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 폰스(Lily Pons)
릴리 폰스는 20세기를 찬란하게 장식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이다. 그의 음성은 마치 백합과 같이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물위에 메아리가 퍼지듯 기쁨을 주는 것이었다. 미모의 릴리 폰스는 타고난 미성으로 메트로폴리탄을 30여년간 지배해온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여왕이었다. 릴리 폰스(1898-1976)는 프랑스계 미국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이다. 프랑스의 칸느 인근 드라귀난(Draguignan)에서 앨리스 조세핀 폰스(Alie Josephine Pons)로 태어난 그는 15세에 피아노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여 파리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1차대전중에는 파리에 있는 육군병원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여 노래를 불러 상이군인들을 위로하였다. 1925년, 27세 때에 소프라노 디나 보이머(Dyna Beumer)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성악 레슨을 받았다. 첫 오페라 데뷔는 1928년 레오 들리브의 라크메를 맡은 것이었다. 대성공이었다. 이후 그는 프랑스의 지방 오페라 극장에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공연을 가지기 시작했다. 오페라 제작가인 조반니 제나텔로(Giovanni Zenatello)가 폰스를 발탁하여 뉴욕에 진출할수 있도록 해주었다. 폰스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총지배인인 줄리오 가티-카사짜(Giulio Gatti-Casazza)에게서 오디션을 받았다. 당시 메트로폴리탄은 약 1년전 아멜리타 갈리-쿠르치(Amelita Galli-Curci)가 은퇴한후 새로운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를 절박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1931년 1월 3일, 미국에서는 알려지지도 않은 프랑스 여인 폰스가 메트로에서 루치아로 데뷔하였다. 폰스의 공연은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폰스는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되었다. 이후 폰스는 갈리-쿠르치가 맡아 했던 역할들을 물려 받아 메트로를 빛내기 시작했다. 폰스는 RCA 빅터 레코드와 음반 취입 계약도 맺었다.
폰스는 30여년동안 메트로의 정상 소프라노였다. 1931년부터 1960년까지 대략 10개의 역할로 300회 이상 무대에 올라섰다. 가장 자주 공연한 역할은 루치아였고 다음으로는 라크메, 질다(리돌레토), 로지나(세빌리아의 이발사)였다. 다른 역할로는 올림피아(호프만의 이야기), 필랭(토마의 미뇽), 아미나(몽유병자), 마리(연대의 딸), 여왕(림스키-코르사코프의 황금 닭), 그리고 도니제티의 ‘샤무니의 린다’ 등을 맡았다. 폰스의 메트로 고별공연은 1960년 12월 14일 갈라 콘서트로서 폰스는 리골레토에서 질다의 아리아인 Caro nome를 불렀다. 만당이 끝없는 박수를 보냈다.
폰스는 메트로 이외에도 파리의 오페라 갸르니에, 런던의 코벤트 가든, 브뤼셀의 라 모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시카고의 리릭 오페라, 샌프란시스코오페라 등지에서 무대에 섰다. 폰스는 메트로에서의 고별 공연이후에도 1973년까지 콘서트 연주를 하였다. 미모의 폰스는 영화에도 출연하였다. 1935년 헨리 폰다와 함께 I Dream Too Much에, 1936년에는 That Girl From Paris와 Hitting a New High에 주역으로 출연하였다.
폰스는 프랑스 시민이었으나 1940년 미국시민이 되었다. 폰스는 1938년 미국에서 지휘자인 안드레 코스틀라네스(Andre Kostelanetz)와 결혼하였다. 안드레 코스틀라네츠는 자기의 이름을 붙인 오케스트라로서 세계에 음악을 선사한 사람이다. 두 사람은 1958년 이혼하였다. 2차 대전중에 폰스는 북아프리카와 동아시아의 전쟁터를 순방하여 연합군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모국인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최고의 명예훈장인 크루아 드 로렌(Croix de Lorraine)과 레종 도뇌르(Legion d'Honneur)을 수여하였다.
릴리 폰스의 성량은 풍족한 편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한점의 티도 없이 맑으며 특히 고음에서는 놀랄만큼 완벽하다. 소프라노 니나 모르가나(Nina Morgana)는 폰스의 노래를 처음 듣고서 폰스가 하이 C를 넘어서 A플랫(Ab6)까지 거침없이 낼수 있다는 데에 놀라면서 높은 찬사를 보냈다. 폰스는 사랑스러운 미모를 지니고 있어서 누구나 친근하게 매료당했다. 폰스는 77세를 일기로 텍사스의 달라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폰스는 남불 프랑스 리비에라의 칸느 인근에 있는 고향 땅에 묻혔다. 미국 메릴랜드 주 프레데릭 시의 남쪽 10마일에 있는 마을은 폰스를 기념하여 릴리폰스(Lilipons)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마을에는 열대어를 상업적으로 사육하는 연못(ponds)들로 유명하다.
조지 거슈인은 폰스에게 헌정하는 작품을 작곡하고 있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1937년 세상을 떠났다. 이 작품은 거슈인 사후에 마이클 토마스(Michael Thomas)가 거슈인의 스케치를 토대로 완성하였다. 이 작품의 타이틀은 ‘릴리 폰스를 위하여’이다. 작가 제임스 드레이크(James Drake)는 릴리 폰스의 생애를 그린 ‘Lily Pons: A Centennial Portrait'(백년만에 나올수 있는 인물: 릴리 폰스)라는 책자를 펴냈다. 폰스는 음반을 많이 남기지는 못했다. 다만, 콜럼비아 레코드가 내놓은 Repeat Performance라는 타이틀의 음반은 수집가들의 품목이 되고 있다. 폰스의 남편 안드레 코스틀라네츠가 지휘한 음반이다.
질다(리골레토)
라크메
라크메
나편 안드레 코스틀라네츠와 함께
마리(연대의 딸)
비올레타(라 트라비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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