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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후의 황비 치타(Zita)

정준극 2013. 4. 5. 16:5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후의 황비 치타(zita)

 

비운의 치타 왕비

 

중세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약 7백년동안 중부유럽의 거의 절반 이상을 통치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1차 대전의 종식과 함께 영광과 오욕에 점철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치타(Zita)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이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비(Empress)였다. 1916년부터 1918년까지 고작 2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비였다. 1차 대전이후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이 되고 남편인 카를 황제가 오스트리아 황제 및 헝가리 왕의 자리에서 추방당하자 치타는 카를 황제와 함께 가족들을 이끌고 유럽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궁핍한  방랑생활을 해야 했다. 영광보다는 오욕으로 점철 된 일생! 치타는 그 모든 오욕을 견디어 가며 남편인 황제를 보좌하고 아이들을 양육하였으며 끝날까지 제국의 황비로서 성실한 기백을 보여주었다. 그러기에 그가 황비의 자리에서 축출당한지 2013년으로 거의 1백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수많은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마음 속에는 합스부르크에 대한 향수와 함께 치타에 대한 애정이 잔잔하게 남아 있다. 치타는 향년 97세로 1989년 3월 14일 스위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치타의 육신은 합스부르크의 관례대로 별도로 보관되어 그해 4월 1일 비엔나의 황실영묘(Kaisergruft)에 안치되었다. 비엔나 거리는 대제국 최후의 황비가 마지막으로 가는 길을 애도하기 위해 검은 슬픔에 빠져 있었다. 6천명 이상의 군중들이 치타의 시신이 안치되는 오페라극장의 뒤편 카이저그루프트(Kaisergruft)의 앞에 운집하여 치타와의 마지막 작별을 고하였다. 치타는 어떤 여인인가? 그의 삶은 어떠했는가?

 

약혼후의 치타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공주]

 

치타의 아버지는 파르마공작 로베르(Robert) 1세이며 어머니는 포르투갈 왕이었던 미구엘의 딸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였다. 아버지는 프랑스 왕족 혈통이었으며 어머니는 포르투갈-스페인 왕족의 혈통이었다. 치타는 1911년 합스부르크의 카를(샤를르)대공과 결혼하였다. 카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셉 1세 황제(씨씨의 남편, 자살한 황태자 루돌프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를 계승할 인물이었다. 대제국을 68년동안 통치했던 프란츠 요셉 황제에게는 아들이 하나 밖에 없었다. 황태자 루돌프였다. 그러나 루돌프 황태자는 벨기에의 공주인 부인 스테파니를 두고 마리아라는 젊은 애인과 비엔나 근교의 마이엘링에 있는 황실 사냥숙사에서 동반자살을 했다. 때문에 다음 황제 계승자로서는 프란츠 요셉 황제의 동생 막시밀리안의 아들, 즉 조카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황제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의 바로 아래 동생인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황제로 있다가 멕시코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체포되어 총살에 처해졌었다. 그런데 다음 황제 계승자로 지정된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부인 조피(Sophie)와 함께 1914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총탄에 피살되는 바람에 황제의 자리는 그의 조카인 카를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황족이 아닌 조피와 결혼했기 때문에 두사람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녀들은 누구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가 될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이 황태자가 되지 못하고 결국 가장 가까운 황위 계승자를 찾다보니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조카인 카를이 황태자로 지명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를은 프란츠 요셉 황제가 1916년 서거하자 곧이어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로서 즉위하였고 이어 헝가리의 왕으로도 즉위하였다. 카를에게 있어서 프란츠 요셉 황제는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결혼식에서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함께 


[어린 시절]

 

치타 공주는 1892년 5월 9일 이탈리아의 루카(Lucca) 지방에 있는 빌라 피아노레(Villa Pianore)에서 태어났다. 루카는 훗날 푸치니가 태어난 지방이기도 하다. 치타는 아버지 로베르 대공의 두 번째 부인인 포르투갈의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첫 번째 부인인 시실리의 마리아 피아(Maria Pia)에게서는 12 자녀가 태어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첫 부인에게서 태어난 12명의 자녀중 6명은 정신박약아였고 3명은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로베르 공작은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와 재혼하여 신통하게도 또 다시 열두명의 자녀를 두었다. 치타는 다섯 번째 자녀였지만 로베르 대공의 첫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자녀들과 함께 계산하면 전체 24명의 자녀중에서 17번째였다. 예전에는 참으로 많은 자녀들을 가졌다. 왕가에서 태어난 공주들의 이름은 보통 마리아,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등의 이름을 갖기 마련이지만 치타라는 이름은 유별나다. 치타는 13세기 이탈리아 투스카니 지방에 살았던 이름난 성자의 이름이다. 독실한 가톨릭이었던 치타의 아버지는 딸에게 성치타(St Zita)의 이름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로베르 대공은 아직 어릴 때인 1859년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결과, 파르마 대공의 왕관을 잃었다. 하지만 왕족으로서 물려 받은 재산으로 대가족을 유지할수 있었다. 대가족은 주로 루카 지방의 빌라 피아노레(Villa Pianore)에서 지냈지만 여름철에는 남부 오스트리아의 슈봐르차우(Schwarzau)에 있는 로베르 대공 소유의 성에서 지냈다. 이렇게 루카에서 남부 오스트리아로 가족들이 옮길 때에는 16개의 차량이 딸린 전용 기차를 이용할 정도로 로베르 대공의 위세는 대단했었다.

 

 

어린시절의 치타

 

치타를 비롯하여 형제자매들은 외국어 수업을 열심히 받았다. 프랑스어는 물론이고 영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를 배웠다. 이렇듯 치타의 가족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국제적으로 양육되었다. 나중에 이런저런 나라의 왕실과 결혼하게 되면 외국어를 잘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치타의 아버지 로베르 대공은 이탈리아에서 살았지만 스스로 프랑스인이라고 내세웠다. 부르봉 가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베르 대공과 큰 아이들은 1년에 며칠씩 프랑스 루아르(Loire)지방의 샹보르(Chambord)에 있는 로베르 대공의 성에서 지냈다. 로베르 대공은 자녀들에게 ‘우리는 이탈리아에 살고 있일 뿐, 프랑스의 왕족’이라고 말하며 프랑스 혈통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 사실 도합 24명의 자녀중 치타를 포함하여 3명만이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치타는 10세 때에 집을 떠나 상부 바바리아의 잔베르크(Zanberg)에 있는 기숙학교에 보내졌다. 이 학교는 엄격한 규율과 가톨릭 교육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치타의 신실한 가톨릭 신앙은 이 학교에서 다져진 것이었다. 그러던중 치타가 15세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치타는 잔베르크의 기숙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 왔다. 얼마후 치타와 여동생 프란치스카(Franziska)는 할머니의 지시에 따라 공부를 마치기 위해 영국 영토인 와이트 섬(Isle of Wight)의 수녀원에 보내졌다. 이렇듯 로베르 대공의 자녀들은 계속 엄격한 가톨릭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치타의 언니와 동생중에서 3명이나 수녀가 되었다. 치타의 형제자매들은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였다. 특히 치타와 바로 아래 여동생인 프란치스카는 음식과 옷가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솔선하여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너무나 열심히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서 그랬는지 치타의 건강은 쇠약해졌다. 치타는 2년동안 오스트리아에 있는 온천장에서 요양하며 건강을 회복해야만 했다. 결혼 전의 일이었다.


칼과 치타의 결혼

 

[세기의 결혼]

 

남부 오스트리아에 있는 로베르 대공의 슈봐르차우성 인근에 빌라 봐르톨츠(Villa Wartholz)라는 저택이 있다.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의 저택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는 유명한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女帝)와 이름만 같을 뿐 다른 사람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는 치타의 숙모가 되는 사람이며 아울러 장차 남편이 될 카를의 할머니가 되는 사람이었다. 어린 카를이 유아 세례를 받을 때 대모가 된 사람도 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그런저런 연고로 카를과 치타는 어릴 때 두어번 만난 일이 있다. 그후 서로 학교에 다니느라고 거의 10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하고 지냈다. 1909년 카를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용기병 연대장으로 남부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때 카를은 할머니가 되는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의 저택을 방문하였으며 마침 이곳을 방문한 치타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당시 카를은 결혼 압박을 받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계승자로 내정되어 있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평민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은 다음 황제의 위를 계승하는 서열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따라서 합스부르크는 페르디난트의 조카인 카를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즉, 카를은 왕족과 결혼해야 했고 다행히 치타는 왕족 혈통이었다.

 

치타와 카를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서로 장래의 배우자로서 바람직한지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를은 청혼을 미루고 있었다. 단독으로 결정할 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치타는 19세였다. 치타는 카를이 청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계기는 뜻하지 않게 이루어졌다. 어떤 소스인지는 몰라도 치타가 마드리드 대공인 돈 하이메(Don Haime)와 약혼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다급해진 카를은 주둔지를 빠져 나와 할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를 찾아갔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치타의 숙모이기도 했다. 카를은 치타의 약혼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대답을 듣자 ‘그렇다면 내가 빨리 서둘러야 겠네요!’라면서 곧장 이탈리아의 빌라 피아노레를 찾아가 치타에게 정식으로 청혼하였다. 며칠후 오스트리아 황실은 두 사람의 약혼 사실을 공식으로 발표하였다. 카를과 치타는 1911년 10월 21일 남부 오스트리아의 슈봐르차우(Schwarzau) 성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는 카를의 증조할아버지가 되는 81세의 프란츠 요셉 황제도 참석하였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증손자가 되는 카를의 결혼식을 보고 ‘이제야 안심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남부 오스트리아의 헤첸도르프(Hetzendorf)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치타 대공비는 곧 임신하여 이듬해인 1912년 11월 20일 첫 아들 오토를 낳았다. 이후 치타는 결혼 생활 11년동안 모두 여덟명의 자녀를 생산하였다. 가만히 보면 왕족들은 평민들보다도 아이들을 잘만 낳는다.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슈봐르차우 성에서의 카를과 치타의 결혼식. 맨오른쪽에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후계자의 부인]

 

당시 카를 대공은 20대의 약관으로서 당장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삼촌인 페르디난트 대공이 황제 계승자로서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를의 운명은 1914년 6월 28일 바뀌어졌다. 황제 승계자인 페르디난트 삼촌과 숙모인 조피(Sophie)가 사라예보에서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 국수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했기 때문이었다. 카를과 치타는 그 뉴스를 바로 당일에 전보로 받았다. 치타는 그 날을 회상하며 ‘아름다운 초여름의 날이었지만 삼촌의 피살 소식을 들은 카를의 얼굴은 창백하기 이를데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선포되었다. 카를은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대장으로 임명되어 남부 티롤지방을 공격하는 제20군단을 이끌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하여 치타는 개인적으로 대단히 곤란한 입장에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오빠들 중 몇은 오스트리아의 반대 편에서 참전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 살고 있던 오빠인 식스투스(Sixtus)와 사비에르(Xavier)왕자는 전쟁이 터지자 벨기에 육군 장교로 참전하였다. 물론 다른 오빠들인 르네(René)왕자 등은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하여 참전하기도 했다. 치타가 이탈리아의 왕족이라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비엔나 주재 독일 대사는 베를린에 보내는 전문에서 ‘황태자비는 이탈리아의 왕족인 파르마 가문 출신입니다. 오스트리아의 국민들은 적국인 이탈리아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국민들은 치타 황태자비에 대하여도 신뢰를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이러한 이상한 소문이 무성해지자 프란츠 요셉 황제는 황태자비인 치타와 자녀들을 헤첸도르프 저택으로부터 비엔나의 쇤브룬궁전으로 옮겨 지내도록 했다. 쇤브룬궁전에서 치타는 노황제인 프란츠 요셉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때로는 공식 석상에서 황제를 수행했으며 비공식적으로는 부인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외로워하는 황제의 대화 상대자였다. 노황제는 치타에게 제국의 앞날에 대하여 많은 걱정을 했다고 한다. 노황제는 1916년 11월 21일 향년 86세로 기관지염과 폐렴이 겹쳐 서거했다. 치타는 훗날 노황제가 서거하던 날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로브코비츠(Lobkowitz)대공이 임종의 방 한쪽에 서 있던 카를에게 다가와 카를의 이마에 성호를 긋고 ‘하나님께서 폐하를 축복하소서!’라고 말했다. 나는 남편을 폐하라고 부르는 말을 처음 들었다.”

 

황태자 오토와 함께


[황비로서의 치타]

 

카를과 치타는 노황제가 서거한지 한달 후인 1916년 12월 30일 부다페스트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대관식후에는 축하연이 있었다. 하지만 축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카를 황제와 치타 왕비는 전쟁중에 여러 축하 행사를 갖는다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된 카를은 비엔나에만 머물러 있을수 없었다. 군사령부가 있는 바덴(Baden)에 주로 머물렀다. 바덴과 치타가 머물고 있는 호프부르크(Hofburg) 사이에는 핫라인이 개설되었다. 카를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호프부르크의 치타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왕비 치타는 황제 카를에게 많은 조언을 하며 내조를 아끼지 않았다. 치타는 남편 카를을 따라 군부대를 시찰하며 전선에 나가 병사들을 위문하기도 했다. 치타는 사회 정책에 대하여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병원을 방문하여 부상병들을 위문하고 자선행사를 주관하여 전쟁미망인들과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일은 치타의 주요 업무였다.

 

 

헝가리왕으로 대관식을 가진 카를. 가운데가 황태자 오토

 

[식스투스 사건]

 

어느덧 전쟁도 4년째로 접어들었다. 모두 평화를 원하는 시기였다. 카를도 어서 속히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기를 갈망하였다. 벨기에 육군 소속으로 프랑스 편에 있는 치타의 오빠 식스투스(Sixtus)가 카를의 평화 갈망을 돕기로 결심하고 자진하여 나섰다. 카를은 식스투스와 접촉하여 우선적으로 프랑스와의 평화협상을 이끌어내고 싶어 했다. 카를은 중립국 스위스에서 식스투스와 접촉을 시도하였다. 치타는 오빠 식스투스에게 비엔나를 방문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치타의 어머니인 마리아 안토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비인 치타의 편지를 적군 장군인 아들 식스투스에게 비밀리에 직접 전달하였다. 마치 007작전과 흡사했다. 식스투스가 프랑스 측의 조건을 가지고 스위스에 도착했다. 조건은 크게 네가지였다. 1870년 보불전쟁의 결과로 독일에 합병된 알사스-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귀속할것, 독일의 영향권에 있는 벨기에의 독립을 회복할것, 세르비아 왕국의 독립을 보장할것, 그리고 오토만 제국 소속의 콘스탄티노플을 러시아에 이양할것 등이었다. 카를은 원칙적으로 처음 세가지 조건을 수락한다는 뜻을 친서로 만들어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냈다. 1917년 3월 25일의 일이었다. 카를은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에서 ‘서한의 내용은 절대 비밀을 지켜야하며 현재로서는 비공식 견해임을 확실히 한다’고 적었다. 그러나 카를과 프랑스와의 비밀 협상내용이 새어나가게 되었고 이로서 카를의 입장은 대단히 난처해졌다. 카를은 외교적으로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카를이 프랑스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다는 사실은 다행히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비밀 협상을 한다는 소문을 들은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으로서 소문의 내용을 강하게 반대했다. 알사스-로렌을 양도하지 못하겠으며 어떠한 협상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독일은 1917년 러시아가 혁명으로 와해 직전에 있는 터에 러시아에게 콘스탄티노플을 양도한다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스투스는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구축하는 노력을 계속 기울였다. 식스투스는 영국을 방문하여 로이드 조지(Lloyd George) 수상과 만나 오스트리아 영토에 대한 이탈리아의 요구조건을 협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영국 수상이라고해도 장군들에게 오스트리아와 평화협정을 맺자고 설득할수는 없었다. 치타도 나름대로 평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치타가 독일을 설득하여 벨기에에 공중폭격을 가하려는 독일의 계획을 저지한 것은 좋은 예이다.

 

1918년 4월 독-소 협정이 체결된 이후 오스트리아 외상인 오토카르 체르닌(Ottokar Czernin)은 연설을 통하여 프랑스의 클레망소 수상이야 말로 평화를 원치 않는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격분한 클레망소는 카를이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비밀 친서를 찾아내어 내용을 발표했다. 이어 식스투스의 비밀 행동이 밝혀지면서 식스투스는 목숨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다. 이와 함께 분노한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체르닌 외상은 카를에게 동맹국들에 특별사절단을 보내어 식스투스는 카를의 친서를 프랑스 정부에 전달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으며 프랑스가 내세운 조건중 벨기에에 대한 사항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고 알사스-로렌에 대한 사항도 클레망소 수상이 거짓말 한 것이라고 해명토록 했다. 체르닌은 모든 사안과 관련하여 독일측과 화해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성사되지 않자 사임했다.

 

[제국의 종말]

 

이 때쯤하여 전쟁은 거의 종말로 접어들고 있었다. 체코(보헤미아)가 전쟁의 와중에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여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를 수립하였다.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동맹군으로 참여하고 있던 체코군은 새로운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충성을 서약하였다. 1918년 4월 13일의 일이었다. 우위를 점하고 있던 독일군이 아미앙(Amiens) 전투에서 돌이킬수 없는 패배를 당하였다. 이로서 독일의 위세는 크게 약화되었다. 1918년 9월에는 불가리아의 페르디난트 왕이 동맹국에서 탈퇴하여 개별적으로 평화협상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치타는 불가리아가 동맹에서 탈퇴한다는 전보가 왔을 때 카를과 함께 있었다. 치타는 이 때를 회상하며 ‘평화협상 추진이 더욱 절박해졌다. 그래도 무언가 조건을 제시할수 있을 때 협상을 추진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해 10월 16일 카를은 이른바 ‘대국민 성명서’(People's Manifesto)를 발표하고 제국은 제국에 속하여 있는 각개 국가가 자치권을 갖는 연합체 형식으로 재편성되어야 함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각개 국가는 개별적으로 독립을 선포하여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고 이로서 제국은 실질적으로 와해되었다.

 

당시 치타와 가족들은 비엔나 남부의 괴델레(Gödöllö)에 살고 있었다. 어느날 치타는 카를과 함께 쇤브룬 궁전으로 향하였다. 새로운 독일-오스트리아 정부가 구성되었으며 새로운 각료들도 이미 임명되었다. 1918년 11월 11일 카를은 쇤브룬에서 특별 성명서에 서명해야 했다. 쇤브룬 궁전은 과거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점령하였을 때 합스부르크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냈던 곳이었다. 치타가 얼핏 성명서를 읽어보니 문장중에 폐위(Abdication)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치타의 유명한 말이 남아 있다. 치타는 ‘군주는 폐위될수 없다. 양위할 뿐이다. 이 자리에서 카를 황제가 쓰러지면 황태자 오토가 있다. 우리 모두가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아직도 합스부르크 왕조의 사람들이 남아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성명서는 ‘폐위’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다시 초안되었다. 얼마나 훌륭한 왕비인가! 카를이 성명서에 서명하고 공포를 승인하였다. 그날 카를과 치타, 그리고 가족들은 쇤브룬을 떠나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국경지대의 에카르차우(Eckartscau)에 있는 황실 사냥숙사로 묵묵히 향했다. 다음날에는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인 선포되었다.

 

[추방생활]

 

에카르차우에서의 생활은 곤궁한 것이었다. 원래 사냥 오두막집이었기 때문에 대가족에게는 매우 협소했다. 가장 힘든 것은 전후의 경제 사정으로 제대로 식품을 구하기조차 어려웠던 것이었다. 이러한 때에 생각지도 못했던 도움이 전해졌다. 치타의 오빠인 식스투스가 영국왕 조지 5세를 만나 합스부르크를 도와줄 것을 간청하자 조지왕은 마음이 움직여서 즉시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당시는 조지왕의 사촌인 러시아의 니콜라스2세가 혁명으로 처형당한 직후여서 조지왕으로서는 합스부르크 황실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다. 1919년 3월 영국은 카를과 가족들을 오스트리아로부터 빼어내기 위해 즉각 일단의 장교들을 현지로 보냈다. 영국 장교단의 대표인 에드워드 스트러트(Edeard Strutt) 육군중령은 에카르차우로부터 스위스로 갈수 있는 특별열차를 주선했다. 이로서 카를은 퇴위하지 않고 오스트리아를 권위있게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추방이었다.

 

마데이라에서의 치타와 칼과 자녀들. 1921년


[헝가리의 변화]

 

추방당한 카를과 치타 가족들이 우선 머문 곳은 스위스 로르샤흐(Rorschach)에 있는 봐르텍(Wartegg)성이었다. 이 성은 원래부터 부르봉-파르마 왕조의 소유였으므로 카를과 치타로서 부담이 없었다. 그러나 스위스 당국의 견해는 달랐다. 스위스 당국은 로르샤흐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대에 있기 때문에 혹시라도 오스트리아 내에 있는 합스부르크 일족들이 카를과 내통하여 무슨 일을 꾸미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스위스에 온지 한달도 못되어 카를과 가족들은 오스트리아로부터 더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살도록 강요당했다. 마침내 다음달 카를 가족은 제네바 호수 부근에 빌라 프랑긴스(Villa Prangins)로 옮겼으며 당분간 이곳에서 조용하게 지낼수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조용함도 얼마후인 1920년 3월 뜻하지 아니하게 마감되었다.

 

헝가리는 합스부르크로부터 독립을 선포한후 상당 기간동안 혼돈에 있었다. 왕국으로 갈 것이냐 공화국을 택할 것이냐가 제일 큰 쟁점이었다. 헝가리의 귀족들은 당분간 왕정을 유지하고 서서히 공화제를 검토한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리고 섭정왕(Regent)으로 헝가리 출신의 미클로스 호르티(Miklos Horthy)를 선출하였다. 새로운 왕이 아니라 섭정왕을 선출한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공식적으로 카를이 샤를르 5세라는 타이틀로 헝가리의 왕이었으며 치타는 왕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카를이 헝가리 왕으로 복귀할 가능성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섭정왕인 호르티가 제네바 호수 부근, 카를이 머물고 있는 빌라 프랑기스(Villa Prangis)에 밀사를 보내어 헝가리 국내의 사정이 진정될 때까지 돌아오지 말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호르티의 욕심이 들어나 보이기 시작했다. 호르티는 자기가 헝가리의 정식 왕으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 것을 눈치챈 카를은 영국 조지왕의 특사인 스트러트(Strutt) 중령에게 헝가리에 돌아갈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카를은 두 번이나 헝가리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으나 그 때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계획이 좌절되었다. 한번은 1921년 3월이었고 다른 한번은 1921년 10월이었다. 섭정왕이라는 호르티의 방해 때문이었다. 이제 카를과 치타는 가족들을 데리고 새로 살 곳을 찾아야 했다.

 

남편 칼의 헝가리 왕으로서의 대관식, 부다페스트


[대서양의 고도 마데이라]

 

헝가리에의 복귀가 실패로 돌아가자 카를과 치타는 새로 정착할 곳이 정해질 때까지 헝가리의 시골에 있는 에스터하지 백작의 저택인 토티스(Totis)성에 임시로 거처를 정하고 살았다. 어디로 갈 것인가? 한때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였으며 헝가리 왕국의 왕이 아니었던가? 우선 지중해의 말타(Malta)가 고려되었다. 그러나 말타 총독인 영국의 쿠르존(Curzon)경이 거절하였다. 추방된 합스부르크의 황제인 카를 때문에 어떤 문제가 일어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영토에서도 카를을 받아 들일수 없다고 내세웠다. 프랑스의 속령들에서는 프랑스에 기반을 두고 있는 치타의 오빠들이 카를을 위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것 같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였다. 결국 포르투갈 영토인 대서양의 마데이라(Madeira)섬이 최종 선정되었다. 치타의 어머니의 친정이 포르투갈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배려가 되었던 것이다. 1921년 10월 31일, 카를과 치타는 헝가리의 티하니에서 초라한 기차를 타고 포르투갈의 바하(Baja)까지 갔다. 카를과 치타는 여덟명의 자녀를 모두 데려갈수 없어서 장성한 아이들만 데리고 기차에 올라 탔다. 나머지 아이들은 스위스의 봐르테그(Wartegg)성에서 카를의 양할머니가 데리고 있기로 했다. 헝가리로부터 포르투갈까지의 기차 여행은 오늘날 같으면 하루 이틀이면 충분할 것이었으나 당시에는 18일이나 걸리는 긴 일정이었다. 바하에는 영국해군의 초계함인 HMS 글로우 웜(Glow-Worm)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를 가족은 영국 함정을 타고 그해 11월 19일, 마침내 대서양의 마데이라 섬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인 푼샬(Funchal)에 도착하였다. 스위스에 남아 있던 아이들은 이듬해 2월 마데이라로 모두 와서 부모와 함께 지낼수 있게 되었다.

 

치타(맨 왼쪽)와 자녀들. 가운데가 오토

 

[카를의 죽음]

 

카를은 황제의 자리에서 추방당할 당시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특히 기관지가 좋지 않았다. 1922년 2월의 어느 추운날, 카를은 다섯째 아이인 카를 루드비히(Karl Ludwig)에게 줄 장난감을 사러 거리의 상점에 나왔다가 기관지염이 악화되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기관지염은 폐렴으로 발전되었다. 당시만해도 폐렴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마데이라 섬에는 현대식 의료시설도 없었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아이들 몇 명과 시종들도 심한 감기에 걸려 있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침실들이 너무 추웠기 때문이었다. 난방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치타는 그 때 임신 8개월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타는 카를을 비롯하여 앓고 있는 모든 식구들을 직접 간호해야 했다. 하녀가 있었지만 나이 많은 하녀는 부엌일 밖에 몰랐다. 카를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갔다.

 

마침내 4월 1일 카를은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카를이 치타에게 마지막 남긴 말은 ‘당신을 무척 사랑하오! 나 때문에 너무 고생이 많았소!’였다. 장례식은 카를과 치타가 다니던 푼샬의 성당에서 간소하게 거행되었다. 만일 카를이 계속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였다면 각국의 조문사절단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대단히 엄숙하고 화려한 장례식이었을 것이다. 장례식후 어떤 사람이 치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치타는 참으로 존경받아야 마땅할 여인이다. 치타는 냉정을 잃지 않고 침착했다. 장례식을 도와준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얘기를 나누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모두들 치타를 무한한 애정으로 대하며 존경했다.’ 치타는 9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카를을 추모하며 검은 상복을 벗지 않았다. 카를의 유해는 마데이라에 남게 되었지만 그의 심장은 항아리에 담아 스위스의 무리(Muri) 수도원에 안치되어 있다. 무리(Muri)의 성당은 말년에 치타가 다니던 성당이었으며 치타가 세상을 떠난후 그의 심장도 카를의 것과 함께 이곳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치타의 시신은 훗날 오스트리아 정부의 양해를 얻어 비엔나 시내에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용 영묘인 카이저그루프트에 안치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카를

 

[아버지 없는 아이들을 키우며]

 

카를이 세상을 떠난 후, 과거의 오스트리아 황실 가족들은 마데이라 섬으로부터 또 다시 거처를 옮겨야 했다. 다행히 스페인이 호의를 보여주었다. 스페인의 알폰소13세(Alfonso XIII)는 런던 주재 스페인 대사관으로 하여금 영국 외무성에 접근하여 카를 황제의 유가족인 치타와 자녀들을 스페인에 거주토록 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알폰소 스페인왕은 합스부르크와 연결되어 있는 카를의 먼 친척이었다. 영국이 이를 승인하였다. 대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이며 헝가리의 왕이던 사람의 가족들이 주거지를 옮길 때 영국 외무성의 승낙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아무튼 영국의 승인을 얻은 스페인은 마데이라 섬에 이사벨라 공주(Infanta Isabel)라는 이름의 함정을 보내어 치타와 일곱 자녀(여덟째는 아직 복중에 있었음)를 스페인의 카디스(Cadiz)를 거쳐 마드리드로 데려왔다. 치타는 마드리드에 도착한지 며칠후에 임시 거처인 파드라(Padra)궁에서 카를의 여덟 번째 유복자를 낳았다. 엘리자베트였다. 그후 알폰소는 치타와 자녀들을 비스케이 만의 레케이쇼(Lekeitio)에 있는 우리바렌(Uribarren) 궁전을 사용토록 배려해 주었다. 치타는 레케이쇼에 거주하는 것을 만족해 했다. 마드리드에서 멀리 떨어진 비스케이 만에 살게 되었기 때문에 알폰소 왕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치타는 이곳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에만 모든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생활은 매우 곤궁하였다. 수입이라는 것은 아직도 오스트리아에 있는 개인 소유의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료, 요한니스버르(Johannisberg)에 있는 포도원에서의 수입, 그리고 일부 개인이나 단체들이 모금운동으로 마련하여 보내주는 돈이 전부였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에 있는 합스부르크 재산으로부터 나오는 돈은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당한 합스부르크의 다른 사람들도 달라고 요청하는 바람에 사실상 치타 가족에게 돌아가는 돈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이번에는 벨기에로 이전]

 

1929년 쯤에 치타의 자녀들은 대학에 들어갈 나이들이 되었다. 어머니인 치타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비스케이 만의 작은 도시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해 9월 치타와 자녀들은 벨기에의 브뤼셀 근교의 스텐노케르젤(Steenokkerzeel)이란 곳에 집을 얻어 이사하였다. 다행이 이 마을에서 멀지않은 곳에 치타의 친척들이 몇 명 살고 있어서 도움을 받을수 있었고 심적으로도 불안하지 않았다. 더구나 벨기에는 치타의 오빠 식스투스가 활동하던 나라가 아니던가? 카를과 치타의 장남인 오토는 명색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태자였다. 오토는 이런 저런 사유로 비엔나를 자주 왕래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수상은 엥겔베르트 돌푸쓰(Engelbert Dollfuss)였다. 돌푸쓰 수상은 은근히 합스부르크의 부활을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치타도 합스부르크의 재건을 위해 열심을 다했다. 치타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게도 연락하여 지원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돌푸쓰 수상과 오토의 계획은 1938년 나치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합병(Anschluss라고 부름)으로 무산되었다. 합스부르크 가족들은 비록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되었지만 오스트리아의 나치화에 적극 저항하였다. 물론 나치에 대한 저항은 나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물거품이 되었다

 

[나치를 피하여 미국행]

 

1940년 5월 10일 나치가 벨기에를 침공하자 치타와 자녀들은 전쟁난민의 신세가 되었다. 벨기에에 대한 독일의 공습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어느날에는 치타와 가족들이 살고 있는 스테노케르젤 성에 폭탄이 떨어져 치타 가족은 하마트면 모두 목숨을 잃을뻔 했다. 치타는 벨기에를 떠나 보스츠(Bostz)에 있는 사비에르(Xavier)대공의 프랑스 성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보스츠도 나치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았다. 치타와 자녀들은 프랑스 페탕(Petain) 정부의 협조로 포르투갈로 넘어갔고 그곳에서 미국으로부터 입국 비자를 받아 뉴욕에 도착할수 있었다. 뉴욕에 도착하기 까지 치타와 자녀들은 목숨을 건 여러 번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후 치타와 자녀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캐나다의 퀘벡에 정착할수 있었다. 실상 치타의 자녀들중 어린 자녀들은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들이 일단 유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게 되자 그나마 전에 오스트리아로부터 들어오던 임대료 등의 수입이 끊어졌다. 합스부르크의 가족들은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어떤 때는 살라드와 시금치 음식을 만들어 먹기가 어려워 들에 피는 민들레로 대신할 정도였다.

 

2차 대전중에 치타의 장성한 자녀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장남 오토는 유럽에서 전후(戰後) 합스부르크 왕조의 역할을 협의하기 위해 루즈벨트 대통령을 몇차례에 걸쳐 만나기도 했다. 차남 로베르트(Robert)는 런던에 머물면서 합스부르크를 대표하여 영국 정부와 협의를 진행하였다. 3남 펠릭스(Felix)와 4남 카를 루드비히(Karl Ludwig)는 미국 육군에 입대하였다. 5남 루돌프(Rudolf)는 비밀리에 비엔나에 숨어 들어가서 나치 저항운동을 지원하였다. 1945년 5월 9일, 이날은 유럽에 평화가 처음 시작된 전승기념일이었다. 이날은 치타의 생일이기도 했다. 이날 치타는 캐나다의 퀘벡에서 생일을 기념하면서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데 대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치타는 전쟁이 끝난후 거의 2년동안 미국과 캐나다의 여러 곳을 순방하면서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위한 모금운동을 펼쳤다.

 

[전후의 치타]

 

전쟁이 끝난지도 몇 년이 지났다. 치타는 이제 그만 쉬어야 한다는 다른 사람들의 간청에 의해 휴식을 가졌고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치타는 자녀들의 결혼식 때문에 유럽에 자주 갔다. 큰딸 아델하이트(Adelheid)만 제외하고 거의 모든 자녀들이 훌륭한 가문의 배우자들을 만나 가정을 꾸몄다. 이들은 모두 유럽에 살았다. 치타는 더 이상 캐나다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1952년 치타는 룩셈부르그로 떠났다. 룩셈부르그에는 치타의 친정 어머니인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가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치타는 비록 자신도 노년에 접어들었지만 친정 어머니의 말벗이라도 되기 위해 룩셈부르그로 갔던 것이다. 치타의 어머니 마리아 안토니아는 1959년 향년 96세로 세상을 떠났다. 룩셈부르크 슈르(Chur)의 주교는 치타에게 마침 스위스의 지제르스(Zizers)에 그가 위임받아 관리하고 있는 궁성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서 살도록 권유했다. 자녀손이 많은 치타는 비교적 넓은 집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 제안을 부담 없이 받아 들였다. 더구나 궁성 바로 옆에는 성당도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치타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리하여 치타는 말년의 대부분을 가족들과 함께 스위스의 지제르스에서 지내게 되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오스트리아 정부는 구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들의 오스트리아 방문을 허용했다. 단, 1919년 4월 10일 이후 출생자에 한했다. 평생 독신이었던 치타의 큰 딸 아델하이트는 전쟁이 끝난후부터 오스트리아에 들어가 살았다. 아델하이트는 1972년 오스트리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치타는 아델하이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정부의 입국 제한 때문이었다. 치타는 이 때를 기억하면서 ‘자식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어미의 마음은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이러한 출입 제한은 1982년에 가서야 완화되었다. 치타는 추방생활 60년만에 처음으로 비엔나를 방문할수 있었다. 비엔나의 시민들은 치타를 따듯하게 환영하였다. 치타는 TV에 출연하였으며 신문과 잡지와 인터뷰를 하여 세상 떠난 남편 카를의 업적을 새롭게 조명했고 자기 자신과 자녀들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다. 어느때 치타는 비엔나의 타블로이드인 크로넨 자이퉁(Kronen Zeitung)과의 인터뷰에서 ‘1889년 루돌프 황태자가 마리아 베체라 남작부인과 함께 마이엘링에서 동반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요원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믿고 있다’고 말했다. 프란츠 요셉 황제의 황태자인 루돌프가 자살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치타의 남편 카를이 황제가 되었던 것은 역사의 아이로니였다. 치타는 ‘평화의 황제’라고 불리는 남편 카를이 1982년 가톨릭교회에서 복자로 시복되는 일에도 많은 관련을 하였다. 1982년은 치타가 90세가 되는 해였다. 복자 카를은 비엔나의 중심지역인 그라벤에 있는 페터스키르헤(Peterskirche)에서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치타의 죽음]

   

치타의 90회 생일은 모든 자녀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스위스 지제르스(Zizers)에서 축하되었다. 치타는 이제 아들, 손자, 며느리를 합하여 거의 40명에 이르는 대가족을 거느리게 되었다. 건강하다고만 생각되었던 치타의 건강은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두 눈에 백내장이 생겼다. 그러나 치타가 너무 노쇠하여 수술할수 없었다. 1987년 치타는 95회 생일을 맞이하여 마지막으로 유럽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을 모두 불러 만났으며 이듬해 여름과 겨울에는 폐렴 때문에 망내딸 엘리자베트의 집에 가서 쉬었다. 1989년 3월 초, 치타는 큰아들 오토를 불러 합스부르크 가문을 당부하고 며칠후인 3월 14일 운명하였다. 향년 97세였다.

 

 

비엔나의 카푸친교회에 안치된 치타의 관. 카푸친교회의 지하에 합스부르크 황실영묘가 있다.

 

장례식은 1989년 4월 1일 비엔나에서 거행되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치타의 장례식을 오스트리아 영토 안에서 치룰수 있도록 허락했다. 다만, 장례식 비용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부담토록 했다. 치타의 시신은 엘리자베트(씨씨) 왕비의 시신이 스위스에서 비엔나로 올 때처럼 기차로 서부역에 도착하였다. 이어 서부역으로부터 시내 중심가에 있는 카푸친교회까지 합스부르크의 장례마차를 앞세운 운구행렬이 이어졌다. 1916년 노황제 프란츠 요셉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시신을 제국영묘(Kaisergruft)로 운구했던 바로 그 마차였다. 노황제 프란츠 요셉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치타가 그 마차를 지켜보았었음은 물론이지만 당시에는 자기 자신이 그 장례마차를 타고 제국영묘까지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치타의 장례식에는 치타의 자녀손을 포함하여 합스부르크와 부르봉-파르마 왕가의 가족들 약 2백명, 그리고 정치인, 정부요인, 국제기구 대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파견한 교황청 특별 조문사절 등 무려 6천여명에 이르는 조문객들이 거리를 메웠다. 관례에 따라 치타의 심장은 스위스 무리(Muri)에 있는 수도원에 보관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관례라는 것은 시신, 심장, 장기(臟器)를 각각 따로 보관하는 것이다. 나중에 부활할 때를 대비해서라고 한다. 무리 수도원에는 작고한 남편 카를의 심장도 항아리에 보관되어 있다. 치타는 제 세상에서도 남편과 함께 있게 되었다.

 

 치타와 카를의 심장이 안치되어 있는 스위스의 무리 수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