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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오페레타 ‘씨씨’(Sissy)와 크라이슬러

정준극 2009. 2. 15. 20:18

참고자료

오페레타 ‘씨씨’(Sissy)와 크라이슬러 

 

프릿츠 크라이슬러
 

지금으로부터 70여년전인 1932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를 지낸 다음날이다. 비엔나 중심지역에 있는 나슈 마르크트 길 건너의 ‘데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에는 초저녁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오페레타 ‘씨씨’의 첫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테아터 안 데어 빈’은 일찍이 베토벤의 ‘휘델리오’, 레하르의 '메리 위도우',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 등 수많은 작품들이 초연된 극장이다. 이처럼 유서깊은 극장에서 이번에는 비엔나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씨씨‘에 대한 오페레타가 막을 올리게 된 것이다. 비엔나 사람이라면 씨씨(Sissi)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오페레타 '씨씨'는 바바리아 공작 막시밀리안의 딸 엘리자베트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젊은 황제 프란츠 요셉과 결혼하는 스토리이다. 씨씨는 엘리자베트의 애칭이다. 프란츠 요셉 황제와 약혼할 때에 씨씨는 열여섯살의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돌이켜보건대 두 사람의 결혼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씨씨에게는 언니 헬렌(네네)이 있었다. 씨씨의 어머니는 큰 딸 네네를 젊은 황제 프란츠 요셉과 결혼시키고자 했다. 프란츠 요셉 황제의 어머니는 네네와 씨씨의 어머니의 언니였으므로 자매 사이인 두 사람은 벌써부터 네네와 프란츠 요셉을 결혼시키려고 다짐하고 있었다. 네네와 프란츠 요셉의 약혼 발표를 위한 만남은 잘츠부르크에서 멀지않은 바드 이슐의 황실 별장에서 1853년 8월 19일에 이루어지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황실의 파티에서 프란츠 요셉 황제가 어머니의 의중에 따라 네네와 결혼하겠다고 발표만 하면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1851년의 Theater an der Wien. 야콥 알트 그림. 크라이슬러의 오페레타 '씨씨'가 초연되었다.


씨씨의 어머니는 어린 씨씨를 뮌헨 부근의 포쎈호펜(Possenhofen) 저택에 혼자 남겨 두고 바드 이슐로 가기가 어려워 씨씨도 함께 데려갔다. 황실의 파티가 열리기 며칠 전에 바드 이슐에 도착한 씨씨는 별로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혼자서 말을 타거나 산책을 하며 지냈다. 씨씨는 승마를 대단히 좋아했다. 황실의 파티가 열리는 바로 그 날도 씨씨는 승마를 한후 냇가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다. 그런 씨씨를 마침 지나가던 프란츠 요셉 황제가 보게 되었다. 프란츠 요셉은 발랄하고 예쁘며 구김살 없는 씨씨에 대하여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은 이종사촌간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프란츠 요셉의 어머니인 조피와 씨씨의 어머니인 루도비카가 자매사이이기 때문이다. 프란츠 요셉과 씨씨는 등산을 함께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윽고 프란츠 요셉은 아름다운 씨씨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한다. 저녁이 되었다. 프란츠 요셉은 파티장소에서 커다란 장미 꽃바구니를 씨씨에게 전달하며 공식적으로 프로포즈했다. 씨씨가 가장 좋아하는 빨간 장미였다. 모두들 젊은 황제가 네네에게 프로포즈할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놀랍게도 생각지도 않았던 황제는 네네의 동생 씨씨에게 프로포즈를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이듬해 봄에 비엔나의 아우구스틴교회에서 제국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오페레타 '씨씨'의 한 장면, 프란츠 요셉 황제가 씨씨에게 청혼하고 있다.


1933년 12월 26일 초연된 오페레타 ‘씨씨’의 스토리는 약간 다르다. 씨씨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공작은 씨씨가 너무나 제멋대로이고 고집이 세므로 바바리아의 집에 그대로 두었다가는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에 일부러 바드 이슐로 함께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씨씨의 가족들이 4륜 마차를 타고 바드 이슐로 가는 장면은 무대에서 실루엣으로 처리되었다. 이 장면에서 오케스트라는 대단히 명랑하고 유쾌한 음악을 연주하여 흥겨움을 더해주었다. 바드 이슐에 도착한 씨씨는 공작의 딸이 아니라 옷가게의 점원으로 변장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우연히 프란츠 요셉을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프란츠 요셉이 씨씨와의 결혼을 선포한 방은 그로부터 61년후 프란츠 요셉 황제가 제1차 세계대전의 선전포고를 서명한 방이었다.


‘씨씨’의 초연의 밤, 이윽고 ‘테아터 안 데어 빈’의 오케스트라 박스에 지휘자가 들어섰다. 비엔나 사람들에게 너무나 친근한 프릿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였다. 크라이슬러는 ‘사랑의 기쁨’과 같은 로맨틱한 비엔나의 멜로디를 만들어 내어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크라이슬러는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의사인 아버지는 유태인이었고 어머니는 프랑스 계통이었다. 크라이슬러는 제국군대의 연대에서 장교로서 복무하였고 1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전쟁고아들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선 신사였다. 크라이슬러가 오케스트라 박스에 들어서자 관중들은 ‘헤르 프로페소르’(Herr Professor)라며 박수를 보냈다. 프로페소르(교수)라는 호칭은 비엔나 사람들이 존경하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것이었다. 이어 크라이슬러의 아름답고 매혹적인 멜로디가 관중석을 수놓기 시작했다. 오페레타 ‘씨씨’의 테마 음악은 그의 유명한 바이올린 곡인 Caprice Viennois(비엔나 기상곡)였다. 관중들은 테마 음악이 나올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며 흥겨워했다.

 

결혼식을 마친 프란츠 요셉 황제와 씨씨


크라이슬러는 오페레타 ‘씨씨’를 만들면서 과연 이 작품이 시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을 것인지에 대하여 걱정했다. 왜냐하면 당시는 사회주의가 기승을 부려 옛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하여는 제국주의라는 비난을 쏟아 붓던 때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크라이슬러의 걱정은 기우였다. 아직도 합스부르크의 아름다운 씨씨에 대하여 연모의 정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크라이슬러의 음악은 비엔나의 기상(氣象)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멜로디였다. 관중들은 환호하였다. 오페레타 ‘씨씨’의 초연을 본 평론가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비엔나에서는 어떤 오페라나 연극이 초연될 경우, 평론가들의 등쌀 때문에 곤혹을 치루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오페레타 ‘씨씨’의 경우는 달랐다. 지금은 사라진 옛 제국의 영화를 무대에서나마 되새겨 보자는 생각이 극장 안을 아름답고 매혹적인 회상의 열기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그중에서 ‘Wine Is My Weakness’와 ‘With Eyes Like Thine, 'Tis Sin to Weep’라는 노래는 모두들 쉽게 따라 부를 정도로 감흥을 준 것이었다. 

 

오페레타 '씨씨'의 피날레


크라이슬러의 ‘씨씨’는 그의 두 번째 오페레타이다. 첫 번째는 1919년(우리나라에서 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난 해) 뉴욕에서 발표한 ‘애플 블라썸’(Apple Blossoms)이다. 만일 오페레타 ‘씨씨’가 뉴욕에서 공연되었더라면 크라이슬러는 비엔나 스타일의 멜로디 대신에 ‘애플 블라썸’의 주제곡을 함께 사용했을 지도 모른다. ‘애플 블라썸’은 크라이슬러가 헝가리 출신의 오페레타 작곡가인 빅토르 야코비(Viktor Jakobi)와 함께 작곡한 작품이다. 크라이슬러는 ‘애플 블라썸’이 브로드웨이에서 장기 공연되자 이 작품으로 어느 정도의 재정을 마련할수 있었다. 그러나 ‘씨씨’는 원래부터 돈을 목적으로 작곡한 것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왕비 씨씨에 대한 추억을 위해 작곡했던 것이다. 오페레타 ‘씨씨’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처럼 규모가 큰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비엔나의 캄머오페라(실내오페라)극장이 더 적합했을지도 모른다. 비엔나 사람들은 캄머오페라극장과 같은 분위기를 게뮈틀리히(Gemütlich)라고 말한다. 아늑한 생활스타일을 말한다. 하지만 크라이슬러는 유서 깊은 ‘테아터 안 데어 빈’을 초연장소로 주장하였다. 비엔나를 상징하는 극장이기 때문이었다.


1933년의 초연 이래, 오페레타 ‘씨씨’는 더 이상 자주 공연되지 못하였다.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과 이어 전개된 제2차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난 오늘날, 비엔나 사회에서는 크라이슬러의 ‘씨씨’에 대한 감상이 다시한번 솟아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적인 환경이 거세어 졌던 것일까? 옛 합스부르크에 대한 추억은 다만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는 비엔나의 극장들에서 '씨씨'에 대한 오페레타가 공연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그나저나 필자의 우려는 도대체 씨씨의 역을 맡을만한 여배우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고요한 아름다움과 감히 넘볼수 없는 기품과 예민한 지성과 화려한 예술성을 갖고 있는 배우가 있을 것인가? 영화에서는 세기의 미인 로미 슈나이더가  씨씨의 역할을 맡아 했지만 그다지 호감을 주지 못했다. 루돌프 황태자의 죽음을 그린 영화 '마이엘링'에서는 에바 가드너가 씨씨 역을 맡아 했지만 미안하지만 '아니올시다'였다. 그러므로 영화나 연극이나 오페라로서 씨씨를 그리기가 어려울진대 각자 씨씨의 이미지를 그대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지내는 것이 오히려 행복한 일일 것이다.

 

프란츠 요셉 황제로부터 청혼 받았을 당시. 16세의 씨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