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독-오 합병

독일군의 오스트리아 입성

정준극 2009. 2. 6. 22:21

독일군의 오스트리아 입성

 

1938년 3월 12일, 독일군과 오스트리아 국경수비대가 독일-오스트리아의 국경표지를 철거하고 있다. 주민들이 즐거운 듯이 바라보고 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을 것이다.


1938년 3월 12일 아침, 마침내 독일 국방군(베르마하트: Wehrmacht)은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수비하던 오스트리아군은 외국 군대가 진주하는데에도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마치 손님을 맞이하듯 교통안내를 했을 뿐이었다. 어이없게도 독일군은 오히려 시민들의 히틀러식 환영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손을 앞으로 치켜들고 ‘하일 히틀러’(Heil Hitler)와 '지그 하일'(Sieg Heil)을 소리 높이 외쳤다. 거리의 시민들은 거미처럼 생긴 나치깃발과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침공을 ‘꽃의 전쟁’(블루멘크리그: Blumenkrieg)이라고 불렸다. 독일 국방군의 오스트리아 국경 침입은 독일 국방군으로서는 처음 갖는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그래서인지 부대간에 협조나 연락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일도 많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아무런 저항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침공에서 얻은 교훈을 나중에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때에 십분 활용하였다.

 

1938년 3월 15일 히틀러는 비엔나의 헬덴플라츠에 모인 20만명 이상의 시민들에게 '이제 오스트리아는 고향으로 돌아왔다'면서 합병을 선언했다.

 

히틀러가 탄 자동차는 그날 정오쯤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다. 히틀러는 우정 자기의 고향인 브라나우 암 인(Branau am Inn)을 거쳐서 비엔나로 향하여 갔다. 저녁에는 린츠(Linz)에 도착하였다. 히틀러는 린츠의 시청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너무나 열광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나치의 핵심인물인 괴링마저도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그날 저녁 괴링은 베를린에 전화를 걸어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열렬한 환영이었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우리를 그렇게도 환영하고 지지할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지나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 히틀러에 대한 환영은 3월 14일 비엔나에 도착하였을 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거리는 그야말로 열광적인 환영인파로 출렁거렸다. 건물마다 스와스티카의 나치 깃발을 내려 걸었다.  헬덴플라츠(영웅광장)에는 당국 추산으로 20만명의 시민들이 몰려왔다. 히틀러가 '여러분! 오스트리아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왔다'라고 고함치는 것을 듣기 위해서였다.

 

헬덴플라츠에서 히틀러가 했던 연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Als Führer und Kanzler der deutschen Nation und des Reiches melde ich vor der deutschen Geschichte nunmehr den Eintritt meiner Heimat in das Deutsche Reich." 번역하면, 독일국가와 제국의 지도자(총통) 및 수상으로서 나는 독일 역사에게 이제 나의 고국이 독일 제국에 들어왔음을 선언하노라'이다. 히틀러는 또한 '독일 민족의 가장 오래된 동쪽 지방이 이 시점으로부터 독일 제국의 가장 새로운 요새가 되었다'였다. 위대한 오스트리아 제국이 독일의 새로운 요새가 되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오스트리아 국민들로서는 실로 자존심 상하는 억지 연설이었지만 왜그런지 헬덴플라츠에 모인 수많은 비엔나 시민들은 히틀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열광적인 환호와 함께 '하일 히틀러' '지그 하일'을 소리 높이 외치고 나치식 경례로서 화답하였다. 나중에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일부 외신들은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잔혹한 방법으로 합병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오스트리아 국민들은) 비록 죽음을 당하더라도 독일과의 합병이 당연했다는 것을 말했을 것이다. 나의 정치적인 투쟁은 국민들의 사랑으로 쟁취한 것이다. 내가 그러한 국민들의 사랑을 직접 경험한 것은 국경을 넘어 들어왔을 때였다. 우리는 군림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해방자로서 온 것이다.” 

 

 나치의 유태인 상점에서의 불매운동. Deutsche! Wehrt Euch! Kauft nicht bei Juden!이라고 쓴 간판을 들고 있다. 번역하면, '독일국민들이여, 그대들이 막아야 한다. 유태인들로부터 물건을 사지 말자.'이다.


오스트리아 국회는 독일의 국방군이 오스트리아로 진격해 온 다음날인 1938년 3월 13일 독일과의 합병을 합법적이라고 즉각 승인했다. 다만, 두 마을이 합치는 것도 아니고 나라와 나라가 합치는 중차대한 문제는 국민투표를 통하여 결정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국민투표를 곧 시행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국회가 일단 합병을 합법화하자 오스트리아(외스터라이히)라는 역사적인 나라 이름은 사라지고 대신 독일제국에 속한 오스트마르크(Ostmark) 지방이 되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도(道)나 미국의 주(州)와 같은 신분이 되었다. 자이쓰-인크바르트 수상은 초대 오스트마르크 총독(Governor)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4월 10일에 실시된 국민투표는 공식적으로 99.73%가 합병에 찬성하는 기록을 세웠다. [국민투표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로 소개함]

 

쿠르트 슈슈니그 수상(1897-1977)


반대세력은 가차 없이 제거하는 히틀러의 잔인한 방법은 국민투표 이전부터 즉각적으로 은밀하게 착수되었다. 따지고 보면 히틀러의 반대세력 제거 작전은 독일 국방군이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넘는 시점보다 훨씬 이전에 진행되었다.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와 나치 친위대(SS: Schutzstaffel: Schutz는 방위라는 뜻이며 Staffel은 사다리의 계단을 뜻함) 특별부대는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기도 전에 비엔나에 도착하여 리하르트 슈미츠(Richard Schmitz), 레오폴드 휘글(Leopold Figl), 프란츠 올라(Franz Olah)와 같은 제1공화국의 명망 있는 정치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나치 친위대는 3월 13일 국회에서의 합병 합법 발표가 있은 때부터 4월 10일 국민투표가 이루어질 때까지 불과 두어 주간 만에 사회민주당, 공산당, 기타 재야정치인, 그리고 유태인 지도자들을 연행하여 대부분 투옥했고 상당수는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내무성부터 장악한 나치는 친위대의 인솔아래 경찰과 국방군의 협력으로 단 며칠만에 7만여명을 체포했다. 그리고 물론 당연한 사실이지만 국민투표는 나치당의 책략에 따라 시행된 것이었다. 특히 나치는 유권자들이 투표를 포기토록 하는 전략을 구사하여 결과적으로 전체 유권자의 약 10%인 40만명이 투표를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투표를 포기한 사람의 대부분은 좌익 정당의 멤버이거나 유태인이었다.


헬덴플라츠에 도착한 히틀러가 비엔나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 개선장군도 이런 개선장군이 없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