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와 여인들

'카르멘'과 모가도르

정준극 2009. 2. 22. 21:25

카르멘과 모가도르

 

사브리앙과 결혼할 당시의 모가도르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뮌헨에서 초연되던 해인 1865년, 비제는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파리 근교의 르 베시네(Le Vesinet)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르 베시네 마을에는 비제의 아버지가 얼마전에 마련한 작은 농원이 있었다. 비제는 기차에서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났다. 라 모가도르(La Mogador)라는 인기 무희였다. 모가도르도 마침 비제가 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농원을 가지고 있어서 그곳에 가는 길이었다. 당시 비제는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는 위치였기 때문에 사회적인 인기에 있어서는 모가도르와 비교도 될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우연한 만남으로 두 사람은 이웃이 될수 있었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지만 이 마을에는 나중에 조세핀 베이커(Josephine Baker)가 집을 마련하여 살기도 했다. 미국출신의 흑인 조세핀 베이커는 1920년대에 파리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검은 진주’라는 애칭으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에로틱 댄서였다. 

 

비제가 모가도르를 처음 만났을 때 마고도르는 41세였고 비제는 24세였다. 하지만 모가도르는 청년 비제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한 외모였다. 당시의 어떤 작가가 모가도르에 대하여 쓴 글을 보면 모가도르는 ‘밀로의 비너스’와 같다고 했다. 허리는 개미처럼 잘룩했고 목소리는 방울새처럼 명랑했으며 뺨에는 마마자국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대단한 매력이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후 비제는 모가도르에 흠뻑 도취되어 숭배자가 되었다. 얼마후 비제는 메리메의 소설을 기본으로 오페라 카르멘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오페라 카르멘이 모가도르로부터 영감을 받지나 않았을까? 비제의 전기작가인 미나 쿠르티스(Mina Curtiss)에 따르면 ‘확실히 그렇다’는 것이었다. 모가도르는 어떤 여인인가? 간단히 말해서 알렉산더 뒤마(아들)가 연모했던 마리 뒤플레씨스라는 아가씨와 거의 같은 처지였다고 보면 된다. 마리 뒤플레씨스는 알렉산더 뒤마(아들)의 소설 ‘동백꽃을 단 여인’의 주인공이다. 이 소설을 기본으로 베르디가 불후의 걸작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작곡했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는 마리 뒤플레씨스가 비올레타 발레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렇다고 마고도르가 비올레타처럼 알프레도의 장래를 위해 희생할줄 아는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카르멘의 성격과 흡사했다. 모가도르의 본명은 첼레스트 베나르(Celeste Venard)이다. 1821년 파리 교외에서 어떤 가난한 노동자의 딸로 태어났다. 13살 되던 해에 첼레스트는 자기 어머니의 애인들이 자기에게 지나치게 치근거리자 무작정 가출하여 파리로 올라왔다. 파리에 올라온 첼레스트는 이 일 저 일을 해보았으나 먹고 살기에도 힘든 형편이었다. 그러다가 16세 때에 말하자면 보르델로(Bordello)에 들어가 창녀가 되었다. 보르델로는 고급 매음굴을 겸한 사교클럽이다. 첼레스트는 이곳에서 시인 알프레드 드 뮈쎄(Alfred de Musset)를 만났다. 드 뮈쎄는 파리에서도 알아주는 바람둥이였다. 어쨌든 두 사람은 곧 가까워졌다. 그러나 첼레스트는 드 뮈쎄가 자기를 마치 한낱 순간적인 노리개처럼 여기는 것을 알고 식당에서 드 뮈쎄의 얼굴에 마시고 있던 탄산수를 뿌려준후 보르델로를 뛰쳐나왔다. 첼레스트는 댄서가 되기로 결심했다. 롤라 몬테가 무희가 되고자 결심했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였다. 첼레스트와 같은 여자가 당시의 사회에서 할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다.


첼레스트는 댄스홀에서 손님들을 상대로 춤을 추었다. 그때에 모가도르라는 별명을 얻었다. 모가도르는 모로코에 있는 항구의 이름이다. 마침 당시에 프랑스 해군이 모가도르에 함포사격을 가해 쑥대밭으로 만든 일이 있다. 댄스홀의 손님들은 누구든지 첼레스트를 점령코자했다. 하지만 첼리스트는 만만치 않았다. 사람들은 ‘모가도르를 점령하는 것이 훨씬 쉬울것이다’라며 첼레스트를 녹녹히 여기지 못했다. 그로부터 첼레스트에게는 라 모가도르(la Mogador)라는 별명이 붙었다. 모가도르는 댄스홀에서 단계를 높이어 서커스의 단원이 되었다. 모가도르의 스턴트와 아슬아슬한 스트립은 사람들의 손에 땀을 쥐게하는 것이었다. 모가도르는 점차 유명해졌다. 서커스 시절, 모가도르는 샤브리양(Chabrillan)이라는 귀족을 손에 넣을수 있었다. 두 사람은 나중에 결혼까지 하게 되었지만 샤브리양의 가족들은 모가도르가 창녀였던 것을 내세워 대단한 반대를 하였다. 남편 샤브라양은 돈을 써서 모가도르의 호적을 정리하고 모가도르가 보르델로에서 지냈다는 것을 감추기에 급급했으나 별로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결국 남편가문의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한 모가도르는 빚을 갚기 위해 비망록(Memoires)을 썼고 비망록이 날개 돋힌듯 팔리자 돈을 벌어 상당액의 빚을 갚았다. 모가도르의 비망록(또는 회고록)은 귀족들과의 스캔들을 솔직하게 적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아주 인기였다.


남편인 샤브리양은 모가도르의 비방록 때문에 체면이 말이 아니게 구겨져 오스트레일리아로 도피하였다. 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총영사로 임명되어 가게 되었다. 모가도르는 그 먼곳까지 배를 타고 남편을 찾아 갔다. 흥미로운 것은 모가도르가 호주에 갔던 때가 롤라 몬테가 바바리아에서 도망하여 호주로 간 시기와 비슷했다는 것이다. 남편 샤브리양은 1858년 세상을 떠났다. 모가도르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오페라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프랑스 스타일의 오페레타를 작곡하여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모가도르는 소설도 쓰고 희곡도 썼다. 노래가사도 작사하고 시도 썼다. 대단한 재능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모가도르를 ‘조르즈 상드의 축소판’이라며 비웃기도 했지만 그건 엘리트들의 속물근성에서 나온 표현일뿐, 실제로 모가도르의 재능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했다. 모가도르가 쓴 ‘황금 도적들’(The Gold Robbers)은 뒤마(아버지)가 번역하여 무대에 올릴 정도였다. 연극 '황금 도적들'은 대히트였다. 특히 노동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 연극의 성공으로 모가도르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모가도르는 라 비세네(La Visenet)에 농원을 살수 있었고 그 농원을 방문하러 기차를 타고 가다가 비제를 만난 것이다. 그후 비제는 모가도르의 매력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이를 카르멘의 성격설정에 반영했다는 얘기다. 어떤 점에서 그랬다는 것인가?


카르멘은 프로스페르 메리메(Prosper Merimee)의 작품이다. 메리메는 오랜 동안 스페인과 남불과 집시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로 나온 작품이 카르멘이다. 카르멘은 파리의 점잖은 부인들과는 너무나 다른 관능적인 여인이었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이 공연되자 평론가들은 입을 모아 카르멘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카르멘을 매춘부(Harlot)라고 불렀고 돈 호세를 혐오스러운 악당(Odious vile)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아마 카르멘을 롤라 몬테보다 더 타락하고 추잡한 여인이라고 싸잡아서 말했을지도 모른다. 롤라 몬테는 마치 카르멘처럼 한 손에는 카스타네트를 잡고 다른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선정적인 춤을 추며 뭇 남자들의 마음을 흐리게 만든 무희였다.


오페라 카르멘은 바그너의 초기 오페라가 그랬던 것처럼 가히 혁명적인 작품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비제와 바그너가 공통점이 있다. 다만, 비제와 바그너가 다른 점이 있다면 비제는 모가도르에서 영감을 받아 카르멘을 작곡했지만 바그너는 롤라 몬테로부터 별다른 영감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것은 비제의 오페라가 바그너스타일이라는 평을 받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비제의 오페라는 프랑스보다는 독일에서 더 많은 환영을 받았다. 브람스도 비제를 찬양하였고 비스마르크도 비제를 찬양하였다. 아마 독일인들로서는 카르멘을 통하여 지중해의 강렬한 햇빛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바그너의 음악은 독일과 북유럽의 춥고 어둠침침한 신화를 배경으로한 것이었다. 그런가하면 바그너는 독일의 통일이라든지 독일인의 프라이드를 내세우는 작품을 썼다. 그러나 비제의 작품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사랑과 배신과 관능과 쾌락이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바그너의 오페라는 독일연합이라는 대명제를 위해서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비스마르크의 독일통일 작업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제3제국에서는 히틀러의 독일 유일사상을 고취하는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바그너의 작품은 일반인들을 위한 거리의 오페라라기보다는 아방 갸르드(전위)적이고 진취적인 것이었다. 바그너의 음악은 남성적이며 프러시아 군대가 유럽을 건너 진군하는데 필요한 것이었다. 한편, 프랑스 사람들은 이미 통일을 이루었고 또한 하나의 국가라는데 대하여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바그너의 독일에서처럼 국가통일과 민족 프라이드를 외칠 필요가 없었다. 대신, 프랑스 사람들은 유럽이 아니라 눈을 더 남쪽으로 돌려 아프리카를 바라보았다.

 

모가도르를 주제로한 비망록 - '어느 창녀의 비망록'

 

또 다른 차이점도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여인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러나 바그너는 그렇지 못했다. 사실상 바그너의 오페라는 영웅의 죽음을 찬양하였으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죽어가는 여주인공을 찬양하였다. 바그너의 주인공들은 운명에 의해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으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오페라 여주인공들은 폐렴과 같은 질병으로 죽어갔다. 실제로 당대의 사람으로서 비제와 그의 부인은 물론 쇼팽과 니체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설정이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니체는 그렇다고 보았다. 니체는 처음에 바그너의 음악을 찬양했다. 그러다가 1878년 이후에는 바그너를 외면하였다. 니체는 바그너의 독일적 신화와 스캔디나비아의 괴물들에 대하여 혐오증을 가지게 되었다. 유럽 문화를 부패토록 하는 요소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니체는 ‘음악이란 여인이다’라고 썼다. 그는 바그너의 육감적인 음악이 ‘정신세계를 피곤하고 만들고 타락시킨다’고 보았다.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을 키르케(Circe: 호머의 오디세이에 나오는 요부)라고 평했다. 니체는 ‘우리를 감미롭게 만드는 것이 음악이다. 악마적인 것, 또는 운명적인 것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니체는 비제를 좋아했다.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카르멘이 죽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그것이 그 시대 오페라의 관습이라고 보았다. 누군가 장열하고 가슴을 적시는 아리아를 위해 마지막 장면에서 죽는 것은 극적인 편의성을 위해 존재할 뿐이라는 설명이었다. 카르멘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도 운명을 절박하게 배반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비제의 오페라의 주인공들은 자기들의 행동 때문에 추락하게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설명이다. 니체는 카르멘이 추락한 것이 아니라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카르멘은 롤라 몬테나 마고도르와 마찬가지로 따듯한 태양과 스페인의 풍부한 색채, 지중해의 열정, 집시의 생활, 죽음에 대한 육체의 승리를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바그너와 정반대였다. 카르멘과 롤라와 마고도르의 자유분방함은 오랫동안 고통받아온 여인들을 해방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좋다면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서처럼 동양적인 터번과 슬리퍼를 신을수 있으며 스페인의 의상을 입을수 있다. 프랑스의 여주인공들은 조르주 상드가 메리메에게 그랬던 것처럼, 롤라가 그를 추종하는 남성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바그너가 매일의 생활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담 드 슈탈(Madame de Stael)이 의상과 재치로서 사람들을 쇼킹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할수 있고 연인들과 로맨스를 나눌수 있었다.

 

 

 

 모가도르를 그린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