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강화-인천

강화중앙교회(잠두교회) - 2

정준극 2009. 3. 8. 18:16

강화중앙교회(잠두교회) - 2


그때 강화도의 서북 해안인 서사면(현재의 양사면) 시루뫼(甑山: 시루미라고도 함) 출신으로 이승환(李城完 또는 李聖完이라고도 표기함)이란 사람이 인천에서 주막집을 운영하면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조원시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내리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하루는 조원시목사가 이승환에게 세례를 주겠다고 하니 이승환은 ‘저는 두가지 면에서 세례를 받지 못하겠습니다. 첫째는 고향 강화에 병환중인 노모가 계신데 어머니보다 먼저 세례를 받을수 없습니다. 둘째는 제가 술장사를 하는데 어찌 음주를 금한 교회에 반하여 세례를 받을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조원시목사는 이승환의 믿음을 기쁘게 생각하여 ‘그렇다면 내가 강화에 가서 어머니께 세례를 주겠습니다’고 제안하였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은 이승환은 혼자서 즉시 고향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자고 설득하였고 이에 이승환의 어머니는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승환의 노모는 병중이어서 어서 속히 세례를 받고 구원받고자 했다.

 

 교산교회 옛 건물

 

인천으로 돌아온 이승환은 조원시목사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말씀하신대로 강화에 함께 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조원시목사는 강화라면 사연이 있는 곳이기에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강화에 가서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겠다고 다짐하고 강화방문을 흔쾌히 승낙하였다. 한복으로 변장한 조원시목사와 이승환은 배를 타고 강화도의 서북쪽인 서사면(오늘날의 兩寺面) 해안에 도착하였다. 서사면 해안에서 이승환이 살고 있는 시루뫼로 가려면 반드시 다리목(橋項)이란 곳을 지나야 했다. 다리목 마을에는 마을 땅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김초시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김초시는 경주 김씨 양반으로 다리목 마을뿐만 아니라 서사면에서 그의 말 한마디라면 모두들 절절매는 입장이었다. 그런 김초시가 이승환이란 청년이 자기 어머니에게 예수교 세례를 주기 위해 인천으로부터 서양 선교사를 데려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초시는 펄펄 뛰며 ‘서양 귀신(洋鬼)은 단 한명도 내 땅을 밟고 지나갈수 없다’고 엄포를 놓고 이승환에게는 만일 양놈 선교사를 데리고 다리목을 지나가면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였다. 집에 불을 지른다면 거동하지 못하는 노모는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이승환은 고민에 빠졌다.

 

 교산 교회 옛 건물과 새건물. 옛 건물은 박물관으로 삼을 계획이란다. 


이에 조원시목사는 이승환에게 ‘그럴것 없이 밤에 어머니를 업고 해안으로 오면 내가 기다리고 있다가 세례를 주겠노라’고 제안하였다. 이승환은 그거야말로 어쩔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밤에 노모를 등에 업고 다리목 마을을 비켜돌아서 먼 갯벌을 걸어 조원시목사가 기다리고 있는 배에 도착하였다. 이승환의 어머니는 달빛이 휘영청 밝게 비치는 가운데 선상에서 조원시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니 그가 강화 최초의 세례교인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시루뫼의 이승환 집에서 이승환과 그의 어머니가 예배를 보게 되었고 며칠 후에는 친척 몇 명이 함께 예배에 참여하는 놀라운 역사(役事)가 이루어졌다. 1893년의 일이었다. 이승환의 집에 모였던 사람들은 얼마후 김초시의 도움으로 교회당을 마련했다. 처음에는 서사(西寺)교회라고 부르다가 그후 교항(橋項)교회, 교산(橋山)교회, 양사(兩寺)중앙교회라는 이름을 거처 현재는 강화교산교회라는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현재 교산교회는 새 예배당을 건축하고 ‘존스기념예배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옛 예배당은 기념박물관으로 삼기로 했다. 교산교회는 양사면 교산1리에 있으며 전화번호는 032-932-5578-9이다. 또한 덧붙여 말하자면 조원시목사의 부인은 1892년 미국을 떠나 제물포에 도착하자마자 창영동에 영화학교를 설립하였다. 그건 그렇고 조원시목사의 출입을 방해했던 김초시는 어떻게 되었는가? 김초시의 도움으로 교회당을 마련했다는 얘기는 또 무엇인가?

 

 강화중앙교회 새성전. 2000년 12월에 창립 1백주년을 기념하여 새로 건축하여 봉헌했다.

 

김초시는 이승환이 노모를 업고 해안까지 걸어가서 선상세례를 받도록 했다는 얘기를 듣고 우선 이승환의 효심에 감동하였고 이어서 도대체 예수교가 무엇이건대 이토록 헌신적으로 열심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날이 밝자 김초시는 스스로 해안가의 조원시목사를 찾아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중에 기독교의 복음이 진정한 진리임을 깨닫게 되어 결국 기독교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이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당시 김초시는 자신이 무척 궁금해 하던 정감록의 십승지지라는 주요 비결이 바로 성경의 십자가지도(十字架之道)임을 깨닫고 개종을 결심했다고 한다. 김초시가 바로 강화 기독교의 선구자인 김상임(金商壬)이다. 그리스도를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사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하여 이후로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바울사도로 만드셨던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강화도의 김상임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이후 김상임은 마을의 산당(山堂)에 불을 놓아 폐쇄하고 미신을 타파하며 성경공부에 열중하였다. 김상임은 1894년 10월 세례를 받고 다리목 마을을 복음화하고 예배처가 필요하게 되자 시루뫼(시루미)의 이승환 집에 모이던 상민들과 다리목의 양반들을 한 곳에 모아 예배를 드리게 함으로서 강화의 첫 교회인 교산교회를 탄생케 했다. 양반 앞에서는 머리도 들지 못하던 상민들이 양반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부름 받아 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이것이 기독교의 힘이었고 강화 사회에 불어 온 가장 큰 변화였다. 김상임은 이후 강화 전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목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여 바야흐로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으나 갑작스런 병환으로 목사안수를 받기 4개월 전에 소천했다. ‘강화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회’는 1995년 교산교회 마당에 김상임을 기념하는 공덕비를 세웠다.

 

교산교회에 세워진 김상임 공덕비. 요한복음 11장 25절의 말씀이 적혀 있다.


이리하여 강화에서의 복음은 교산교회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모두 조원시목사의 헌신적인 공로 때문이었다. 강화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교회는 홍의교회였다. 1896년의 일이었다. 홍의교회는 송해면 상도리에 사는 박능일(朴能一)에 의해서 1898년 설립되었다. 서당 훈장을 하던 한학자 박능일은 같은 한학자로서 초시까지 하고 행세께나 하던 김상임이 갑자기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소문을 듣고 충격을 받아 따지러 갔다가 오히려 김상임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교인이 되어 돌아온 인물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집에서 서당 학생 20여명을 데리고 예배를 보기 시작한 것이 홍의교회의 시작이다. 강화에서 탄생한 두 번째 교회인 홍의교회는 강화의 안디옥교회라고 부를만큼 복음적이었고 또한 자립적이었다. 홍의교회 교인들은 믿음의 형제가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모두 이름에 한일자를 넣어 개명하였다. 하나님은 한분뿐이라는 의미에서였다. 이들은 대부분 강화의 다른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주역들이 되었다. 권신일, 권혜일 부자는 교동도로 건너가서 1899년에 교동읍내교회를 개척하였고 종순일은 길상면에서 교인들을 얻어 나중에 길상교회를 세우는데 앞장섰다. 가장 주도적인 박능일은 1900년에 강화읍에 들어가 잠두의숙(현재 강화 합일초등학교)의 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이어 잠두교회(강화읍교회→강화중앙교회)를 세우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박능일을 비롯한 믿음의 권속들은 인천의 조원시목사와 협력하여 강화에 고부교회(1897)와 상도리교회(1899)를 세우는 역사도 이룩하였다. 그러므로 강화에는 잠두교회(강화중앙교회)가 설립되기 전에 이미 여러 감리교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성공회 강화 성당에서 바라본  강화중앙교회. 옛 잠두교회 및 강화읍교회가 전신.

 

잠두교회가 생긴 사연은 이러하다. 1900년 가을, 상도리교회에 다니던 주선일, 허진일, 최족일, 김봉일(모두 한일자로 이름이 끝남을 기억하시라), 이살로메 등 10 여명이 강화읍에도 감리교단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돈을 모아 강화읍 천교하에 6칸짜리 조그마한 집을 사서 기도처로 삼은 것이 잠두교회(강화중앙교회)의 시작이다. 그러나 집이 너무 비좁아서 날로 늘어나는 교인들을 수용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듬해인 1901년 제물포지방 감리사인 조원시(존스)목사의 도움으로 현재의 신문리 위치에 기와집 25칸과 초가집 16칸을 사서 잠두교회 예배당을 봉헌하였다. 박능일은 홍의교회에서 잠두교회로 옮겨와서 교회의 시작을 열심히 도왔다. 잠두교회는 새로 교회당을 봉헌한 것과 동시에 박능일을 전도사로 임명하여 복음전도의 사명을 마음껏 수행하도록 했다. 또한 1901년 교회부설로 교육기관인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설립하고 첫 숙장(塾長)으로 과거 서당의 훈장을 했던 박능일 전도사를 임명하였다.

 

 강화중앙교회에 세운 3형제 순국 추모비

 

잠두교회의 김동수(金東秀)권사 3형제가 순국 당한 얘기는 빼놓을수 없다. 1907년 일제가 구한국군대를 해산하자 해산군인들이 이에 항의하는 소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일부지역에서는 해산군인들의 무장투쟁까지 벌이고자 했다. 당시 강화진위대장은 이동휘(李東輝)로서 잠두교회의 권사였다. 이동휘권사는 강화에 보창학교를 설립한 애국지사로서 나중에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강화에서도 진위대가 해산되었다. 해산군인들과 주민들 사이에서 비판적인 소리가 거세게 나왔고 일부 군인들은 무장봉기까지 계획하였다. 일제는 강화에서 진위대 병정해산과 관련한 소동을 잠두교회의 교인들이 선동했다고 주장하고 선동자 색출에 나섰다. 강화에서 친일행동을 하던 일진회는 진위대 소동의 주동자가 잠두교회의 김동수권사와 김남수권사, 김영구성도 3형제를 비롯한 7명이라고 모함하였다. 결국 김동수 3형제를 비롯한 잠두교인 7명이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가던중  더리미(加里尾) 해안에서 잔학한 근성을 들어낸 일경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들이었던 이들이 무참히 살해당하자 강화에서는 민족적 의식이 한층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그후 삼일운동 때에는 어느 지역보다도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거세게 펼쳤다. 현재 강화중앙교회에는 이들 삼형제의 순국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더리미는 현재의 갑곶돈대 아래쪽에 있는 장어마을 가리산돈대 부근이다. 

 

 

 강화중앙교회 목사관. 일제시대에는 단층 기와집이었다. 현재 아래층은 교회 시온오케스트라 사무실로 사용.

1942년 늦은 봄, 강화읍교회 정등운목사님 시무당시 기념 사진. 강화중앙교회 현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사진에는1943년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지만 틀린 설명이다. 아마 정등운 목사님 송별 기념 사진인듯 싶다.


다시 잠두교회의 연혁으로 돌아가면, 잠두교회는 일제에 의한 탄압이 강화될수록 민족의 앞날을 위한 선진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1909년 교회부설로 합일여학교를 세웠으니 나중에 먼저 세운 잠두의숙과 합일여학교를 합하여 오늘의 합일초등학교로 발전되었다. 1914년에는 교회가 비좁아 새로 강화 최초의 서양식 벽돌교회를 신축, 봉헌하고 교회 이름도 잠두교회에서 강화읍교회로 변경하였다. 1934년에는 구목사관을 준공하였고 이어 여전도사관을 마련하였다. 목사관을 준공한 것이 무슨 중요한 일이겠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사항이므로 설명하는 바이다. 그건 그렇고, 6.25사변 이후, 강화도에는 북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내려왔다. 북한으로부터의 피난민들 때문에 강화에서의 교회활동은 더욱 강화되었다. 강화읍교회가 이들 피난민들의 안식처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강화읍교회는 피폐한 농촌을 회복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복민의숙(福民義塾)이라는 기독교 농민교육기관을 설립하였으니 훗날 강화실업고등기술학교의 전신이다. 또한 강화읍교회는 강화에 기독병원을 설립하여 질병으로 고통 받는 교인들을 치료하며 불신자들에게는 전도의 방편으로 삼았다. 강화읍교회는 1976년 강화중앙교회로 이름을 바꾸고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2000년 말에 선교100주년 기념대성전의 입당예배를 보고 이듬해 9월에는 새로운 성전을 봉헌하는 예배를 성대하게 드렸다. 이로써 잠두교회-강화읍교회-강화중앙교회에 대한 간략한 연혁을 설명하였거니와 오늘의 강화중앙교회는 조선말기 쇄국정책에서도 꿋꿋이 발전하였고 특히 일제의 탄압 아래에서도 민족을 지키는 횃불로서 꺼지지 않고 견뎌왔으므로 ‘강화의 예루살렘교회’라는 찬사를 들어 마땅하다. 강화중앙교회의 이민구 목사님에 대한 에피소드는 한량 없으나 다음 기회에 피설키로 작정하고 다만, 2009년에 은퇴한 이민구 목사님의 놀라운 헌신으로 오늘날의 강화중앙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더할수 있었음을 첨언코자 한다.


이상의 강화선교역사에서 볼수 있듯 강화지역에서는 선교의 초기로부터 감리교회가 단연 성장하였으니 2005년 현재 강화지역에는 119개의 감리교회와 2만6백여명의 감리교인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화지역에는 개신교회가 모두 177개 있다. 그러므로 전체 개신교회의 거의 68%가 감리교회인 것이며 교인수로 볼때에도 전체 개신교인중 약 85%가 감리교인이다. 아펜젤라목사와 존스목사가 뿌린 겨자씨 한 알이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로 자란 것이다. 나와 강화중앙교회, 특히 구목사관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하여는 궁금하겠지만 잠시 참으시라! 다음번에 설명코자 한다.

  

 강화중앙교회 1백주년 기념교회 봉헌 기념석

 

[강화 교동감리교회]

강화의 서쪽 화개 선착장에서 페리선을 타고 잠시 가면 교동도의 월선포에 도착한다. 교동교회는 선착장에서 보일 정도로 길가에 있다. 주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교동남로 432번지이다. (전화 932-4514). 교동감리교회는 1899년 8월 1일 창립되었다. 교동에 선교사가 방문한 것은 1898년 4월 경이라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 선교가 시작되었다. 교동교회가 창립되는 과정에는 인천 내리교회에서 모금한 국내전도회 헌금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하여 1899년 홍의교회 권사로 봉사하고 있던 권신일 씨가 교동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전도를 시작하고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교동교회는 2013년으로 선교 113주년을 맞이한다. 2013년 현재의 담임목회자는 구본선 목사님이다.

 

교동감리교회(2013. 6 촬영)