05:17

테오도르 인니처 대주교의 처세

사실상 히틀러 지지 - '하일 히틀러 대주교'라는 별명

대성당박물관 설립

 

테오도르 인니처(Theodor Innitzer: 1875-1955) 대주교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시기에 비엔나 대주교를 지낸 흘러간 사람이지만 나치에 대한 그의 한결같지 못한 처세로 인하여 아직까지도 일반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는 유명(?)인사이다. 로마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에서 비엔나 대주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하다. 말하자면 전체 오스트리아의 로마 가톨릭을 대표할 정도의 높은 신분이다. 그런 그가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비엔나 대주교로서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찬양했다. 그는 합병을 용인하는 성명서에 '하일 히틀러'라고 쓰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니처 대주교를 '하일 히틀러 대주교'라며 비난했다. 비엔나 대주교 인니처가 히틀러를 찬양하는 언행을 하자 바티칸은 심사가 몹씨 불편했다. 기본적으로 로마 가톨릭의 지도자로서 개신교인 독일을 두둔하고 나섰을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주의자, 국수주의자, 독재자 등등의 수식어가 붙은 히틀러를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교황이 인니처의 무분별한 언행에 대하여 브레이크를 걸자 인니처는 어쩔수 없었는지 입장을 바꾸어 '히틀러가 무슨 우리의 지도자냐? 우리의 지도자는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라며 나치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인니처의 조삼모사 행태에 대하여 사람들은 '아니, 생긴 것은 멀쩡한 양반이 어찌하여 생긴 값도 못한단 말인가?'라면서 인니처를 멸시하였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인니처가 오히려 나치로부터 핍박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인니처가 나치에 협조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나마 오스트리아의 로마 가톨릭이 박해를 덜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제 테오도르 인니처 대주교의 이력서가 어떠한지, 그리고 히틀러와 관련하여 어떤 입장이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자. 비엔나 사람들이라면 아직까지도 인니처라는 이름을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오도르 인니처 비엔나대주교. 1933년.

 

로마 교황청의 추기경인 테오도르 인니처 대주교는 187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보헤미아의 노베 츠볼라니(Nove Zvolani)라는 마을에서 공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비엔나가 아닌 변방지역 출신의 사람은 은근한 푸대접을 받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보헤미아 출신들은 집시라는 선입감 때문에 하류로 취급 당하기가 십상이었다. 인니처는 비록 보헤미아의 시골에서 태어나고 더구나 그의 아버지가 이름도 없는 공장 노동자였지만 나중에는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비엔나의 대주교가 되었다. 실로 대단한 새마을 성공사례이며 인간승리가 아닐수 없다. 보헤미아의 고향 마을에서 겨우 초등교육을 마친 인니처는 먹고 살기 위해 어떤 방직공작의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교회에는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 교구교회의 사제는 그런 인니처를 어여삐 보아서 발벗고 도와주기 시작했다. 인니처는 교구교회 사제의 도움으로 고등학교(김나지움)에 다닐수 있었다. 하지만 방직공장에서의 일은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무려 8년만에 김나지움을 마칠수 있었다.

 

인니처가 소년시절 다녔던 노베 츠볼라니의 교회

 

인니처는 자기의 아버지처럼 공장 노동자로서 평생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때에 교구사제가 인니처에게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사제가 되라고 권면하였다. 인니처는 인생을 바꾸어보기로 결심하고 1898년 김나지움을 졸업하자마자 비엔나대학교의 신학부에 입학하였으며 4년후에는 신학부를 졸업하고 드디어 사제로서 서품을 받았다. 우수한 신학생이었던 그는 기왕 공부하는 김에 박사학위를 받아 자기도 좋고 주님께서도 기뻐하는 인물이 되고 싶었다. 예나 지금이나 오스트리아에서는 박사가 큰 벼슬이어서 어깨에 힘을 주며 걸어다닐수 있었다. 인니처는 드디어 4년후인 1906년에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모두들 '대단한 사람이야!'라면서 박수를 보냈다. 곧이어 비엔나대학교 신학부의 조교가 되었으며 1911년부터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비엔나대학교 신학부 교수가 되어 1932년 비엔나 대주교로 선출되기 까지 무려 21년을 대학교수로서 존경을 받으며 지냈다. 인니처는 신약성경 주해의 권위자로서 신약연구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한때는 비엔나대학교 신학대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리고 비엔나대주교로 임명되기 직전인 1929년부터 1년동안은 요한 쇼버(Johann Schober) 수상이 이끄는 내각의 사회부장관을 지냈다. 1932년 비엔나대주교로 임명된 그는 이듬해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비엔나대주교로서 그의 업적중의 하나는 슈테판성당 옆에 비엔나대성당박물관(Dom Museum)을 설립한 것이다.

 

요한 쇼버 수상(1874-1932)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20세기 오스트리아의 역사에 있어서 인니처의 역할은 그의 정치적 관여때문에 아직까지도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즉, '오스트리아의 로마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는 비엔나대주교로서 히틀러를 지지하다니 말이나 되는가?'라는 비난을 받았는가 하면 '아니야! 그나마 히틀러를 지지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교회가 박해를 받지 않을수 있었어! 그리고 속으로는 얼마나 나치를 반대했는지 몰라! 훌륭한 사람이야!'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교회의 수장으로서 정치문제에 관여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처사였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기야 우리나라에서는 멋도 모르는 좌파 천주교 신부들이 기회만 있으면 친북 및 반체제로 날뛰고 있으니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며 사제로서의 역할인지 알수 없다는 얘기들이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것은 1938년이었다. 그 이전의 오스트리아 정부는 사실상 혼돈의 연속이었다. 특히 1934-38년 엥겔버트 돌푸쓰와 쿠르트 슈슈니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파치스트 정부의 산하에서는 사회와 경제가 대단한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파치스트 정권의 정책은 로마 가톨릭이라는 커다란 기틀 아래에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에 기본을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하여 어떤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무어라고 강력히 주장하면 거의 무조건 먹혀 들어가던 시기였다. 1938년, 오스트리아는 독일 제3제국과의 합병여부를 놓고 큰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나치의 히틀러는 '우리는 같은 말을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라면서 날이면 날마다 합병이 당연하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식자들은 '잘못하다가는 히틀러의 군화에 짓밟혀서 헤어나지 못한다'라면서 경계하던 때였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눈과 귀는 교회의 입장에 쏠리고 있었다. 교회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인니처 대주교와 그를 추종하는 여러 주교들은 독-오합병을 용인하는 선언서에 서명을 했다. 인니처 대주교는 한술 더 떠서 선언서 말미에 '하일 히틀러'(히틀러 만세)라고 썼다. 이를 본 나치는 대만족이었다. 나치는 주교들의 허락도 받지 않은채 인니처를 비롯한 여러 주교들이 서명한 선언서를 인쇄하여 독일의 전역에 뿌렸다. 나치는 '보아라! 오스트리아의 로마 가톨릭 지도자들이 모두 합병을 지지했다'면서 의기양양해 하였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바티칸의 비오11세(Pius XI) 교황은 '아니, 인니처 이 사람이 도대체 정신이 있나 없나?'라면서 인니처에게 당장 해명서를 작성하여 발표하라고 지시했다. 인니처는 로마교황청의 추기경이므로 당연히 교황의 지시를 받아들여야 했다. 인니처는 할수 없이 '사실은 이러저러합니다'라는 내용의 해명서를 만들어 서명하고 교황에게 제출하였다. 로마의 L'Osservatore Romano 라는 유력지는 인니처의 해명서 전문을 게재하였다. 나치는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인니처가 배신했다고 하면서 이를 북북 갈았다. 반면, 로마 교황청은 이번 기회에 파치스트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면서 한 발자욱 앞서 나갔다.

 

교황 비오11세. 1930년.

 

로마 교황청의 라디오는 독일의 행동에 대하여 격렬하게 비난했다. 물론 그같은 비난의 배경에는 개신교 국가인 독일이 로마 가톨릭인 오스트리아를 압박하여 개신교 국가로 합병한데 대한 불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잘못하다가 다른 로마 가톨릭 국가들도 개신교 국가에게 먹혀 들어가면 이거야 말로 체면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비서이며 교황청의 공보담당자인 파첼리(Pacelli)추기경은 인니처 대주교의 해명이 정확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으므로 당장 로마로 와서 자세히 해명토록 요청하였다. 로마에 온 인니처는 교황을 알현하기 전에 먼저 파첼리 추기경과 만났다. 파첼리는 인니처에게 불같이 화를 내면서 '선언문에 하일 히틀러라고 쓰기까지 했다니 도대체 정신이 있는 것이요 없는 것이요?'라면서 몰아 붙였다. 그러면서 인니처에게 '입장을 확실히 하시요. 그렇지 않으면 곤란할 것이요'라고 말했다. 인니처는 새로 성명서를 작성하고 오스트리아 전체 주교들을 대표하여 서명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가 새로 작성한 성명서의 골자는 '오스트리아 주교들은 엄숙히 선언하노니....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반하는 어떠한 사항도 인정할수 없도다'라는 것이었다. 즉,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합병이 하나님의 법에 합당하지 아니하므로 지지할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바티칸신문은 인니처 대주교가 얼마전에 히틀러를 지지한다고 서명한 선언문이 로마 교황청의 승인을 받지 않은 것이며 교황 성하께서는 물론 대단히 중립적이시지만 금번 인니처 대주교의 견해에 대하여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계시다고 전했다.

 

카디날 인니처

 

인니처가 원래와는 다른 성명서를 내었고 또 바티칸이 나치에 행동에 대하여 세찬 거부반응을 보이자 나치는 오스트리아의 로마 가톨릭과 화해를 취소하고 교회의 행사들을 금지했으며 심지어는 가톨릭 신문의 발간을 중지했다. 인니처는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자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교회가 핍박을 받게 되자 다시 나치에 협조적이지 아니할수 없었다. 1938년 4월, 인니처는 히틀러의 생일에 즈음하여 오스트리아의 모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스와스티카 깃발을 걸고 축하의 종을 울리며 히틀러를 위해 기도하도록 지시했다. 이같은 조치에 대하여 비엔나의 상당수 로마 가톨릭 교회들은 분노의 심정을 금치 못했다. 그러자 인니처는 그해 10월에 수천명의 가톨릭 청년들에게 초청장을 보내 슈테판 성당에 모여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가지도록 했다. 그러면서 또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청년들에게 강론을 통하여 '세상에는 하나의 지도자(휘러: 총통)가 있을 뿐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강조했다. 인니처가 사실상 히틀러를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는 발언을 하자 극렬 나치분자 100 여명은 곧바로 인니처 대주교의 관저에 몰려가서 기물을 부수며 쑥대밭을 만들었다. 히틀러 유겐트(Hitler Jugend) 출신의 청년들이었다.

 

인니처는 나치의 점령 기간 중에 나치의 반유태주의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그는 나치의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특히 비엔나의 유태인들과 오스트리아 전역에 있는 가톨릭 집시들에 대한 나치의 잔혹한 박해를 비난했다. 전쟁후, 인니처가 나치정권에 보여주었던 태도에 대하여 왈가왈부 논란이 거셌다.  인니처의 처신은 종잡을수 없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나치정권에서 살아남은 오스트리아 로마 가톨릭의 핵심인사들은 인니처를 '하일 히틀러 추기경'이라면서 비난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인니처가 실은 나치에 반대하여 올바른 처신을 했다고 지지했다. 그런가하면 인니처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이면서도 러시아에서의 참혹한 정책을 반대하는 주장을 했다. 특히 우크라이나와 북부 코카서스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굶주림에 죽어갔으며 심지어는 인육까지도 먹어야 하는 참상을 서방에 알리는 노력을 하였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지지하면서도 그 전쟁으로 인한 참상은 반대하였던 것이다.

 

인니처는 1955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교적 오래 살아서 향년 80세였다. 영욕이 엇갈린 인생이었다. 보헤미아의 가난한 공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비엔나 대주교가 된 입지적인 인물이었지만 나치에 대한 엇갈린 입장으로 비난과 지지를 함께 받았던 사람이었다. 비엔나 교구는 '인니처 추기경 상'(Kardinal-Innitzer-Preis)를 정하여 해마다 우수 과학자와 학자에게 상을 주고 있다.  비엔나의 19구 되블링에는 인니처 추기경을 기념하여 카르디날 인니처 플라츠(Kardinal-Innitzer-Platz)가 있다.

 

인니처 추기경 기념상. 1932-1955년간 비엔나 대주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