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강화-인천

강화중앙교회(잠두교회) - 1

정준극 2009. 3. 8. 18:13

강화중앙교회(잠두교회) - 1


강화읍내 신문리에 강화중앙감리교회가 있다. 강화에서 제일 큰 교회이다. 교인이 6천5백명이나 된다는 대교회이다. 강화와 같은 한정된 지역에서 이만한 규모의 교회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1900년에 설립된 교회이므로 2009년으로 창립 109주년을 기록한 오래된 교회이다. 수많은 인재들이 이 교회를 통해 배출되었다. 독립지사들과 연예인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김활란, 황정순, 곽규석씨등이 모두 이 교회 출신이다. 나와 강화중앙교회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 강화중앙교회의 전신인 잠두(蠶頭)교회, 그리고 그 이후의  이름인 강화읍교회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사연이므로 생략키로 하고, 우선 오늘날의 강화중앙교회가 1900년 설립 당시에는 잠두교회라고 불렀으며 1914년부터는 강화읍교회라고 부르다가 1976년 강화중앙교회로 명칭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소개코자 한다. 먼저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오게 된 경위와 강화중앙교회, 즉 잠두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는지에 대하여 잠시 알아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언제부터 들어왔는지에 대하여는 몇가지 주장이 있다. 개신교가 들어온 시기는 대체로 1880년대 중반으로 보고 있으므로 특별한 이의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어떤 교회가 가장 먼저 세워졌느냐에 대하여는 이론이 있다. 혹자는 황해도 송천(松川: 솔내: 소래)에 있던 소래교회가 한국 최초의 교회라고 주장한다. 1884년부터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만주에 갔던 조선 청년들이 만주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영국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후 고향 황해도에 돌아와 솔내에 예배처를 세우고 예배를 본 것이 소래교회의 전신이라고 한다. 소래교회는 외국 선교사의 도움 없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세운 교회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장로교나 감리교에 속하지 않은 교회였다. 그러나 소래교회는 해방이후 공산정권에 의해 문을 닫은 것으로 전해져 한국교회사에서 더 이상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동인천에 있는 내리(內里)교회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음 설립된 정식 개신교 교회라고 주장한다. 내리교회는 '한국의 어머니 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내리교회 앞 큰길의 안내표지판에 그렇게 써 있다. 그런가하면 혹자는 서울의 새문안교회(장로교)가 우리나라 최초의 정식 교회이며 그 뒤를 이어 정동교회(감리교)가 세워졌다고 설명한다. 새문안교회와 정동교회는 같은 해인 1887년에 설립되었다. 다만, 새문안교회가 1887년 9월에 설립되었으나 정동교회는 10월에 설립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제 이런 주장들의 배경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내리교회 정원에 있는 아펜젤라 목사님 기념상

 

잘 아는 대로 우리나라에 개신교 선교사로서 처음 들어온 사람은 미국 감리교의 아펜젤라(Henry Gerhard Appenzeller: 아편설라: 1858-1902)목사와 장로교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원두우: 1859-1916)목사이다. 조선 선교에 대한 꿈을 품고 미국을 출발하여 태평양을 건너 1885년 1월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일본에서 잠시 정황을 보며 기다리다가 더 이상 허송세월만 할수 없어서 이윽고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1885년 4월 5일 뜻 깊은 부활절의 아침, 비가 부슬부슬 오는 중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외국에 문을 연 항구는 제물포였기 때문에 그곳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사족이지만, 미국의 두 선교사가 1885년에 제물포항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여 현재 인천 올림퍼스호텔 앞 삼거리에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이 서 있다. 두 사람은 비록 제물포에 도착하긴 했지만 조선에서 아직도 외국 선교사에 의한 기독교 선교를 공식으로 허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서울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멀리 태평양을 건너 천신만고 끝에 조선까지 온 미국의 청년 선교사들로서 무작정 제물포에 정박한 배 안에서 기다리기만 할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누가 먼저 입국하느냐를 가지고 의논하다가 언더우드목사가 먼저 들어가서 사정을 보기로 결정했다.

 

언더우드목사는 아펜젤라목사에게 ‘아목사님은 신혼이시고 부인과 함께 오셨는데 만일 서울로 들어갔다가 부인께서 난처한 경우를 당하시든지 또는 병에 걸리시면 대단히 곤란하므로 이에 소제가 먼저 들어가서 사정을 살펴보고 연락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아펜젤라목사의 부인은 건강상태가 어려웠었다고 한다. 그러자 아펜젤라목사는 ‘언목사님의 말씀은 고맙지만 저로 말씀드리자면 이미 미국을 떠나올 때부터 주님의 사업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혼이었던 언더우드목사의 고집을 당할수 없어서 결국 아펜젤라목사가 부인을 간호하기 위해 나중에 상륙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나중에 사람들은 한국에 장로교가 감리교보다 먼저 상륙했다고 얘기를 했다. 언더우드목사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어릴 때에 미국 펜실바니아주로 이주하였고 청년 때에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먼 조선까지 오게 되었다. 당시 언더우드목사는 25세의 약관이었다. 결혼할 여자에게 함께 조선으로 선교하러 가자고 하였으나 거절당하자 파혼하고 혼자 몸으로 선교의 길을 떠났다고 한다.

 

   

아펜젤러(아편설라)목사님                  언더우드(원두우)목사님

 

언더우드목사가 먼저 조선 땅에 들어간 이후 아펜젤라목사도 곧이어 상륙하여 제물포에서 하회를 보느라고 약 한 달 반 동안 머물렀다. 아펜젤라목사는 제물포에 머무는 동안 제물포 사람들을 대상으로 쉬지 않고 선교활동을 펼쳐 이미 여러명의 신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얼마후 아펜젤라목사는 서울로 들어갔지만 인천에서는 아펜젤라목사가 뿌린 복음의 씨앗이 결실을 맺어 마침내 그해(1885년) 7월 19일 한국인들이 거의 자력으로 현재 동인천역 앞 쪽에 있는 내리(內里)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므로 인천 내리교회는 미국 감리교의 후원을 받기는 받았지만 우리 민족의 손으로 설립한 이 나라 최초의 교회가 된다. 사족이지만, 내리교회는 한국인의 미국 이민(하와이)을 최초로 주선한 교회이기도 하다. 한국이민사박물관 편을 참고하시라. 그건 그러하고, 아펜젤라목사는 5월말에 서울로 들어가서 정동에 터를 잡고 학교부터 설립하였으니 이것이 배재학당이다. 처음에는 적당한 학교명칭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886년 고종황제가 배양영재(培養英材)라는 친필 교명을 내림으로서 배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천 내리감리교회. 한국의 어머니 교회라는 별칭을 듣고 있다.

                       

조선정부가 공식적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을 승인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후인 1898년 6월이었다. 그렇다고 그 이전에 선교사들이 가만히 있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언더우드목사는 1887년 9월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했으며 아펜젤라목사는 같은해 10월 감리교회인 정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두 교회는 우리나라에 설립된 최초의 공식 개신교 교회가 된다. 조선정부가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자 미국 감리교는 1892년 초에 인천지역 담당자로 존스(George Heber Jones: 1867-1919)목사를 파송하였다. 존스목사는 1892년 여름부터 인천에 머물며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조선에 오기 전에 일본에서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한국어에도 능하였다. 그는 자기의 이름도 조원시(趙元時)라고 바꾸었다. 한국인 전도자들은 조원시목사의 후원으로 인천, 강화의 섬들을 누비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조원시목사는 강화도에 들어가 교회를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1892년 가을 강화읍에 들어가기 위해 남문을 두드렸다. 사족이지만 조원시 목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미국이민을 처음으로 주선한 사람이다.


 내리교회 정원에 있는 존스(조원시)목사님 기념상

 

그러나 당시 강화유수는 미국 선교사의 강화 유입을 거부하여 남문을 통해 들어가려던 조원시목사에게 즉시 인천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협박하여 쫓아냈다. 할수 없이 갑곶에서 잠시 머물다가 인천으로 돌아갔던 조원시목사는 이듬해인 1893년에 다시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강화도에 대한 선교를 추진하였다. 마침 1893년에는 영국 성공회도 강화도에 대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국인 조원시목사를 중심으로한 감리교의 선교와 영국인 코프(고요한) 신부를 중심으로한 성공회의 선교 모습은 서로 달랐다. 성공회는 조선 정부를 움직여 강화읍에 ‘조선수사해방학당’의 설립을 승인받았다. 성공회는 이 학당의 설립을 위해 강화읍에 쉽게 들어갈수 있었다. 그후 성공회는 1897년 트롤로프(M. N. Trollope) 신부가 강화읍의 견지산 산마루에 있는 옛 성터를 사들여 정지작업을 한후 성공회 강화성당을 짓게 되었다. 역시 사족이지만, 성공회 강화성당의 목재는 백두산 원시림에서 벌채한 소나무를 조마가신부가 직접 운반해 왔으며 목수일은 대원군에 의한 경복궁 중건 작업을 책임 맡았던 도편수가 맡았다. 그리하여 3년후인 1900년 ‘성바오로-성베드로 성당’으로 봉헌되었다. 이 성당이 현재 사적424호인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성공회 강화성당의 정문


그러면 감리교는 어떤 선교를 했는가? 성공회가 강화읍에서부터 시작하여 주변지역으로 선교의 범위를 넓혀간데 비하여 감리교는 주변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 강화읍으로 선교지를 확대하였다. 선교의 대상도 차이가 있었다. 성공회가 주로 강화의 지배계층과 식자층을 대상으로 삼았으나 감리교는 농민이나 어민등 상민 이하의 계층을 대상으로 삼았다. 성공회는 조선 정부의 후원으로 비교적 쉽게 강화읍에 들어갈수 있었으나 감리교는 처음부터 강력한 배척을 당하였다. 조원시목사가 강화유수의 거절로 강화읍에 들어가지 못하고 며칠동안 갑곶에 머물면서 전도하다가 인천으로 돌아갔던 일이 그것이다. 결국, 감리교의 강화 선교는 선교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에 의해 변두리로부터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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