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벌리 실스(Beverly Sills)
비벌리 실스가 2007년 7월 2일 세상을 떠났을 때 세계의 음악계는 한결같이 추모의 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비벌리 실스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미국을 대표하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그의 명성은 전세계를 휩쓸었었다. 비벌리 실스는 1980년에 오페라 무대와 고별하였다. 그후 그는 뉴욕시티오페라 총감독으로 활동하였으며 1994년에는 린컨센터의 회장이 되었고 2002년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회장이 되어 2005년 은퇴할 때까지 오페라만을 위해 헌신하였다. 실스는 세상 떠나는 날까지 자선활동에 정진하였으며 특히 비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한 활동에 매진하였다. 실스가 비정상적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의 두 아들도 정상아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큰아들 메레디스(Meredith: 애칭 Muffy)는 선천적으로 청각장애자였고 둘째 아들 피터(Peter: 애칭 Bucky)는 정신박약아였다. 실스는 두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기 위해 웬만한 연주회는 취소하며 지냈다. 실스의 이같은 인간애 때문에 그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함께 하였다.
비벌리 실스는 1939년 5월 25일 벨르 미리암 실버맨(Belle Miriam Silverman)이라는 이름으로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소니아 마르코브나(Sonia Markovna)는 음악가였으며 아버지 모리스 실버맨(Morris Silverman)은 보험중개인이었다. 실스의 부모는 오데싸와 루마니아의 부카레스트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유태인이었다. 실스의 이름에 미리암(영어의 메리)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어 있는 것만 보아도 알수 있는 일이다. 실스는 브루클린에서 자라났다. 실스는 네 살 때부터 토요일 아침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인 ‘레인보우 하우스’(Rainbow House)에 ‘버블스 실머맨’이라는 이름으로 고정 출연하였다. 그래서 동네 친구들은 실스를 ‘버블스’라고 불렀다. 버블스는 귀여운 비누방울을 뜻한다. 실스는 루마니아 출신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이디쉬어(동구 유태인들의 언어), 러시아어, 루마니아어, 프랑스어, 그리고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이러한 어학적 재능은 나중에 오페라 공연에 많은 도움을 준 것이었다.
실스는 세 살때에 ‘미쓰 예쁜 아기’(Miss Beautiful Baby) 경연대회에 나가서 1등을 했다.귀엽도록 예뻤을 뿐만 아니라 노래도 잘 불렀다. 어릴때 실스는 ‘잭과 질의 결혼’(The Wedding of Jack and Jill)이라는 노래를 깜찍하게 불러 사람들이 혀를 홰홰 내두르도록 했다. 실스는 일곱 살이 되자 유명한 성악교사인 에스텔르 리블링(Estelle Liebling)으로부터 정식으로 성악 레슨을 받았다. 어린 아이가 무얼 알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스는 노래공부를 그야말로 열심히 했다. 1년후 실스는 Uncle Sol Solves It(솔 삼촌은 해결사)라는 단편영화에 출연하여 깜찍하고 예쁜 모습으로 주위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이 영화에 출연할 때에 버블스 실버맨이란 이름 대신에 비벌리 실스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실스의 레슨 선생인 리블링 여사는 실스에게 CBS 라디오의 재능 있는 예술인 발굴 프로그램에 출연하라고 권유했다. Major Bowes' Amateur Hour(바우스 소령의 아마추어 시간)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실스가 열 살 때였다. 실스는 당당히 수상자가 되어 주말 버라이어티 쇼에 고정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첫 번 출연은 1939년 11월, 버라이어티 쇼 1주년 기념 특별 프로그램이었다.
실스는 16세 때인 1945년 길버트-설리반 순회공연단에 들어가 비로소 무대에 데뷔하였다. 이 순회공연단은 미국과 캐나다의 12개 도시를 순방하며 길버트-설리반의 오페라(뮤지컬)를 공연하였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여서 모두들 길버트-설리반의 오페라에 열광하였다. 이때 실스는 길버트-설리반의 작품 일곱 편에 출연하는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중에서 실스가 가장 인기를 끌었던 작품은 페이션스(Patience)였다. 재치 있고 명랑하며 사랑스러운 아가씨 역할이었다. 실스는 그때부터 자기가 슬랩스틱유머(Slapstick humor)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스는 몇 년동안 가벼운 오페라에 출연하여 무대인으로서의 자질을 닦아 나갔다.
실스가 본격 오페라 무대에 데뷔한 것은 1947년, 그가 18세 때였다. 필라델피아에서 카르멘의 집시여인인 프라스퀴타(Frasquita)로 무대에 선 것이다. 이어 실스는 1951년에 챨스 와그너(Charles Wagner)오페라단과 함께 미국 각지를 순회 공연함으로서 오페라에 대한 애정을 키웠다. 이때 실스가 맡은 역할은 비올레타(라 트라비아타)였다. 사람들은 비올레타가 아닌 비벌리 실스를 보러 극장으로 몰려 왔다. 1953년 가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메피스토펠레’(보이토)에서 ‘트로이의 헬렌’과 ‘돈 조반니’(모차르트)에서 돈나 엘비라를 맡았고 1955년 가을에는 뉴욕시티오페라에서 ‘박쥐’(요한 슈트라우스)의 로잘린데를 맡아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실스는 오페라 소프라노로서 확고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미국에서 실스의 이름을 보다 높이게 된 것은 1958년 뉴욕에서 초연된 더글라스 무어(Douglas Moore)의 ‘베이비 도의 발라드’(The Ballad of Baby Doe)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것이었다. 이 오페라는 미국 작곡가에 의한 미국적인 작품이어서 미국인인 실스는 더욱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당시 미국에서 공연되는 대부분 오페라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의 오페라였으며 출연자들도 대부분 유럽 성악가였기 때문에 실스의 등장은 미국인들을 열광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1956년 11월, 실스는 오하이오 클리브랜드의 저널리스트인 피터 그리너프(Peter Greenough)와 결혼하여 뉴욕을 떠나 클리브랜드에 살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두 아들 ‘머피’와 ‘버키’를 두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바와 같다.
1960년 보스턴 부근으로 이사온 실스는 1962년 보스턴오페라단의 공연인 마스네의 마농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다. 유명한 오페라 감독인 사라 콜드웰(Sarah Caldwell)이 감독한 오페라에 처음 출연한 것이었다. 이후 마농은 실스의 오페라 경력에서 가장 대표적인 역할이 되었다. 실스는 1964년 콜드웰이 감독한 마적에서 ‘밤의 여왕’을 불렀다. 실스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실스는 ‘밤의 여왕’ 역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1966년 뉴욕시티오페라는 헨델의 오페라 세리아인 ‘줄리오 세자레’(Giulio Cesare)를 무대에 올렸다. 이 작품은 당시까지 만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오페라였다. 실스는 클레오파트라 역할을 맡았다. 실스는 이 역할로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되었다. 실스가 메트로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오페라 무대에서가 아니라 센트럴 파크(Central Park)에서 열린 메트로의 ‘Opera in the Parks’ 공연에서였다. 이때 실스는 ’돈 조반니‘에서 돈나 안나(Donna Anna)의 아리아를 불렀다. 메트로의 음악총감독인 루돌프 빙(Rudolf Bing)은 주위의 권고를 무시할수 없어서 실스를 초청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실스는 플로토우의 ’마르타‘에 주역인 레이디 해리에트(Lady Harriet)로 출연하여 메트로에 처음 등장할수 있었다. 그러나 루돌프 빙은 다른 소프라노들이 있다는 구실로(주로 독일계와 이탈리아계) 실스를 더 이상 초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스는 이듬해에 뉴욕시빅오페라(NYCO)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황금 닭‘에서 세마카(Shemakha)여왕을 맡아 보란듯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이어 루치아(람메무어의 루치아), 그리고 푸치니의 3부작에서 여주인공인 수녀 안젤리카, 조르제타(Giorgetta), 로레타(Lauretta)를 맡아 오페라 소프라노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69년 실스는 보스턴에서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의 미국 초연에서 체르비네타(Zerbinetta)를 맡았다. 이 공연에서 실스는 체르비네타의 아리아인 Grossmächtige Prinzessin(막강한 공주님)를 오리지널키로 불러서 갈채를 받았다.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의 미국 초연 스코어는 작곡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1912년 수정한 것으로 체르비네타의 아리아는 오리지널키보다 낮게 편곡된 것이다. 그러나 실스는 오리지널의 높은 키로 아리아를 불렀던 것이다. 이 아리아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가장 고음을 내야하는 난곡으로 알려진 것이다. 1969년의 보스턴 공연은 어떤 사람이 개인적으로 홈 비디오로 만들었다. 실스의 체르비네타의 아리아를 다시 들을수 있는 테이프이다. 이 테이프는 음악수집가들의 수집대상품목이 되었고 인터넷을 통하여 상당히 고가로 경매되었다. 다행히 1969년의 보스턴 공연은 2006년 디스크로 나오게 되어 음악애호가들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1969년에 실스는 또 하나의 위대한 개선을 하였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로시니의 ‘고린도 공성’(메호메토 세군도)에서 파미라(Pamira)를 맡아 글자그대로 대성공을 거둔 일이었다. 실스는 이 공연으로 세계적인 뉴스위크(Newsweek)지의 표지인물로 등장하였다. 1971년에는 역시 세계적인 타임(TIME)지에 ‘미국 오페라의 여왕’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커버인물로 등장하였다. 뉴스위크지와 타임지의 표지인물로 동시에 게재된 성악가로서는 비벌리 실스가 처음이며 그 이후로는 그런 예가 없었다. 실스를 ‘미국 오페라의 여왕’이라고 표현한 것은 적절한 것이다. 왜냐하면 실스는 두 아들을 보살피느라고 해외공연을 거의 하지 않고 미국에서만 공연했기 때문이다. 실스가 해외공연을 가진 것은 런던의 코벤트 가든, 밀라노의 라 스칼라, 베니스의 라 훼니체, 비엔나의 슈타츠오퍼, 스위스 로산느의 테아트르 드 볼리유(Theatre de Beaulieu) 뿐이다. 미국에서 멀지 않은 멕시코시티에서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람메무어의 루치아’를 공연한 일이 있다.
실스는 오페라 출연을 하는 중에 TV 토크쇼에 출연하여 토크쇼 진행자로서 높은 재능을 보여주었다. ABC 필름이 연합하여 제작한 시리즈로서 Virginia Graham's Girl Talk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실스의 고정 출연으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 프로그램이었다. 1974년 실스는 난소암이라는 진단을 받아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회복은 빨랐다. 실스는 수술을 받은지 한달 후에 샌프란시스코오페라에서 ‘연대의 딸’(도니제티)에 출연하였다. 실스가 ‘연대의 딸’에서 마리로 분장한 포스터는 비벌리 실스의 등록상표나 마찬가지로 사랑을 받았다.
1975년 루돌프 빙이 메트로에서 떠나자 실스는 마침내 메트로에 데뷔아닌 데뷔를 하게 되었다. 로시니의 ‘고린도 공성’에서 파미라를 맡았다. 18분동안 기립 박수를 받았다. 실스가 메트로에서 맡았던 역할은 비올레타(라 트라비아타), 루치아(람메무어의 루치아), 타이스(타이스), 노리나(돈 파스쿠알레) 등이었다. 실스에 대한 인기는 높아져 가기만 했다. 루돌프 빙은 은퇴에 즈음한 기자회견에서 ‘실스를 거부한 것은 나의 경력에 있어서 가장 큰 실수였다. 내가 이탈리아 소프라노들을 좋아한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미국 관객들은 레나타 테발디와 같은 이탈리아 소프라노만을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고 술회하였다.
실스는 독창회를 자주 열었다. 특히 성악가생활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10년동안 많은 독창회를 가졌다. 실스는 미국 전역의 중소도시를 순방하여 독창회를 가졌다. 그런 도시의 사람들은 기회가 없어서 실스의 노래를 듣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실스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대학교와 공회당을 찾아다니며 독창회를 가져 사랑을 받았다. 실스는 노력하는 성악가였다. 실스는 오페라 소프라노로서 은퇴하기 직전까지 새로운 역할에 도전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뉴욕시티오페라에서 로시니의 ‘이탈리아의 터키인’, 레하르의 ‘메리 위도우’, 메노티의 ‘라 로카’(La loca)에서 주역을 맡는 도전을 한 것이었다. ‘라 로카’는 메노티가 실스를 위해 특별히 작곡한 오페라이다.
실스는 기본적으로 리릭 콜로라투라이지만 경륜이 쌓이면서 스핀토와 드라마틱 소프라노로서의 재능을 보여주기도 했다. 예를 들면 도니제티의 ‘루크레지아 보르지아’ ‘안나 볼레나’ ‘마리아 스투아르다’ ‘로베르토 드브러’(플라치도 도밍고의 상대역)에서 놀라운 역량을 보여준 것이다. 실스는 이같은 역할에서 투명한 가벼움에 드라마틱한 영감을 융합하는 음성을 보여주어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만큼 힘들기도 했다. 특히 ‘로베르토 드브러’가 그러했다. 나중에 실스는 “‘로베르토 드브러’를 맡았기 때문에 나의 오페라 무대 경력이 적어도 4년이나 단축되었다.”라고 말했다.
실스는 오페라의 대중화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여러 성악가들에 비하여 특히 그러했다. 실스는 라디오와 TV에 출연을 많이 했다. 이를 통하여 일반에게 오페라를 알리고 오페라를 사랑하도록 하는 기여를 했다. 실스는 조니 카슨, 딕 케벳(Dick Cavett), 데이빗 프로스트(David Frost), 마이크 더글라스, 머브 그리핀(Merv Griffin), 다이나 쇼어(Dinah Shore)등의 쇼에 출연하여 오페라를 소개했다. 실스는 자기의 토크 쇼를 가지기도 했다. NBC의 ‘Lifestyles with Beverly Sills'(비벌리 실스와 함께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란 프로그램이었다. 1979년에는 모펫 쇼(Muppet Show)에도 출연했었다. 실스는 오페라 디바라고 하면 오만하고 도도한 인물이라는 과거의 인식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다. 실스는 친근하고 겸손한 디바였다.
1978년, 실스는 자기가 2년후인 1980년 10월 27일, 뉴욕시티오페라의 갈라공연를 마지막으로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과연, 그날은 누구에게나 사랑받던 아름다운 디바의 화려한 무대였다. 실스는 무대를 떠났지만 뉴욕시티오페라의 음악총감독으로서 오페라 활동은 계속하였다. 공식적으로 무대를 떠난 실스는 여러 자선활동에 관여하면서 어려운 사람들, 소외되고 불행한 이웃들을 위해 헌신하기 시작했다. 실스는 특히 각대학에서 특별강연과 리사이틀을 주선하여 자선활동을 위한 모금을 했다. 실스는 1994년부터 2002년까지 린컨센터의 회장이었다. 2002년 10월, 실스는 드디어 메트로의 회장으로 봉사키로 약속했다. 실스는 1991년부터 메토로 위원회의 멤버였다. 2005년 1월, 실스는 메트로 회장을 사임하였다. 이유는 8년동안 요양원 생활을 하고 있는 남편을 전적으로 돌보기 위해서였다. 실스의 남편 피터 그라너프는 2006년 9월에 세상을 떠났다. 결혼 50주년 기념을 한달 앞둔 때였다. 이후로 실스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욕실에서 샤워하면서 콧노래조차 부르지 않았다. 지난날 자기 음성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2007년 6월 28일(필자의 결혼기념일)에 AP통신과 CNN 방송은 실스가 폐암으로 중태에 빠져 입원했다고 보도했다. 그로부터 나흘 후인 7월 2일, 비벌리 실스는 딸이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암에 굴복하여 숨을 거두었다. 향년 78세였다.
실스는 수많은 상과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면이 한정되어 수상경력을 일일이 기록할수없는 것이 유감이다. 다만, 부연한다면 수많은 레코딩으로 그래미(Grammy)상과 에미(Emmy)상을 여러번 받았다는 것이다. 명예박사학위는 템플대학교, 뉴욕대학교, 뉴잉글랜드음악원(New England Conservatory of Music), 하바드대학교에서 받았다. 2005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매년 5만불의 상금을 주는 ‘비벌리 실스 예술가상’(Beverly Sills Artist Award)를 설립하였다.
비벌리 실스가 전곡을 취입한 오페라는 ‘베이비 도의 발라드’ ‘줄리오 세자레’ ‘로베르토 드브러’ ‘람메무어의 루치아’ ‘마농’ ‘라 트라비아타’ ‘마리아 스투아르다’ ‘호프만의 이야기’ ‘안나 볼레나’ ‘청교도’ ‘노르마’ ‘고린도 공성’ ‘세빌리아의 이발사’ ‘캬풀레티가와 몬테키가’ ‘타이스’ ‘루이제’ ‘돈 파스쿠알레’ ‘리골레토’이다. DVD로 나온 실스의 오페라 공연은 ‘낙소스의 아리아드네’ ‘연대의 딸’ ‘로베르트 드브러’ ‘라 트라비아타’ ‘세빌리아의 이발사’ ‘마농’이다.
비올레타
메리 위도우
마리아 스투아르다
람메무어의 루치아
마농
마르타(레이디 해리엣)
'디바·디보의 세계 > 세계의 소프라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리온 반 덴 아커(Marion van den Akker) (0) | 2009.03.03 |
---|---|
릴리 폰스(Lily Pons) (0) | 2009.03.03 |
슈트라우스가 찬미한 비오리카 우르술레아츠(Viorica Ursuleac) (0) | 2008.06.28 |
메트로의 토스카 Zinka Milanov (진카 밀라노프) (0) | 2008.02.28 |
뛰어난 재능과 미모 Zinaida Jurjevskaya (지나이다 유르예브스카야) (0) | 2008.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