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 사람들

오토카르 2세

정준극 2016. 4. 1. 21:58

오토카르 2세(Ottokar II)

Premysl Otakar II, The Iron and Golden King

보헤미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한때 오스트리아 통치

 

오토카르 2세는 보헤미아 프레미슬리드(Premyslid) 왕조의 인물로서 1253년부터 1278년까지 25년간 보헤미아의 왕으로 있었던 인물이다. 오토카르는 그에 앞서서 1251년부터 부왕 벤체슬라우스의 주선에 의해 오스트리아의 군주(공작)가 되었고,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보헤미아의 왕으로 등극 한 후에는 1260년부터 슈티리아(Styria)의 군주(공작)를 겸했고 1269년부터는 카린티아(Carinthia)의 군주(공작) 겸 카르니올라(Carniola)의 변경백(Margrave)을 겸했다. 오토카르 2세의 보헤미아 치세 때에 보헤미아는 경제, 문화, 정치에서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오토카르 2세를 보헤미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라고 칭송하고 있다. 오토카르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보헤미아 출신으로서 상당기간 동안 오스트리아의 군주로서 활동했으므로 이에 소개코자 한다. 물론 다만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생애가 과연 파란만장하고 흥미진진한 것이었기에 후세를 사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도록하자는 의미에서 소개코자 한다. 하기야 오스트리아로서는 합스부르크가 아닌 보헤미아의 사람이 오스트리아의 군주가 되어 이래라 저래라 한 것을 달갑게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토카르 2세의 통치 시기는 보헤미아의 프레미슬리드 왕조가 신성로마제국에서 최고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토카르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지는 못했다. 프레미슬리드 왕조(Premyslid Dynasty 또는 House of Premysl)는 800년부터 1306년까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통치한 왕조이다. 프레미슬리드 왕조는 전성기에 헝가리, 실레지아, 오스트리아 일대까지 통치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프레미슬리드 왕조는 프레미슬이라고 하는 농부가 보헤미아의 리뷰세(Libuse) 공주와 결혼하여 이룩한 가문이라고 한다. 프레미슬리드 왕조의 오토카르 1세는 1198년에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보헤미아를 세습왕국으로 격상시켰다. 오토카르 2세는 오토카르 1세의 손자이다.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2세

 

오토카르 2세의 가정형편부터 살펴보자. 아버지는 보헤미아의 왕인 벤체슬라우스(Wenceslaus) 1세였다. 어머니는 수봐비아(Swabia)의 군주인 필립의 딸인 쿠니군데(Kunigunde)였다. 오토카르는 1233년에 태어났다.  차남이었다. 형은 블라디슬라우스였다. 오토카르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필립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을 몇 명 배출한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 왕조와 관련된 사람이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1268년에 시실리의 콘라딘 왕을 처형하는 바람에 후손이 끊어진 왕조이다. 오토카르라는 이름은 그의 할아버지 오토카르 1세의 이름을 가져온 것이다. 오토카르는 차남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일반 행정가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그의 형인 블라디슬라우스가 차기 보헤미아 왕으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오토카르는 당시 보헤미아 수상이던 필립에게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필립은 나중에 카린티아공국의 통치권을 두고 오토카르와 라이발 관계에 있었으니 대단한 인연이 아닐수 없다. 그건 그렇고 오토카르가 14세 때에 형인 블라디슬라우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오토카르는 당연히 차기 보헤미아 왕의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오토카르는 형이 갑자기 세사을 떠나자 크게 충격을 받아 그로부터 정치니 뭐니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대신 술만 퍼 마시고 사냥이나 다니면서 허황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토카르는 아무튼 보헤미아의 왕세자였기 때문에  이에 합당한 직위를 받아야 했다. 오토카르의 아버지인 벤체슬라우스 왕은 오토카르를 모라비아의 변경백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오토카르는 브르노(Brno)에 가서 지냈다. 모라비아에 간 오토카르는 그래도 차기 보헤미아 왕위 계승자이기 때문에 정신을 가다듬고 정무에 힘썼다. 오토카르가 먼저 추진한 것은 몽골의 침략으로 황폐해진 모라비아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모라비아의 수도였던 브르노. 지금은 프라하에 이어 체코공화국 제2의 도시이다. 가운데 성당은 성베드로-성바오로 성당이다.

 

하여튼 사람이 귀가 얇으면 안되는데 오토카르는 모라비아의 귀족들이 '언제까지 늙은 아버지 밑에서 지내실 생각이십니까? 어서 보헤미아의 왕으로 등극하소서. 그러자면 우선 아무리 아버지이지만 벤첼슬라우스 왕을 몰아내야 합니다'라는 달콤하지도 않은 말에 빠져서 1248년에 부왕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켜 군대를 이끌고 프라하로 진격하였다. 모라비아의 귀족들과 일부 프라하의 귀족들은 오토카르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추대하고 '젊은 왕'(체코어로는 Mladsi kral)이라고 불렀다. 일단 왕이 된 오토카르는 아버지 벤체슬라우스에게 '함께 지내면 거북하니 잠시동안이지만 다른데 나가서 지내시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옵니다'라면서 프라하성으로부터  내보냈다. 오토카르는 프레미슬 오토카르 2세라는 타이틀로 보헤미아 왕으로서 행세하였으나 길게 가지는 못했다. 고작 1년 후인 1249년 11월에 교황 인노센트 4세가 오토카르를 '아버지를 내쫓은 천하의 못된 놈'이라고 비난하면서 파문하는 사건이 터졌다. 물론 그 배경에는 벤체슬라우스 왕의 충복들이 교황청을 설득한 공로가 있었다. 얼마후 축출 당한 벤체슬라우스 왕은 자기를 따르는 군대를 이끌고 프라하로 진격하여 반란군을 격퇴하였고 '젊은 왕'인지 뭔지하는 오토카르를 프림다(Primda)성에 감금하였다.

 

오토카르가 갇혀 있었던 프림다 성의 폐허. 프라하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국경지대의 산위에 있는 작은 성이다.

 

그런데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는 말처럼 벤체슬라우스는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이므로 오토카르를 용서하였고 오토카르도 잘못했다는 생각으로 용서를 빌어서 결국 두 사람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벤체슬라우스가 아들 오토카르를 용서한 배경에는 벤체슬라우스가 숙원이던 오스트리아를 점령하는데 오토카르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공국은 바벤버그 왕조의 프레데릭 2세(재위 1230-1246)가 공연히 헝가리와 전쟁을 벌이다가 라이타(Leitha)강 전투에서 전사한 이래 군주가 없는 상태였다. 라이타 강은 니더 외스터라이히에 있는 도나우의 한 지류로서 오늘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국경을 이루고 있는 강이다. 라이타 강 전투는 헝가리의 벨라 4세 왕과 오스트리아의 프레데릭 2세 사이에 벌어진 전투였다. 따지고 보면 헝가리를 이루고 있는 마쟈르 족은 955년 독일의 오토 1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 독일에 대한 더 이상의 침공을 중지하고 과거 로마시대의 지방이었던 파노니아 일대에 정착하였으며 그후 헝가리 왕국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동방의 몽골족이 헝가리를 계속 못살게 굴자 헝가리는 옛날 살았던 땅으로 피신하고 싶어서 오스트리아와 라이타 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였던 것이고 결과 오스트리아의 프레데릭 2세를 전사하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헝가리도 크게 이득을 본 것은 없었다. 아무튼 오스트리아와 슈티리아에 군주가 없는 틈을 타서 헝가리와 보헤미아가 서로 이를 차지하려고 다투게 되었으니 당시 보헤미아는 벤체슬라우스 왕이 잠시 프라하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들어와서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헝가리와 독일왕 오토와의 레흐펠트 전투. 955년.

 

벤체슬라우스 왕은 헝가리 또는 어느 누구와도 전투를 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오스트리아를 수중에 넣고자 했다. 결혼작전이었다. 벤체슬라우스는 큰아들 블라디슬라브와 바벤버그의 프레데릭 2세의 조카딸인 게르트루트와의 결혼을 추진했었다. 그러나 그 결혼은 블라디슬라브가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게르트루트가 체링겐(Zähringen)의 변경백인 헤르만과 결혼하는 바람에 없던 일로 되었다. 프레데릭 2세가 전사하자 후계자를 놓고 이런 저런 얘기가 많은 중에 바덴의 헤르만도 후보자로 얘기되었으나  오스트리아의 귀족들이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거부하므로서 헤르만은 오스트리아의 군주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헤르만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통하게도 헤르만이 1250년에 세상을 떠났다. 벤체슬라우스가 등장할 차례였다. 어떤 소식통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의 귀족들이 벤체슬라우스에게 오스트리아에 와서 질서를 유지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벤체슬라우스는 자기는 이미 연로하여 기력이 부족하자 할수 없이 1251년에 아들 오토카르를 석방하고 이어 오토카르를 모라비아의 변경백으로 재임명함과 동시에 오스트리아 귀족들과 협의하여 오토카르를 오스트리아의 총독(Governor)으로 임명토록 했다. 오토카르는 그 해에 비엔나로 입성하여 총독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군주의 타이틀인 공작으로 인정해 줄것을 요구하였다.

 

오토카르 2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루돌프 1세에게 인사하고 있다.

 

오토카르는 자기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세상 떠난 프레데릭 2세의 여동생인 마르가레트와 결혼하였다. 마르가레트는 오토카르보다 26년이나 연상이었다. 더구나 마르가레트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으로서 독일 왕인 핸리 7세와 결혼했다가 미망인이 된 여자였다. 그런데 헨리 7세라는 사람도 얽히고 설켜서 원래는 오토카르의 숙모인 아네스(훗날 St Agnes)와 정혼한 사이였으니 따지고 보면 한치 건너 두치라고 서로들 연관이 되는 사람들이었다. 오토카르와 마르가레트의 결혼식은 1252년 오늘날 니더 외스터라이히주의 하인부르크(Hainburg an der Donau)에서 거행되었다. 오토카르가 19세 청년일 때였다. 1253년에 벤체슬라우스 왕이 세상을 떠났다. 오토카르가 20세의 청년으로서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다. 당시 독일왕은 콘라트 4세였다. 그가 1254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후계자인 콘라딘은 아직 어렸다. 오토카르는 욕심도 많아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로마왕이라는 칭호를 듣고 싶어했다. 로마왕이 되고 싶다는 것은 결국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고 싶다는 의미이다. 로마왕은 선제후들이 선출하는 자리이다. 오토카르 2세는 선출되지 못했다. 대신 홀란드의 왕위 예정자(Gegenkönig)인 윌리엄 2세 백작이 로마왕으로 선출되었다.

 

도나우강변의 하인부르크(Hainburg an der Donau). 오토카르와 마르가레트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다.

 

한편, 헝가리의 벨라 4세는 레이타 강 건너의 오토카르 2세가 세력을 점차 불려가고 있자 가만히 있어가지고는 안되겠다고 해서 젊은 왕인 오토카르 2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벨라 4세는 바바리아의 오토 2세에게 그의 아들인 슈테픈을 슈티리아의 공작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하고 동맹을 맺었다. 슈티리아는 1192년 이래 오스트리아와의 게오르겐베르크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가 비공식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분쟁은 교황의 중재로 없던 일로 되었다. 다만, 오토카르는 슈티리아의 상당부분을 벨라에게 넘겨주고 대신 나머지 오스트리아에 대한 권리를 인정토록 했다. 그러는 사이에 오토카르는 이교도를 정벌하자는 명분을 내걸고 군대를 모아 프루센(Prussen, 영어로는 Old Prussia)으로 진격하였다. 프루센은 프러시아 영토에 살고 있는 발틱 부족 중의 일부를 말한다.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도 프루센이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 일대이다. 오토카르의 군대는 명목상으로 십자군이라고 불렀다. 성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군대만 십자군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교도들을 상대하는 군대는 모두 십자군이라고 불렀다. 오토카르 2세가 정복한 프루센(올드 프러시아)의 중심도시는 쾨니히스버그(Königsberg)라고 불렀다. 오토카르 2세를 기념하기 위해서 '왕의 도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후 쾨니히스버그는 프러시아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오늘날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의 중심지역

 

몇년 후에 오토카르는 헝가리와 다시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벨라 4세에게 이관한 슈티리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오토카르는 1260년 7월 크레센브룬()의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크게 패배시켰다. 헝가리의 벨라 4세는 슈티리아를 오토카르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이와 함께 헝가리와의 평화협정을 통해서 왕실간의 결혼이 추진되었다. 오토카르는 나이만 많은 마르가레트와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벨라 4세의 손녀딸이 되는 쿠니군다와 결혼하였다. 마르가레트와의 결혼을 청산한 것은 마르가레트에게서 후사를 생산할 기미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주효했다. 오토카르는 쿠니군다와의 결혼에서 큰아들 하인리히(헨리)를 두었으나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 그후 두 딸 쿠니군데와 아그네스를 두었고 이어 유일한 아들인 벤체슬라우스를 두었다. 오토카르의 아버지의 이름을 붙인 벤체슬라우스는 훗날 벤체슬라우스 2세로서 보헤미아의 왕위를 이었다. 오토카르는 신성로마제국의 공위시기에 자기의 영향력을 최대한으로 증대하였다. 오토카르는 콘월의 리챠드와 카스티유의 알폰소 사이에 벌어진 왕위 계승분쟁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원만하게 해결을 보도록 했다. 1266년에는 에걸란드()를 정복했다. 1268년에는 카린티아의 울리히 3세와 왕위계승 조약을 맺어 울리히 3세의 뒤를 이어 오토카르가 카린티아와 카르니올라와 빈디츠 변경백 영토의 군주가 되는 것을 합의했다. 1272년에는 프리울리()를 획득했다. 그러는 와중에 헝가리가 다시한번 오토카르에게 도전하였으나 헝가리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이제 오토카르는 신성로마제국의 울타리 안에서 가장 강력한 왕으로서 행세하게 되었다.

 

오토카르(무릎 꿇은 사람)는 젊은 나이에 신성로마제국에서도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군주가 되었다. 오토카르가 교황청의 축복을 받고 있다.

 

1272년에 콘월의 리챠드가 세상을 떠났다. 카스티유의 알폰소가 리챠드의 가지고 있던 독일왕의 타이틀을 차지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 10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듬해인 1273년에 독일왕을 선출하는 선거가 이루어졌다. 이번에도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2세는 후보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선재후들은 합스부르크의 루돌프를 선출했다. 루돌프는 오토카르의 평생 라이발이 되었다. 오토카르는 루돌프가 독일왕, 즉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을 인정할수 없다고 나섰다. 그러면서 교황도 자기의 뜻에 따라 새로 독일왕을 선출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선제후들이 선출한 독일왕을 바꿀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새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독일왕)이 된 루돌프는 1274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종전의 프레데릭 2세 황제 이후에 여러 영토들이 이러저리 이관되었지만 무조건 모두 프레데릭 2세 당시의 상태로 환원한다는 황제로서의 칙령을 발표했다. 이말이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오토카르가 어렵게 차지한 에걸란트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슈티리아, 카린티아 공작령을 모두 내놓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오토카르가 그렇게 못하겠다고 하자 루돌프는 칙령으로 오토카르의 행동을 제약하고 이어 군대를 풀어서 비엔나에 있는 오토카르의 저택을 포위하고 그를 연금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보헤미아에서는 명망있는 귀족인 활켄슈타인()이 오토카르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오토카르는 1276년 11월에 합스부르크의 루돌프와 새로운 협정을 맺어서 오스트리아와 주변의 공국들을 모두 포기하겠다고 약속하고 자기는 다만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만 통치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예에 의해서 정책결혼이 추진되었으니 이번에는 오토카르의 아들인 벤체슬라우스 2세와 루돌프의 딸인 유디트와의 결혼이었다. 아무튼 오토카르로서는 불명예스러운 조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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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카르 2세의 석관

 

그로부터 2년후인 1278년, 오토카르는 와신상담의 차원에서 다시한번 군대를 정비하여 합스부르크의 루돌프에게 도전하였다.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 잃어버린 권세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오토카르는 바바리아, 브란덴부르크, 폴란드와 동맹을 맺었다. 오토카르는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해서 마르흐펠트에서 루돌프, 그리고 루돌프와 동맹을 맺은 헝가리의 라디슬라우스 4세의 군대와 일전을 치루게 되었다. 8월 26일 마르흐펠트 전투의 결과는 오토카르의 대패였다. 오토카르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루돌프는 오토카르의 시신을 비엔나로 가져와서 미노리텐교회에 안치하였다. 이듬해인 1279년 오토카르의 시신과 유물은 마침내 프라하로 옮겨져 성비투스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오토카르의 어린 아들인 벤체슬라우스가 벤체슬라우스 2세로서 보헤미아의 왕위에 올랐다. (오타카르에게는 혼외 자식들어 여러 명이나 있었다. 그 와중에 바람까지 피웠으니 아무튼 바쁜 생활을 했다. 혼외 자식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가장 먼저 태어난 아들 니콜라스였다. 오타카르가 첫번째 결혼에서 자녀가 없고 두번째 결혼에서도 첫 아들은 태어난지 1년만에 죽고 그 다음에는 딸만 둘을 낳았기 때문에 니콜라스가 오토카르에게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며 사는 내 심정을 이해하소서. 그나저나 아들이 없으니 소생을 적자라고 생각해서 왕위 계승권을 주소서. 나같은 자식은 자식이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타카르는 '좀 더 기다려보라'면서 니콜라스에게 보헤미아의 왕관을 넘겨줄 생각을 추호도 갖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나같은 자식은 자식이 아닌가요?'라는 말이 마음에 걸려서1269년에  나콜라스에게 오파바 공국을 영지로 주었다. 오파바는 오늘날 체코공화국에 속한 지역이다. 결론: 오타카르 2세는 샤를르 4세와 함께 보헤미아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 가장 위해한 왕으로 여겨지고 있는 사람이다.  

  

프라하의 성비투스 대성당(Katedrala JV). 오토카르 2세가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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