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와 여인들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롤라 몬테

정준극 2009. 2. 22. 21:24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롤라 몬테


롤라 몬테(Lola Montes 또는 Montez: 1821-1861)는 19세기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댄서이다. 롤라 몬테는 태어나기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나 스페인에서 지내면서 무희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 여인이다. 롤라 몬테는 이국적인 미모에 환락을 추구하는 여성으로서 놀라운 재능을 겸비한 댄서여서 귀족들과 부호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지나친 스캔들로 인하여 사회로부터 도피하지 않을수 없어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롤라 몬테는 미국에서 서커스에 강한 매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새로운 서커스인생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최근 프랑스에서 롤라 몬테의 서커스 인생을 그린 영화가 제작되어 프랑스인이 선정한 베스트영화 1위를 차지했다. 롤라 몬테 역은 마르탱 캬를(Martine Carol)이었다. 아무튼, 그런 롤라 몬테가 바그너와는 무슨 관계에 있는 것인가? 롤라 몬테가 바그너의 작품에 영향이라도 끼쳤다는 말인가? 특별히 그렇지는 않다. 다만,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할 때에 어떤 형태로든지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다. 롤라 몬테는 바그너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정도의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었던 것 같다. 바그너는 한때 롤로 몬테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일도 있지만 나중에는 그녀의 방종한 삶에 대하여 거부감을 보였다. 그래서 이졸데가 더욱 순수하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서커스에 출연한 롤로 몬테(마르탱 캬롤)

 

1865년 바그너는 뮌헨 부근 슈타른베르크(Starnberg)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역사적인 초연을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5년 전에 완성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아직 초연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바바리아의 루드비히2세로부터 뮌헨에서 초연되도록 지원해주겠다는 소식이 왔다. 루드비히2세는 바그너의 열렬 팬이었다. 당시 바그너는 첫 부인인 민나(Minna)가 어디론가 떠났고 또한 빚 때문에 파산지경이었으므로 유럽의 어디를 가도 반겨줄 사람이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한 바그너에게 루드비히 국왕의 호의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한 감격적인 것이었다.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리허설을 뮌헨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바그너는 불현듯 주위 사람들에게 롤라 몬테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바그너는 자기도 한때 몰라 몬테에게 관심을 기울인 일이 있으나 롤라가 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잊게 되었다고 말하고 만일 롤라와의 관계가 열정적인 방향으로 발전되었다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음악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롤라는 나중에 바그너를 끔찍히 후원해 준 루드비히2세의 부왕인 루드비히1세의 정부(情婦)와 같은 입장이었으므로 바그너로서는 롤라와의 관계가 이상하게 발전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롤라 몬테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이 준비되고 있던 때로부터 20여년 전 유럽에서 이름을 떨쳤던 무희였다. 그러나 안정된 삶을 가지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말년에 겨우 오랜 방황을 마무리하고 바바리아에 정착하였다. 롤라 몬테는 바바리아에서 루드비히1세의 호의로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지나친 욕심으로 주위의 비난을 받아 처신이 어렵게 되었다. 운명은 야속한 것이어서 육신의 평안도 잠시뿐, 롤라 몬테는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완성한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롤라 몬테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그런데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역사적인 초연 리허설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어쩐 일이지 요즘 들어 롤라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고 고백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롤라 몬테(롤라 몬테스)

 

바그너는 19세기 후반 세계의 오페라계를 흔드는 위대한 작곡가가 되었지만 롤라 몬테는 실패한 인생으로 살았다. 그러나 바그너와 롤라 사이에는 무시할수 없는 아이러니컬한 유사성이 있다. 결론적으로 두 사람 모두 괴팍한 삶을 살았다. 바그너와 롤라 몬테는 거의 같은 시기에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였다. 바그너는 1842년 드레스덴에서 ‘리엔치’(Rienzi)를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려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했고 롤라는 1843년 런던에서 ‘세빌리아의 이발사’ 공연중 인터미션에 정열적인 스페인 춤을 추어 화려한 경력을 시작했다. 두 사람에게는 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서로의 명성이 높아지자 두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으로 서로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드레스덴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롤라는 이미 상당히 화려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롤라는 인도, 런던, 파리, 바르샤바, 생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과 이혼을 취미삼듯 반복하면서 전전하다가 드레스덴에 머물게 되었다. 바그너와 롤라가 처음 만난 날은 어떤 파티 장소에서였다. 롤라는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의 파트너로서 모습을 보였다. 리스트 역시 로맨스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이었으므로 당대의 롤라 몬테의 파트너가 되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었다. 파티 장소에서 롤라는 바그너에 대하여 관심을 보일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롤라에 대한 얘기를 들은바가 있는 바그너는 우정 롤라에게 접근하였지만 롤라는 여러 사람과 얘기를 나누는 바람에 바그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중에 바그너는 자기가 소극적이었다며 후회했다.


롤라는 점잖은 사교모임에 어울리는 타입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서 제멋대로였고 말을 거침없이 해서 다른 사람들을 비웃거나 조롱하기를 즐겨했다. 롤라는 신문 가십난에 자주 올랐다. 여자문제에 있어서는 한가닥하는 바그너조차 롤라에 대하여 ‘참 곤란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런 롤라이기에 그가 무대에 나오면 작심을 한듯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일단 롤라가 춤을 추기 시작하면 모두들 넋을 놓고 바라볼 뿐이었다. 특히 롤라가 아슬아슬하게 스트립을 하면 사람들은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롤라의 매력적이면서도 야릇한 춤은  오페라 공연의 막간에 선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라치면 점잖은 오페라 극장이 때아닌 스트립쇼 무대로 변하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롤라가 오페라보다 더 인기를 끌었다. 못 말리는 롤라였다.


바그너는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런 롤라의 꼴이 무척 못마땅했다. 롤라가 야한 옷차림에 카스타네트와 부채를 들고 추는 저속한 춤은 신성한 독일 신화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바그너의 도덕성에 도무지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오페라에서의 여인들은 정신적인 사랑으로 갈등을 하는 것이 바그너 스타일이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롤라는 천박한 성격의 여인으로서 육체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편이었다. 바그너는 롤라가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있더라도 도대체 롤라가 어째서 인기를 끌고 있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리스트가 파리에서 마침내 롤라를 멀리하자 바그너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리스트를 찬양했다. 하지만 롤라는 파리에서 대인기를 끌었다. 마치 비난을 만회하려는 듯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 위해 대노력을 기울였다. 롤라가 파리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하자 바그너는 은근히 질투심이 났다. 파리는 예술과 유행의 첨단도시였다. 그러므로 파리에서 인기를 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재미난 일이 일어났다. 롤라가 애인을 두고 또 다른 애인과 놀아나는 바람에 결투가 벌어져 또 다른 애인이 죽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롤라는 황급히 파리를 도망치듯 떠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바바리아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바그너가 빚쟁이들을 피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도피하다가 루드히비의 초청으로 뮌헨에 정착한 것과는 사정이 달랐다.

 

바바리아에 온 롤라는 아주 고상한 귀부인처럼 행동했다. 롤라는 백작부인처럼 옷을 입고 승마를 하며 고급 커피하우스에 드나들었다. 롤라는 뮌헨에서 루드비히1세를 만나 신세를 고쳐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롤라는 루드비히1세의 시종장이 아침마다 들리는 커피하우스가 어디인지 알아냈다. 어느날 아침 롤라는 말을 타고 가다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 시종장 바로 앞에서 일부러 말에서 떨어졌다. 시종장은 놀래서 그 귀부인을 일으켜 세웠으며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롤라가 시종장을 통해서 루드비히1세 왕을 만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롤라가 60세의 루드비히1세를 만나는 날, 롤라가 기다리고 있는 방의 옆방에서는 루드비히1세가 다른 방문자를 만나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얘기를 들어보니 루드비히 왕이 귀찮은 방문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눈치였다. 그런 눈치를 알아차린 롤라는 일부러 그 방에 잘못 들어온 것처럼 하여 루드비히1세를 회의장으로부터 빼어냈다. 루드비히1세는 그런 롤라가 기특하였다. 이런 얘기도 있다. 루드비히왕은 롤라를 만나자마자 가슴이 풍만한 것을 보고 ‘그거 원래의 것인가, 아니면 만든 것인가?’(Nature or art)라고 물었다. 왕이 모르는 부인을 처음 만났을 때에 그런 야릇한 질문을 해도 상관없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그런 질문을 받은 롤라는 옆의 책상위에 놓여 있던 편지칼을 집어 들고 가슴을 매었던 옷끈을 끊어 자기의 유방을 서슴없이 보여주었다고 한다. 어쩻거나 루드비히 왕은 롤라의 그런 행동에 몹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롤라가 바바리아 정부에서 대단한 존재가 된 것은 시간문제였다. 롤라의 한마디는 곧 루드비히의 말과 다름없게 되었다.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수 없었다. 보수적인 의회의원들은 롤라와 같은 천박한 여인이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의원들은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작위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롤라는 루드비히 왕에게 바바리아의 시민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아울러 란드스펠트(Landsfeld) 백작부인과 로젠탈(Rosenthal) 남작부인의 작위를 달라고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화려한 빌라와 함께 연봉 2만 플로린(Florin)도 요구했다. 모두 국민들의 세금에서 나가는 돈이었다. 롤라를 반대하던 의원들은 ‘국가의 위신이 상처를 입었다. 바바리아가 대단히 평판이 나쁜 외국 여인의 손에 놀아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1848년 당시 유럽에서는 공화제에 대한 열기로 혁명의 불길이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다. 바바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루드비히 왕은 의원들이 공화제를 주장하자 의회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나쁘게 돌아 갈 일을 더 나쁘게 만든 것이었다. 의회가 해산되자 학생들이 들고 있어났다. 학생들은 왕정타도를 외치며 극심한 소요를 일으켰다. 루드비히 왕도 어쩔수 없었다. 결국 롤라의 시민권 문제는 없던 일로 했다. 롤라는 남장을 하고 황급히 뮌헨으로부터 도망가야 했다. 얼마후 루드비히 왕은 왕관을 벗어야했고 아들인 루드비히2세가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문제는 젊은 루드비히2세도 롤라에 대하여 정상적이 아닌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루드비히2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훗날 루드비히2세가 바그너에게 맹목적이 되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였다는 얘기였다. 한편, 롤라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서 잠시동안 생활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제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함에 있어서 가장 영향을 받았던 여인은 베젠동크(Wesendonck)부인이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스토리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것이기 때문에 누구의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틸데 베젠동크(Mathielde Wesendonck: 1828-1902)와 바그너간의 사랑과 열정의 감정은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찬란하게 반영되었다는 얘기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정치적 문제 때문에 스위스로 도피해 왔다. 그런 그를 후원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평소부터 바그너를 존경해 온 직물 무역업자 베젠동크였다. 바그너는 베젠동크의 호의로 취리히의 그의 저택에 있는 별장에서 지낼수 있었다. 이곳에서 바그너는 베젠동크의 젊은 부인인 마틸데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미모에 지성을 겸한 마틸데는 훌륭한 시인이기도 했다. 마틸데는 바그너보다 15세나 젊었다. 그러나 잘 아는 대로 일단 사랑에 눈을 뜨게 되면 나이 차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 사람은 시간만 나며 함께 있었다. 마음도 통하고 얘기도 통했던 것이다. 바그너의 ‘베젠동크의 시에 의한 5편의 가곡’(Wesendonck Lieder)은 마틸데의 시를 가곡으로 만든 것이다. 마틸데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대사(가사)를 도와주기도 했다.

 

 마틸데 베젠동크


바그너와 마틸데 베젠동크의 관계는 마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관계와 같았다.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의 부인,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의 부인을 사랑하는 트리스탄의 경우이며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남자를 사랑해야하는 이졸데의 경우였다. 다만,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바그너는 마틸데와 육체적인 관계까지는 맺지 않았다는 것이며 마틸데로서도 남편에게 성실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틸데가 바그너에게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처럼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열정, 그리고 그로인한 마음의 고통을 심어주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 같다. 바그너와 마틸데의 관계는 욕망과 거부가 계속 상승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심적 긴장감은 쇼펜하우어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열정의 인물인 바그너로서는 마틸데와의 관계를 영원과 불멸, 망각, 죽음...이러한 단어들과 연관 짓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그러한 감정에 초점을 맞출수 있었던 것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현실을 현실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굴복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강력한 욕망과 열정을 이기지 못하여 압도당하는 상황을 표현하였다. 만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면서 그러한 욕망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런 관객들이야 말로 동정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바그너의 생각이었다. 바그너는 음악을 통하여 사실상의 자아 분열을 달성할수 있다고 믿었다. 음악을 통하여 환희, 모든 것을 초월할수 있는 힘, 마음의 평안을 느낄수 있다고 믿었다. 음악평론가들은 이같은 감정이 제2막의 듀엣과 피날레에 놀랄만큼 표현되어 있다고 보았다. 특히 환희의 극치는 이졸데가 이미 죽어 있는 트리스탄의 몸에 쓰러지며 죽는 장면이라고 보았다. 마틸데와의 이룰수 없는 사랑! 바그너는 그 감정을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흠뻑 반영하였던 것이다.


이제 다시 루드비히2세로 돌아가 보자. 아버지인 루드비히1세의 뒤를 이어 바바리아의 국왕이 된 루드비히2세는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루드비히2세는 바그너를 사랑했고 바그너의 오페라를 사랑했다. 어찌나 극진한 열정으로 사랑했던지 바그너의 콧대는 세상모르고 높아 있었다. 바바리아 궁전의 궁신들은 루드비히2세가 동성연애자라고 믿었다. 그러던 차에 바그너가 무대에 등장하자 추잡하고 치졸하기 그지없는 궁신들은 바그너를 루드비히의 상대역으로 선정했다. 그런데 루드비히2세는 자기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신통하게도 롤라 몬테를 무척 사모하였다. 궁신들은 혼란에 빠졌다. 궁신들은 ‘아니, 이자가 동성연애자인가 아닌가?’를 놓고 자기들끼리 토론을 벌였지만 결혼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한가지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은 바그너를 롤로테(Lolotte)라고 부르기로 한 것이다. 롤라와 샬로테(Charlotte)를 합친 단어였다. 루드비히2세에 대한 에피소드는 계속 생산되었다. 어떤 날은 궁전에 탄호이저의 비너스부르크(Venusburg) 무대를 만들어 놓고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또 어떤 날은 로엔그린에 나오는 백조의 기사 차림을 하고 궁전을 돌며 칼을 들고 마치 악마의 세력을 물리치려는 듯한 흉내를 내었다. 정말 봐주기 어려운 것은 루드비히2세가 롤라 몬테로 분장하고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루드비히2세가 궁신들과 바그너를 포함한 측근들을 웃겨주려고 그랬는지 또는 바바리아 역사에 새로운 기록을 남기려고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루드비히2세는 나중에 ‘미친 루드비히’(Mad Ludwig)라는 별명을 들어야 했다.


하루는 루드비히2세가 바그너에게 제안을 하였다. 자기가 이졸데 역할을 할테니 바그너는 트리스탄의 역할을 해서 놀아보자는 제안이었다. 바그너는 루드비히2세의 청을 거절할 입장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성을 돌며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놀이를 심각하게 재현하였다. 작곡가에게 후원자(파트론)가 그런 이상한 요청을 하는 경우는 바그너 밖에 없을 것이다. 바그너 자신도 사치하고 엉뚱한 면에 있어서는 한가닥하는 편인데 루드비히2세에게는 당할 재간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마침내 1865년 말, 뮌헨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성공적으로 공연되었다. 사람들을 깊은 감동으로 몰아넣은 걸작이었다. 이로써 바그너는 체면을 세우고 지난날 루드비히2세와의 스캔들(?)과 관련하여 자기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하지만 그때 쯤하여 바그너는 빚에 시달리게 되었다. 사치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 보니 빚만 늘어났던 것이다. 바바리아에서 도망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약 20년전인 1848년 롤라 몬테가 바바리아로부터 황당하게 도피한 것이나 경우가 비슷했다는 것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바그너가 바바리아로부터 도망할 때에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여장을 했다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거야 말로 롤라 몬테의 도망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었다.


바그너와 롤라는 어떤 점에서 서로 흡사한가? 19세기 유럽의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준 인문들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바그너는 오페라로, 롤라는 야한 춤으로~! 두 사람 모두 바바리아의 루드비히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성공적으로 공연했고 롤라는 미국으로 도피하여 저속한 생활을 하였다. 롤라의 자기도착적인 나르시시즘(Narcissism), 분별없는 욕망, 알맹이는 없고 껍질뿐인 가치관과 도덕성...이러한 것들은 바그너가 지향하는 것과 너무나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두 사람에게는 묘한 공통점이 발견되곤 한다. 자만심과 충동성이다. 여기에 사치가 곁들인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19세기 유럽문화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1847년의 롤라 몬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