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와 여인들

'살로메'와 마타 하리

정준극 2009. 2. 22. 21:26

살로메와 마타 하리

 

마타 하리(1876-1917)


1917년 10월 15일, 마타 하리(Mata Hari)가 독일을 위한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파리 근교의 샤토 드 뱅센느(Chateau de Vincennes)에서 총살되었다. 얘기에 따르면 프랑스 장교들이 마타 하리를 체포하러 갔을 때 마타 하리는 완전 누드로 이들을 맞이하면서 함께 침대로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총살을 집행할 때 한 병사가 마타 하리의 눈을 가리려 하자 마타 하리는 이를 거부하고 꼿꼿이 서서 총살대의 병사들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고 한다. 총살대원중의 어떤 병사는 차마 마타 하리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허공에다가 총을 쏘았다고 한다. 총살대가 총을 쏘자 마타 하리는 마치 의자에 살포시 앉는 듯 그대로 주저 앉았다고 한다. 그래서 페티코트(속치마)를 드러내 보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본 어떤 병사가 ‘아, 이 여자는 어떻게 죽는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마타 하리에게 있어서 총살형에 의한 죽음도 결국은 연기에 속하는 것이었다.


또 한가지,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마타 하리를 총살 할 때에 처음에는 공포탄을 쏘아 거짓으로 죽게 하고 살려 줄 셈이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실탄으로 바꿔치기 했다는 것이다. 마치 토스카에서 카바라도씨에게 공포탄을 쏘려고 약속했다가 실탄을 쏜 경우와 같다. 또 어떤 얘기에 따르면 마타 하리는 죽기 직전에 총살대원들에게 키스를 보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화려한 위세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얘기에 의하면 총살대원들이 총을 겨누자 마타 하리는 블라우스를 헤치고 유방을 들어내 보여 총살대원들을 한순간 아찔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마타 하리는 40대의 여인이었지만 아직도 탐스러운 유방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얘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반역죄로 총살당한 마타 하리의 시신을 거두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국은 시신을 파리의과대학에 해부 실습용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의과대학생들이 과연 이 희대의 여간첩 겸 세상을 흔들었던 미모의 댄서를 어떤 심정으로 해부하였는지 아직도 미지수이다. 우선 몸속에서 여러 개의 총알을 꺼집어 냈을 것이다.


파리에서 알아주는 여성인 나탈리 클리포드 바니는 마타 하리의 최후에 대하여 떠도는 얘기를 듣고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확인을 하기로 결심했다. 바니는 우선 당시 총살대의 대장을 접촉하는데 성공했다. 총살대장의 말에 따르면 떠도는 얘기들은 전부 근거 없는 얘기라는 것이었다. 다만, 마타 하리가 최후의 순간까지 스타일을 버리지 않았으며 자존심을 지키면서 처형을 맞이했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얘기였다. 바니는 마타 하리를 파리에서 처음으로 춤을 추도록 주선해준 여인이었다. 바니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파리 사람들의 허풍 내지 과장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바니는 마타 하리에 대한 얘기도 그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헛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파리 사람들은 얘기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과장된 쪽으로만 믿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마타 하리에 대한 헛소문들은 계속 퍼지기만 했다. 마타 하리가 독일 스파이라는 얘기는 1970년대의 사람들도 그렇게 믿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에서 일곱 베일의 춤을 추고 있는 소프라노 수잔 피어슨


살로메의 얘기는 하지 않고 마타 하리에 대한 얘기만 하는데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조금만 더 기다리시라! 마타 하리는 마가레타 첼레(Margaretha Zelle)라는 이름으로 1876년 네덜란드의 리우와덴(Leeuwarden)이란 곳에서 태어났다. 19세 때인 1895년에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두었다. 딸은 1898년 자바에서 살 때에 태어났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딸이 태어난 이듬해에 아들이 병에 걸려 죽었다. 남편이란 사람은 매우 성질이 거친 사람이었다. 마타 하리를 학대하기가 일수였다. 견디지 못한 마타 하리는 1904년 이혼하였다. 마타 하리라는 이름은 이혼한 이듬해인 1905년 파리에서 필요에 의해 만든 이름이었다. 파리에 온 마타 하리는 먹고 살기 위해 무엇이든지 해야 했다. 그의 육감적이고도 완벽한 균형의 몸매는 댄서로서 최적이었다. 댄서로서 만든 이름이 마타 하리였다. 말레이어로 ‘태양의 눈’ 또는 ‘아침의 눈’이라는 뜻이다. 마타 하리는 춤을 출 때 자바 사원의 신성한 종교의식적인 춤을 추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파괴의 여신 시바의 신성한 시녀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마타 하리가 동양의 신비스러운 섹스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마타 하리는 집에서도 몇몇 가까운 손님들을 위해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럴 때면 완전 누드에 뱀을 몸에 감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마타 하리는 마치 스핑크스와 같이 겉으로는 여성적인 면에서 신비스러운 춤을 추었다고 한다. 섹시하지만 위험한 춤이었다. 마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죽임을 당할 것만 같은 그러한 섬뜩한 춤이었다. 만일 오페라에서 그러한 춤이 등장한다면 관중들은 숨을 죽이며 넋을 잃고 바라만 보았을 것이다. 마타 하리는 살로메의 일곱 베일의 춤을 추었다. 베일을 하나하나 벗어 던질 때마다 관중석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거의 벗은 몸으로 추는 살로메의 춤은 새로운 세기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모든 구습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행동이었다. 오대양에 걸쳐 식민지 세력을 확장한 유럽의 제국들은 이제 에로틱한 것까지도 정복하려는 양상이었다. 마타 하리가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창조한 살로메는 마타 하리를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오페라 살로메에서 살로메가 일곱 베일의 춤을 출 때 사람들은 마타 하리를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마타 하리가 오페라 무대에 환생하였다고 생각했다.

 

 세기의 여우(女優) 그레타 가르보가 주연한 영화 '마타 하리'의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